지빌레 비르크호이저-왜리 - 민담의 모성상 (분석심리학연구소) 中 여기저기 발췌.


p.26-p.29-

 인간이 자신의 정신의 측면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또한 어떤 입장이어야 하는지...

 만약 어떤 사람이 의식세계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했다면, 그에게 있어서 충동성은 위험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자연 모성은 그에게 독을 섞는 여성이다. 그는 자신에게 제공된 음료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 음료에는 독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 모성이 제대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독을 섞는 마녀가 아니라, 도움을 주고 길을 가르쳐 주는 형상이 된다.

 무엇보다도 소위 운명적이라고 할 모성과 연결된 사람은 반드시 모성적 무의식을 경험하도록 되어 있다. 모성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본성적으로 모성 원형에 의하여 각인된 사람이다. 그러한 소질적 특성이 파괴적으로 작용하느냐 혹은 창조적 활동의 전제가 되느냐는 그가 자신 안에서 모성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모성 콤플렉스가 주는 선물인-) 무의식에 관계할 열쇠... 그것은 내면의 풍요에 이르는 통로를 열 수 있기 때문에 황금빛이다. 그러나 당연히 이런 열쇠를 사용할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수많은 개별자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모성 원형의 손상시키는 작용만 경험하게 된다. 자연 모성의 원상에 의한 사로잡힘은, 당사자가 대부분 본능의 손상을 입고, 본능적 삶의 불균형에 이르는 현상이다.

 모든 정신적인 것, 의식화되려는 것을 적대시하는 자연 모성... 모성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파괴적인 관습이나 인습과 연결되어져 있음으로써, 즉 과거성에 집착함으로써, 종종 모성의 위협을 받게 된다.

 모성 원형은 집단적 사로잡힘의 상태라는 형식으로, 새로운 것을 가져오는 자이기도 하다. 모성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바로 무의식에 이르는 통로를 발견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이다. 만약 그에게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는 비본질적인 심지어는 병적인 충동성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래서 충동성은 무의식적으로만 머물러 있는 창조적 재능의 표현일 때가 많다.

 이 때문에 모성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창조성을 발휘하도록 선고된 자이다. 말하자면 그는 오로지 창조적 행위를 통해서만이 모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것은 그를 괴롭히는 개인적 어머니가 아니라, 거대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 원형적인 것, 즉 무의식에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자신을 매혹하는 것이 그의 심혼인 모성적인 것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가 된다면, 어쩌면 모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임시로 그럴 뿐이다. 오로지 창조적 작업을 통해서만이, 그는 모성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매우 강력한 약물, 질병 및 노령화 등에 의해 겉보기에 죽음과 같은 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p.38-

 정신에 적대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모성... 오로지 그냥 자연(본능)적인 것으로의 퇴행은,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독이 된다.


p.45-46-

 일반적으로 젊은이들의 길은 우선 무의식에서 벗어나 나아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도달하려고 애써야 한다. 무의식이 젊은이의 의지에 대립해 있더라도, 그는 그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만약 무의식이 그가 의식적으로 설정하여 놓은 것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한다면, 그는 정당하게 자신의 것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무의식이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처럼 사로잡고 가두고 죽이려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온갖 노력과 힘으로 극복해야 한다. 그는 그렇게 모성적 무의식에 대항하며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그는 과거에 자신을 묶어두려는 모성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무의식과 하나였던 행복한 상태로 되돌아가도록 자신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여전히 그는 모성의 보호 속에 어린 아이로 살고 있으므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의 시선은 대부분 내면세계에서 벗어나서 외부세계의 대상들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는 제대로 삶을 살 수 있도록 절대적 실제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p.87-

 전의식적 상태에 빠질 위험에 처한 사람은, 동물에게 위협을 받거나, 혹은 동물을 다루거나 길들이는 것을 배우는 꿈을 꿀 수 있다. 꿈이나 민담에 등장한 동물의 종류에 따라 어떤 류의 무의식성인지를 추측할 수 있다.


p.102-

 그러한 위험이 특별히 창조적인 인간에게 얼마나 위협적인지... 그것은 모두 무의식 상태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새로움의 원천이면서도 또한 사악한 마녀이기도 한 《모성》에 대한 그리움을 충족시켜준다. 수많은 목마른 사람들이 갈증을 해소하는 그 원천에 빠져 죽고 만다.


p.122- 

 자아는 무의식과의 긍정적인 연결이 있든 없든, 무의식과 구분 가능한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p.127-128-

 모성성은 무의식성으로 나아가려는 경향, 즉 모든 의식성 및 현존의 시작과 끝이 있는, 기복한 어스름한 상태로 가려는 경향이다. 그래서 모성의 형상은 수면 상태를 가져온다.

 그림 형제의 모음 민담 《까마귀》에서는 모성상이 주인공에게 제공한 음식물이 잠들게 하는 작용이 있음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공주를 구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공주를 숲 속의 노파가 살고 있는 집에서 기다렸다. 즉 그는 무의식에 가까이 접근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노파의 집에서 먹거나 마시면 안 되었다. 그가 그곳에서 제공된 것을 먹었기 때문에 깊은 잠에 빠져들어서 공주를 구할 수 없었다. 이 민담에서 모성에 의해 잠들게 되는 부정적 측면, 즉 위험이 잘 묘사되어져 있다. 노파는 분명 양육하는 모성상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무의식성을 제공할 수 있다.

 수면 그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잘못된 순간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부정적인 것이 되고 만다. 남성이 자신의 내면, 즉 자신의 감정을 (아니마-) 구해내려면, 그는 무의식, 즉 잠에 빠져들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양육하는 모성에 의해 잠드는 위험에 이른다. 왜냐하면 모성은 그를 아동의 상태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당연히 모성에 의해 주어진다. 그는 그런 상태에서 전혀 투쟁하지 않으므로 무의식적이 되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몇 십 년 동안 모성 콤플렉스의 부정적 영향력으로 인해, 자기에 대해서나 자신이 한 것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낸다. 그들은 생의 반을 꿈꾸듯 보낸 다음에서야 비로소 깨어난다. 그들은 다른 상(像)이 필요해서 소위 자신의 콤플렉스의 감옥에서 지내는 것이다. 종종 민담에서 어두운 모성은 자신의 희생물을 사로잡고 있다. 모성이 생산하고 있는 일반적 태도는 감옥으로 묘사된다.


p.206-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 소망...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동경... 이런 경향에 대하여 무지할수록 그에게 죽음의 모성은 비밀스러운 독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p.209- p.210-

 말하자면 마녀는 선한 것에 비밀스럽게 악을 첨가하여 준비하였다. ...그는 마녀의 오두막에서 배불리 먹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삶에 대한 굶주림을 그러한 위험한 모성에서 해결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제공되는 음식은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연 모성의 원형이 우리 인간에게 모든 ‘본능적인 것’과 ‘충동’을 과대평가하도록 유혹하는데, 그런 과대평가가 바로 우리 자신을 파멸시킨다. 우리 자신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가치 평가가 제대로 되었느냐에 달려 있다.


p.144-

 부정적 모성.. 그것은 모성에 매달리게 하고 유아적으로 머무르게 하는 경향이므로, ...그것이 어떤 것으로 우리 속에서 겪어져야 하고 태워져야만 한다.


p.137-

 원시인은 불이 크게 일어나면, 더 이상 불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정서와 격정의 (충동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원칙 없음과 망아적인 무시간성은 모성과 연결된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아이처럼 머물면서 전혀 통제할 필요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성적 무의식의 근원적 불이 자신의 긍정적 창조적 측면으로 경험될 수 있으려면 먼저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렇게 되어야 무의식을 에너지의 근원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며, 그것이 바로 자신을 데우고 깨달음을 주는 기능임을 경험할 수 있다.


p.140-

 내면의 재탄생을 주선하는 불과 화덕의 특성은 어떤 심리학적 사실에 기인한다: 만약에 자신의 내면의 격정을 살리게 되면, 이는 《의식 수준의 저하》로 만들고, 그것으로 인해 무의식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마찬가지로 정서적으로 사로잡힌 상태에서 변환이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이것을 거듭 재탄생이나 구제되는 것으로 간주했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서적으로 사로잡히도록 내버려 둘 수 있어야 한다.


p.161-163-

 모성 형상이 무의식을 의미하기 때문에, 모성의 감옥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혹은 부정적이든 무의식과 연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무의식은 종종 내면의 성장 과정을 위해 삶과의 단절, 즉 고립을 강요한다. 이 고립은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나중에 결과로서 드러날 때(에서야-) 인식될 수 있다. ...어둡고 사악한 모성 원형에 의해 일어난 고립조차도 필연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드러난다.

 보호해주는 선량한 모성 형상에서 가두는 어두운 모성 형상으로의 이행은 유동적이다. 많은 경우에 사악한 의도에 의해서 일어난 금고형이 주인공을 위한 일종의 부화의 시간으로 드러난다. 부화의 시간은 민담의 전체 과정에서 보면 보다 더 높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일종의 전제임이 입증된다. 신경증도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필수적 감금 상태라 할 수 있다. 전체 발전과정에서 갇힌 상태를 반드시 필요한 단계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우에 감옥은 마법이 작용하는 원으로,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보호하는 원에서 대립들이 결합하고 결실을 맺게 된다. 내면의 성장과정은 외부로 향해 불필요하게 흘러가는 것을 막고 보호할 필요가 있다. 미성숙한 의식세계는 그런 보호가 마치 감옥처럼 여겨질 것이다.

 마녀는 자주 심혼적 변환을 가져오는 원인으로 드러난다. 매혹할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아주 단순하게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무엇인가를 변환시킬 힘을 갖고 있다. ...마법의 영향력 덕분으로 무의식은 변환의 장소, 재탄생의 장소가 되는데, 이는 주로 태모로 상징화된다.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모성이다. 또한 신화에서는 모성이 죽음을 초래하는 측면을 다루는데, 이것도 새롭게 하려는 모성적 능력에 관한 것이다.


p.133-

 마녀는 북 치는 사람에게 자신을 위한 세 가지의 일을 시키는 조건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이는 그녀에게 몸값을 주고 자신을 구출해야 하는, 즉 그녀를 위해 일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녀 곁에서 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모티브는 민담이나 신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무의식이 움켜쥐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 치는 사람은 영리한 책략으로 거인을 속이고, 마술 안장 덕분으로 손쉽게 거기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거기에서(부터는) 아주 엄청난 노력의 투입이 있어야 했다. 그는 그의 마지막 힘까지 동원해야 했다.

 연못의 물을 다 퍼내고 모든 물고기를 잡아서 분류... 그 다음에는 숲에서 나무를 전부 베어서 쪼개어 태우라고... 이는 일종의 무의식에 대한 작업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의식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에게 요구된 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 너무도 거대한 것, 그에게 제공된 어떤 보조 도구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는 무조건적으로 엄청난 노력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만 인간적인 평가로는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무의식의 극복을 위해 가장 내밀한 심층적 충동이 발동되어 있는 사람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창조적 작업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종종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요구된 과제를 결코 완수할 수 없으리라는 느낌으로 엄습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아(Ego) 혼자서 그런 과제를 결코 완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 자아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한다는 어떤 희망이 있어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아는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실현치 못한다. 자아는 민담의 주인공처럼 되어야 한다. 민담의 주인공은 시작부터 가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오전 내내 얼굴에 땀이 맺히도록 골무로 연못의 물을 퍼 올렸다. 그러자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그의 과제를 넘겨받는 힘이 나타났다. 그것은 민담에서 마술 반지를 갖고 있는 소녀였다. ...소녀는 북 치는 사람이 자신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도록 고무하였다.


p.141-

 주인공은 태모에게 충실한 봉사를 해야 했다. 우리는 태모가 성숙시키려고 하는 것을 의식으로 끌어올리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창조적 작업을 해야 한다. 모성적 무의식에서 구워지게 될, 즉 성숙하게 될 내용은 의식으로 끌어내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변환과정에서 수동적으로, 그래서 무의식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태도를 취해야 할 뿐 아니라, 때가 되면 빵이 타지 않게 해야 하듯이, 적극적으로도 참여해야 한다.

 열은 파괴를 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분리된 요소들을 연결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무의식적 정서성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열은 우리를 자신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소외시키고 손상하게 하고, 또한 그런 고통을 통하여 내면의 통일체가 되도록 함께 녹아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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