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빌레 비르크호이저-왜리 - 민담의 모성상 (분석심리학연구소) 中 여기저기 발췌-


p.7-

 계모든, 마녀든 어떤 부정적 형상의 모성상도 나름대로 목적의미를 갖고 있다. 주인공인 중심인물에 대한 모성상의 영향력은 파괴를(파괴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중심인물의 반응을 유도하여 변환에 이르게 하고,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의미를 실현하게 한다.


p.55-

 여성에게 있어서 《대지의 모성》의 형상은 그림자, 자기 등, 일종의 여성 원리의 자기 묘사와 관계한다.

 딸의 형상, 즉 신성한 소녀, 코레(Kore)의 형상 역시 대지의 모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딸의 형상은 신화적으로 모성과 거의 떨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은 모성상과 대립 쌍을 형성한다. 모성과 딸은 유일하게 서로 함께 속하는 전체이다.


p.56-

 백설공주는 사악한 계모의 질투에 저항해야 하는 순진한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두운 면모에 의해 추적당하는 순백의 달의 여신이다.


p.57-58-

 만약 우리가 그림 형제의 모음 민담에서 여성의 문제점을 찾아보려 할 때, 계모에 의하여 쫓겨가고 있는 딸들에 관한 모티브들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놀라울 뿐이다. 다른 어떤 종류의 민담들보다 계모를 다루는 민담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민담이 개인의 전(全)인격화의 길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여성의 전(全)인격화는 그런 모티브 없이 알려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개인의 전(全)인격화 과정에 있는 여성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어두운 모성 형상과 대화를 해야 함을 의미한다. (‘바보’가 주인공인 민담은 남성 특성을 중심으로 한 민담인 것과 같다.)

 여기서 사악한 계모의 형상이 종종 《백설공주》나 《백색 신부와 흑색 신부》처럼 ‘피할 수 없음’의 특징으로 드러난다. 모성은 죽음에 이르도록 여성 주인공을 쫓는다. 이러한 상징적 죽음은 재탄생의 조건이 된다. 심리학적으로 그것은 의식화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와 같은 어두운 계모 형상이 개인의 전(全)인격화를 하도록 하는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민담에서 살펴보면 어떤 새로운 여성적 가치가 생성되면, 그것은 마침내 집단을 이끄는 가치에 이르게 되는데, 이야기에서는 여성 주인공이 결말에 여왕이 된다. 그런 가치의 것은 자신의 가장 어두운 여성적 힘의 측면에 의해서 추적되도록 내맡겨야만 한다. 그것이 여성 및 집단성에서 관통되어야 하고, 그래서 더 이상 그러한 어두움이 해를 끼칠 수 없게 되어야 한다.


p.63-64-

 ...(새로운 여자아이의 탄생은-) 여성적인 것의 쇄신- 남성의 아니마, 혹은 여성에서 여성적 삶의 원형의 쇄신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왕(선한 어머니-)의 죽음을 감정에 대해 늘 취하고 있던 태도가 사라진 것으로, 혹은 남성의 경우 모성과 연결되어져 있는 아니마 상이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자의 남성은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과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할 것이다. 이는 인간마다, 또한 시대마다 감정에 대해 그 자체로 처신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는 어떤 특정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 및 개별자의 삶에서 그것의 쇄신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담에서 여왕의 죽음과 더불어 어떤 영역에서 있던 묵은(낡은-) 감정의 태도가 사라져 버린 것인데, 이는 또한 개별 인간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오래 묵은 것은 사라질 뿐 아니라, 새로운 것에 의해, 즉 백설공주에 의해 교체가 일어난다.


p.269-

 이러한 (선한 어머니상의 죽음 같은-) 이행 단계의 기간은 대부분 위기의 시간이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온기를 제공하는 중심이 더 이상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 우리들은 대부분 그 자신이 얼어붙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p.59-

 그렇게 추적당하는 딸의 형상은 모성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갖는 여성에 해당한다. 즉 부정적 모성 콤플렉스가 있는 여성을 나타낸다. 그런 여성은 일반적으로 아주 저조한 본능의 기초를 갖는다. 그런 여성도 민담에서 보듯이, 처음에는 선하고 순수한 모성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 모성이 죽고 그 자리에 대신 사악한 계모가 등장한다. 그 계모는 그녀에게 삶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의 내면적 자연(본성)적 기초가 손상당한다. 《숲 속의 세 난쟁이》에서 계모는 여성 주인공을 거의 춥고 배고파서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만든다. 그녀는 과일 생산이 불가능한 시기에 딸기, 즉 대지의 달콤한 과일을 구해오도록 시킨다. 반대로 긍정적으로 보살피는 대지의 모성 형상에 사로잡힌 여성의 경우는 완전히 자신의 모성적 기능에 전념하게 된다.


p.60-

 계모-민담의 여성 주인공들에 해당하는 여성들은 무엇보다도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수하여,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무의식에 대립해 있으므로 악한 어머니가 결핍되어 있다. 말하자면 그녀는 무의식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삶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녀는 모든 무의식적 삶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는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계모-민담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의문에 대한 답이 된다. 그녀는 모성에게 그 자신의 삶의 근원, 즉 그녀의 근원적 본질을 부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민담의 출발 상황을 형성하는, 바로 여성성의 내밀한 심층적 분열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한 민담의 주인공에 상응하는 여성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녀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여성적 본성을 자신이 갖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그녀는 자기 자신을 여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그녀의 성장 조건, 즉 개인의 전(全)인격화를 위한 고통이 주어져 있기 떄문이다.


p.62-

 그런 두 여성적 성향 사이에 있는 갈등은 무의식에서 -민담의 상에서- 계모와 딸로 묘사되는데, 이는 어쩌면 어떤 새로운 여성적 가치를 생성하기 위한 전제가 될 것이다. 매 번의 새로운 생성은 이미 제시된 전제에 대한 첨예한 갈등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문화에 있는 심각한 결핍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갈등은 이미 언급했듯이, 모성신의 형상에서 어두운 측면이 분리되어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민담에서의 딸은 성장하고자 하는 젊은 쪽, 즉 생성하고자 하는 새로운 가치를 의미한다. 추적당하는 딸은 대부분 결말에 가서 여왕이 된다. 늘 그렇듯이 딸은 새롭게 집단을 이끄는 역할을 맡는다. 물론 근본적인 형식에서는 그렇지 않다. 여성 주인공은 백설공주처럼 죽음을 통과해야만 심리학적으로 온전한 변환이 이루어지므로, 죽음을 육화하고 있는 어두운 모성을 극복해야 그 역할을 넘겨받는다.


p.75- p.280-

 실제적으로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상징적인 죽음을 관통해야만 한다.

 자연(본성)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모든 것은 갱신을 위하여 늘 죽임을 당하는데, 우리 인간도 자연(본성)의 한 부분에서 그렇게 된다.


p.64-

 백설공주... 근원적 순수함... 감정이 그렇게 순진하고 순수한 (어린-) 상태... 이는 백설공주가 아직 삶의 이중적 의미와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270-

 여성 주인공이 자신의 고유한 기적 같은 생명의 샘을 사악한 계모나 계모의 딸에게 누설을 하고, 그래서 그것이 그림자 형상들에 의해 파괴가 되는 모티브... 그림자와 대립되는 여성 주인공의 순진함을 문제삼는다. ...바로 그런 순진함이 결국 자신의 그림자와 대립하게 만든다. 그녀는 자신 속에 가장 가치있는 체험을 파괴하는 적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적이 그런 가치 있는 체험을 잘못된 빛 속으로 옮겨놓기 때문이다.


p.157-

 우리가 신화에서 알고 있듯이, 모성신 영역에 있는 빛의 아들 형상, 예를 들면 탐무즈, 아티스, 아도니스들은 어두운 모성에 의해 위협을 받거나 죽는다. 이 상황을 구체적인 실제성으로 표상한다면, 민담의 마녀는 이바스의 실제 어머니의 어두운 측면을 의미하거나, 혹은 그를 파괴하려는 모성적 아니마일 수 있다. 이바스는 선한 아들 유형인데, 빛의 원리와 동일시되어 있어서 어두움에 의해 압도될 위험에 처하는 유형이다. 긍정적으로 모성과 연결되어 있는 젊은이는 종종 아주 구체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p.67- p.86- p.80-

 민담에서 보듯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의 대립성에서 비롯된 엄청난 고통스러움에서 의식화하는 것이다.

 대립물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것과 동일시하는 자아는 전체가 되려는 무의식에 귀속하는 것을 항상 주저한다.

 의식적 고통은 대립들이 함께 충돌함으로서 드러나며, 바로 그 충돌에서 어떤 갱신이 있게 된다.


p.165- p.166-

 주인공 아기는 아직 이해되지 않은 어떤 새로운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언제나 위협을 받는다.

 그 아이는 바로 마녀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아이는 어떤 온전한 것이 되려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가 성장하려는 데 필요한 것은 전체 여성성이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마녀가 가족으로부터 분리시킨 그 담은 극복되어야 한다.


p.168-

 마녀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어린 아이를 악마에게 주겠다고 약속하는 모티브는, 심혼적인 것에 대한 상실을 의미한다. 또한 실제적으로 아동들이 그들의 부모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넘겨받아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루고 있다. 그 어려움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악마(Dämonen)》, 즉 부모의 무의식의 부정적 내용으로, 그것이 아동에게 떠넘겨진다. 이런 작용은 아동이 오랫동안,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와의 심적 동일시를 하면서 살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종종 아동이나 청소년의 어려움들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들 부모들의 문제가 젊은이들의 삶에서 해결되도록 부각된다.


p.187-188-

 두 어머니(dual-mother)... 계모는 무의식으로부터, 즉 너무 단순하게 주어져 있는 삶의 분위기로부터 벗어나, 보다 더 확장된 의식성을 획득해야 하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러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과제는 보다 더 확장된 의식성을 갖추어야 하는 인간에게만 닥친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적인 재량에 따른다면 불가능한 것이므로, 보다 더 상위의 의식성에 도달하도록 요구된 것임을 의미한다. 이로써 초개인적 힘이 도움을 주기 위해 관여한다.


p.194-p.195-

 만약 그녀가 그렇게 괴롭게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집에서만 머물렀을 것이다. 강압적으로 내몰리지 않았다면, 그녀의 운명적 목표는 실현될 수 없었다. 괴로움은 너무 친밀한 관계의 환경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의미를 갖는다.

 융이 《변환의 상징》에서 자세하게 묘사하였듯이, 원형적 영웅은 사악한 모성의 추적을 받는다. 모성은 그를 추적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영웅이 되게 한다. 그는 모성이 제공하는 내면의 위험을 극복하는 최고의 수행을 강요당한다.


p.152-154-

 주인공인 아이를 통하여 인격화된 새롭고도 특별한 가치는 언제나 다시 파괴되어 버릴 위험에 처한다. 그래서 푼데포겔도 여성 요리사로 등장한 어두운 모성에 의해 위협당한다. 어두운 모성은 소년을 요리하려 하였다. 말하자면 무의식의 강력한 열기가 그 가치를 다시 집어삼키거나 끌어들이기 위해 격정과 위험한 정서의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모성에 의한 위협은 헤라클레스의 경우처럼 영웅의 운명에 속한다. 그래서 영웅은 두 어머니를 가지는데, 이는 아주 널리 알려진 원형적 모티브이다. 여성 요리사는 푼데포겔의 두 번째, 즉 부정적 모성에 해당한다.

 새로운 것을 가져와야 하는 특별한 사명을 가진 사람은 원칙적으로 무의식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 그는 인습적인, 소위 ‘안전한’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위험에 처한다. 그는 삶의 시간 내내 자신의 근원인 위험한 불과 연결되어져 있다. 무의식은 바로 그 자신이 가장 훌륭한 것으로 생산한 것을, 마치 공포의 흡입기처럼 다시 제자리로 되돌리려 한다. ...무의식은 그 자체 자족적이다. 그래서 다시 제자리로 되돌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수단 민담 《수뱌챠무쑤Subachamussu》를 예로 들면, 해마다 아이를 낳아 다시 잡아먹는 마녀가 있었는데, 한번은 그녀에게 도망치는 아이가 생겨났다는 내용이다. 무의식이 자기의 창조적 산물을 늘 다시 먹어 치우려 하고, 매번 새로워진 의식은 그런 무의식의 집어삼키는 경향에서 보호되어야만 한다.

 남성은 자신 속에서 삼키는 모성을 사로잡힘의 상태보다 더 심한 형식으로 경험한다. 부정적인 모성적 아니마는 삶의 가능성 앞에서 집어삼키는 심연처럼 입을 벌리고 서서, 그를 심혼적 기저로 끌어들이려 한다. 그래서 모성 콤플렉스에 의해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던 어떤 남성은 꿈에서 그의 어머니가 남편의 머리를 먹어 치우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상의 심혼적 과정을 특별히 정신증을 앓는 사람에게서 관찰하게 된다. 그는 늘 한 부분을 발달시키지만, 그것이 무의식의 우세함을 넘어서지 못해서 무의식에 의해 다시 압도당하고 만다. 물론 이런 상황은 정상의 의식 수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를 들어 항상 파괴적 격정의 우세를 극복하지 못하면, 오히려 그것에 의해 희생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모성이 우리 인간을 파괴하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유아성과 무책임성에 대해서 그렇게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갈등 없는 통일적 존재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향수는, 이 경우에 보다 더 큰 위험이 될 것이다.


Respons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