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빌레 비르크호이저-왜리 - 민담의 모성상 (분석심리학연구소) 中 군데군데 발췌-


p.147-

 콤플렉스는 어두움 속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 한다. 집단성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원형은 자기 스스로 빛 속에 자리를 차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필요하다면 어떤 인간을 대가로 지불하고서라도 그렇게 한다. 이 경우 우리가 종교적 태도가 아니라 제멋대로의 고집스런 태도로 원형을 대하면, 원형은 오히려 그런 우리를 파멸시키고, 원형 자신을 밝게 하기 위해 우리 인간을 악용한다.


p.94- p.99-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의식은 무의식에 점차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빼앗길 위험에 처한다.

 우리가 원형적 상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원형적 상들과의 관계를 발견하는 대신에 무의식에 의해 압도되고 만다. ...


p.199-200

 그 가치는 의식에 의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비본래적인 형식으로, 즉 충동의 반응으로 드러나고 있다. 충동이 정신성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을 뿐 아니라-무엇보다 프로이트가 그렇게 하였듯이- 의식이 수용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않을 때는 정신적인 기능들이 본능의 형식으로, 예를 들면 성욕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융이 발견한 사실인데, 그것은 아직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자신을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 오랫동안 자신도 모르게 성욕이나 어떤 억제할 수 없는 충동성에 의해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것은 오늘날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성욕을 억압함으로써 생긴 잘못이다. 감정을 억압하거나, 그것에 《단지 성욕일 뿐》이라는 도장을 찍는 것... 감정의 경험을 그런 시각으로만 이해하려 할 때, 감정은 손상되고 만다.


p.217-

 집단무의식의 원형들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운명적 특성의 힘으로 이루어진, 체험 가능한 실제성이다.


p.236-

 무의식에 포함되어 있으나 의식에 의하여 감지되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통합되지 못한 환상이 오히려 우리의 운명을 정하려 하면서 강요하거나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각인하는 신화를 알게 될 때, 비로소 그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무의식의 파괴적인 진행을 막을 수 있다.


p.230-231-232-

 우리는 자아의식과 동일시하는 한, 자유롭다고 잘못 믿고 있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 정한 것을 행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무의식을 알게 되면 비로소 운명의 실이 이미 오래 전에 짜여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의지를 보탤 수 있는지, 혹은 운명의 목적에 이를 수 있을지도 여기에 달려 있다. 옛 격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운명은 기꺼이 하게 이끌기도 하고, 끔찍이도 그것을 꺼려하게도 만든다.》 말하자면 운명이 의미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에 달려 있는데, 그것을 알게 되면 《기꺼이 하려는 것》으로 되어, 운명에 내맡기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본질적인 것이 일어났을 때 느끼는 감정... 결코 우연일 수 없는 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의 감정... 말하자면 어디엔가 이미 적혀 있었던 것이므로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는 두 번째 모이라의 이념에 해당한다. 그녀는 인간의 운명을 필사의 두루마리에 적어 두었다.

 모든 종교에는 한편으로는 미리 정한 인간의 운명에 관한 담론이 있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자유를 다루는 담론이 있다. 어쩌면 그 둘 다가 있어야 진실이 될 것이다. 물론 그 둘은 서로 파라독스하게 보일 것이다.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간직하려 한다면, 어떤 경우든 잘 될 것이다. ...나는 실을 잣는 여인의 상징으로 드러나 있는, 미리 알고 있고 미리 형상화하고 있는 무의식의 인식이, 부정적인 숙명론적 태도로 이끌었다고 믿지 않는다. 이 민담은 우리에게 운명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것이 결코 잘못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p.220-p.81-p.147-p.306-p.272-

 우리는 때로는 자신의 운명에서 모면해 갈 수 있겠지만, 그 경우는 자신의 본질적 정체성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기꺼이 그것을 (희생을-) 받아들인다면, 말하자면 그것을 의식해서 네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다.

 ‘그 자신이 되었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자신의 고유한 일회적 운명을 받아들이고, 겪어내고, 완수하는 것이다.

 우리는 희생을 통해서만이 무의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

 무의식은 어떤 희생을 요구하는데, 그 희생은 각 상황과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요구될 것이다.

 운명은 어떤 삶의 가능성을 손상하는데, 이로써 다른 (새로운-) 것을 거기에 등장하게 만든다. 심리학적으로 희생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희생으로 자아는 변환에 성공하지만, 그 변환에 대해 자만하지 않게 된다.


p.244-246-

 인간만이 모성을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성도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 한다.

 선한 모성은 잔인한 모성 혹은 본능적 모성에 대항하는 싸움을 한다. 우리 인간은 그 사이에 있으며, 인간성이 원칙적으로 그것의 통일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의식에서 인간적으로(의식적으로-) 되려는 본성적 측면 및 그런 충동이 있음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그 자체로 자족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의식의 빛을 구한다. 순수한 자연(본성) 상태는 그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유출에 의해 극복된다...

 융이 무의식에서 자기 실현의 추진력을 발견할 때, 그는 그것을 무의식 자체가 의식으로 나아가려는 것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원형적 모성이 우리 인간의 도움으로 자신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원형적 모성은 우리 인간 없이, 개인성 없이, 의식의 도움 없이 그것을 해낼 수 없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우리에게 가치 있는 꿈을 보내기 때문이다; 만약 그 꿈들이 의식에 의해 감지되고, 이해되고, 통합되지 않는다면, 그것의 영향력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다가 해안에 아름다운 진주를 뿌려 놓았지만, 다음 순간 다시 파도로 쓸고 가는 것과 같다.

 소위 모성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 즉 모성상에 의해 각인된 사람들은 해안가 주민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창조하거나 파괴하는 무의식에 더 가까이 있다. 그들은 오로지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무의식의 억누르는 영향력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창조적 수행은 한편으로는 수동적으로 자신을 무의식의 수중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능동적으로 무의식으로부터 생산된 가치들을 취하는 것이다. 후자의 것은 무의식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이고, 의식화하는 것이다.


p.283-284-

 본능적 앎, 자연 안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의 내용, 모성 원형의 정신적 측면...은 본능에 의해 운반되는, 무의식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인식 능력을 의미한다. 이때 그것은 인간적-의식적 앎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재빨리 사라져버리는 토끼처럼 직관적 앎이다. 융은 이것을 무의식 내부에 포함되어져 있는 인식 가능성으로 《절대적 앎》이라고 불렀다. 이는 의식과 뇌에 연결된 정신의 활동성이 아닌 인식 능력으로 나타난다. 융의 견해에 따르면, 무의식에 그런 앎이 있다는 사실은 꿈에서 길을 제시하는 기능으로 드러나는데, 그 앎은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파악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빛을 알게 한다.》 민담에서 어두운 숲을 통하여 토끼의 창백하고 깜박거리는 빛을 따라가게 되듯이, 꿈의 해석에서도 그렇게 빛의 모습이 드러난다. 자연(본성)의 빛은 대부분 달빛처럼 창백하다. 때로는 빛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그런 정도의 빛이라도 있는 것이 더 낫다.

 자연 모성에 의해 정신의 열매를 맺도록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무의식과 접촉하도록 해야 하고, 그의 산물을 포착하여 빛으로 끌어내어야만 한다. 즉 그것을 의식화해야 한다. 우리는 자연(본성)에 예속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창조적 힘을 갖게 되고, 그것으로 단지 자연(본성)일 뿐이라는 측면의 모성을 극복하게 된다. 이 때문에 민담의 주인공은 종종 (일시적인-) 태모의 시종으로 등장한다.


p.298-

 정신이 자연적(본성적) 삶에서 생겨난 것이고, 자연(본성)이 자신의 의미를 계시하기 위하여 정신적 의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문제이다.


p.303-

 달과 별의 빛(이 네온 불빛에 가리듯-)... 의식의 빛이 내면의 심혼적 자연(본성)의 빛 대신 환하게 비추고 있어서, 내면의 자연(본성)의 빛이 빛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민담의 주인공이 조언과 도움을 얻기 위해 자연(본성)의 빛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그런 《절대적 앎》도 우리의 의식적 인식이 필요하다. 자연(본성)의 빛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또한 꿈들을 이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꿈을 의식화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해석을 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연(본성)의 그림 언어이므로,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가진 치유적 목적을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한다.


p.14-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에 매료되어 무의식과 통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과제는 의식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삶을 파악하는 길이어야 한다. 민담뿐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 그것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태도야말로 두 관점을 하나로 연결할 가능성이 있다.


p.306-

 무의식의 가치가 겨우 유용성에 의하여 부각되는 것이라면, 파라독스하게도 그것은 결국 거대한 무미건조함이 될 뿐이다.

 무의식에 의해 압도당하는 사람은 의식의 가치에 그것을 통합하지 못한다. ...때때로 우리 자신을 무의식의 암시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심리학적 이해뿐이라고 생각해본다. (의식적인 이해를 통해-) ...내면의 영향력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때로는 삶을 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무의식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이 꿈에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한 꿈은 선량한 모성의 선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 선물은 어두운 모성의 영향력과 싸울 수 있게 도움을 준다.


p.271- p.307- p.31-

 융은 보다 더 높은 의식의 수준에 이르는 것이 본능에 -자연(본성) 그 자체에- 있음을 강조하였고, 동시에 심리학적 변환 과정도 반(反)자연의 길임을 강조하였다.

 자연(본성) 그 자체는 정신적 목표를 갖고 있다는 사실, 말하자면 《자연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고 시도한다》는 사실...

 신이 있다면, 그 신도 자기 자신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언제나 그랬듯이 인간에서 답을 구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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