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구스타프 융 - 기본 저작집 4 - 인간의 상과 신의 상 (솔) 中 발췌.


p.19-20-

 종교는 인간 정신의 특수한 태도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렐리기오religio’라는 개념의 본래 용법에 걸맞게 어떤 동적인 요소들에 대한 주의 깊은 고려와 관찰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동적인 요소들은 ’여러 가지 힘’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정령Geister, 귀령Dämonen, 제신Götter, 법, 이념, 이상Ideen, 또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인간이 그의 세계에서 강력하며 위험하거나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경험하여 그들에게 주의 깊은 고려를 하도록 한 것들, 혹은 위대하고 아름다우며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그것을 경건하게 숭배하거나 사랑하게 되는 그런 요소들이다.

 ...‘종교’라는 표현은 누미노즘의 경험을 통하여 변화된 의식의 특수한 태도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겠다.


p.23

 사람들은 보통 자신을 압도하는 듯 보이는 것들 앞에서는 불안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인간 속에 그 자신보다 더 강한 어떤 것이 있는 것인가? 이 경우에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모든 신경증이 일종의 도덕적 황폐를 수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이 신경증적인 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다. 신경증을 앓는다는 것은 사람의 기를 죽이게 하는 패배이며, 자신의 심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자기의 신경증을 패배라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 패배의 고통을 어떤 ‘비현실적인’ 것을 통해서 겪어 온 것이다. 의사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환자에게 그가 건강하며, 심장병도 암도 실제로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확인해 주었다. 심장병이 아닐까, 암이 아닐까 걱정하는 그의 신경증 증상은 단지 상상된 것들이다. 그가 자신의 병이 ‘상상병’이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열등감이 그의 전 인격에 퍼져든다. “내 증상이 상상된 것이라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디서 내가 이 저주받을 상상을 주워 모았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아직도 품고 있는가?”라고... 한 이지적인 남자가 자신이 대장암을 가지고 있다고 거의 애절할 정도로 확언하고는 바로 그 다음 순간, 기가 죽은 목소리로 물론 자신의 암은 단지 상상된 것임을 알고 있노라고 말할 때 그 처절한 모습에는 정말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무엇이 있다.


p.26-

 그의 교양과 지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를 교묘하게 속여서 사로잡아버린 어떤 것의 어쩔 수 없는 제물이었다. 그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그의 병적인 상태가 지닌 악마적 세력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었다. 강박관념은 실제로 암처럼 자라서 그를 덮어버렸다. 어느 날 그 관념이 나타났고, 그 뒤로 흔들림 없이 유지되었다. 증상 없는 기간이 그저 짧은 간격으로 있었을 뿐이다.

 그와 같은 증례들이 출현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인간들이 왜 그들 자신을 의식화하는 것을 두려워하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정말 커튼 뒤에 어떤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의식 너머에 있는 요소들을 ‘배려하고 주의깊게 살피기’로 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무의식에 있을 법한 내용에 관련해서 일종의 원시적인 데이시다이모니아(신을 두려워하는 것-)가 있다. 당연히 느낄 만한 모든 두려움, 모든 수치감과 조신한 감정을 넘어 ‘영혼의 위험peril of the soul’에 대한 은밀한 공포가 있다. 물론 사람들은 그런 웃기는 공포감을 시인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그 공포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부당하기는커녕 그것은 너무나도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p.29-30-

 사실 이성적인 수단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그런 힘을 불러들이려면 신경증 하나로 족하다. 우리의 암 공포 증례는 인간의 이성과 통찰이 가장 명백한 바보 같은 생각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나는 늘 나의 환자에게 분명히 바보 같은데도 이겨낼 수 없는 그런 생각이, 우리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과 의미를 말해 준다고 생각하기를 권한다. 경험을 통해서 나는 그런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적절한 설명을 찾아보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치료 방법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의 설명은 그것이 병적인 작용과 맞먹을 수 있는 가설을 만들어낼 때라야만 충분한 것이 된다. 우리의 환자는 의지의 힘과 암시 앞에서 그의 의식이 이에 대항해서 내놓을 만한 어떤 상응한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함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이 난처한 상황에서 고도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긴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환자 자신이 그의 증상 뒤에 숨어서 증상을 몰래 만들어내고 유지하고 있다고 설득시킨다면, 그것은 좋은 전략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견해는 바로 환자의 투쟁의지를 마비시키고 사기를 꺾을 것이다. 자신의 콤플렉스가 자율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그의 의식적 인격에 저항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설명은 개인적인 동기로 환원시키는 설명보다 현실적인 사실에 훨씬 더 가깝다. 뚜렷한 개인적 동기라고 볼 만한 것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 동기는 개인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다만 그 환자한테서 일어났을 따름이다.


p.31-32

 의식은 그 발생 시초에는 아주 불안정한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상대적으로 원시적인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에서 의식이 얼마나 쉽게 상실되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예컨대 ‘영혼의 위험perils of the soul’ 가운데 하나는 영혼의 상실이다. 그것은 영혼의 일부가 다시 무의식화하는 경우를 말한다. 다른 예는 아모크 질주(말레이시아 민간의 일종의 집단적 살인광-)의 상태인데, 이것은 게르만의 옛 이야기에 나오는 베르제르커Berserker(북구 신화, 곰의 껍질을 쓰고 싸우는 광폭한 전사-)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크든 작든 온전한 황홀상태이며, 여기에는 무서운 파괴적인 사회적 영향이 동반되는 경우가 흔하다. 심지어 전혀 이상하지 않은 평범한 정동Emotion으로도 현저한 의식상실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원시인들은 특별히 정선된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이다. 즉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거나 무기를 꺼내 놓거나, 기어가거나, 머리를 숙이거나 상대방에게 손바닥을 내보인다. ...

 원시인들의 생활은 언제나 어딘가에 숨어서 빈틈을 노리고 있는 정신적 위험의 가능성에 관한 끊임없는 배려로 가득 차 있고, 그 위험을 완화시키려는 시도는 수없이 많다. 금기 구역의 설정은 이 사실의 외부적 표현이다. 수없이 많은 금기는 구획지어진 여러 정신적 영역으로, 이 영역들은 극도로 정밀하게 주의해야 한다.


p.41-42-

 나는 그에게 자신의 강박관념을 병적인 바보짓이라고 욕하지 말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다.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말은 강박관념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정신 속에서 하나의 장해가 암처럼 증식하는 형태로 생겼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종의 진단적 정보로 인정하라는 말이 될 것이다.

 꿈이 마치 지성적이고 목적지향적이며, 이를테면 인격적인 근원에서 나오는 것처럼 파악할 것... 그것은 물론 대담한 가설인 동시에 모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로서 신뢰성이 매우 적은 실체에 대하여 비상한 신뢰를 주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것은 신경증만큼 위험하다. 그러나 신경증을 치료하려면 무언가 모험을 하는 수밖에 없다. 모험없이 하는 일은 전혀 효력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p.53-54-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세계관 가운데에서 스스로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게끔 도울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그는 찾지 못했다.


p.69-

 신경증을 앓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가 자신의 경험에 불성실해지려 하거나 목소리를 부인하려 할 때면 그때마다 신경증이 즉시 되살아났다. 그는 “그 불을 끌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그의 경험에 이해할 수 없는 누미노제적인 성격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꺼질 수 없는 불은 ‘거룩한’ 것이었다고 그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곧 그의 병의 치유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조건이었다.


p.70-

 종파에는 직접적인 경험을 굳건하게 형성된 도그마와 의식Ritual이라는 형태를 취한 적절하게 선정된 상징들로 대치하려는 명백한 목적이 있다. 가톨릭교회는 그 상징의 의미를 곧바로 교회의 절대 권위를 통하여 획득하며,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복음서에 대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얻는다. 이 양대 원리가 효력을 갖고 있는 동안은, 인간은 직접적인 종교적 경험에 대해 성공적으로 방어되어 있다. 물론 만약 그럼에도 그들에게 어떤 직접적인 것이 닥쳐온다면 이들은 심지어 교회에 호소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 경험이 신으로부터 왔는지 마귀로부터 왔는지,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할지, 또는 거절할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라는 직업을 수행해 오면서 나는 그런 직접적인 경험을 한 일이 있으면서도 교회적 결정의 권위에 순종하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던 몇몇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이들이 정신적 위기와 격렬한 갈등을 거치면서, 또한 망상에 대한 불안, 기괴하고도 무시무시한 절망적인 혼란과 우울을 거치는 동안 줄곧 이들과 함께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도그마와 의례가 최소한 정신위생의 방법으로서 특히 중요하다는 것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p.75- 39-

 게르만인은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신과 인간 사이를 중개하는 교회를 제거하였다. 보호벽을 무너뜨린 결과 개신교는 중요한 무의식적 요소들의 표현인 성상들과 아득한 시간 이래로 예측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력들을 극복하는 확실한 길이 되어온 의식Ritual을 함께 상실하였다. 커다란 에너지 값이 그렇게 해방되었고, 이것은 즉시 호기심과 정복벽의 옛 도관으로 흘러듦으로써 유럽은 악룡들의 어머니가 되어 지구의 대부분을 집어삼켰다.

 교회에 의해 세심하게 세워진 담을 허물어버린 개신교는 곧바로 개인적인 계시가 지닌, 분해하며 분열시키는 작용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도그마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제의가 영향력 있는 권위를 잃어버리자마자 인간은 도그마와 제의의 보호와 인도 없이 내적인 경험 앞에 직접 마주서게 되었다. 제의와 도그마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교의 종교적 경험의 비길 데 없는 정수다. 개신교는 주로 전통적 기독교의 모든 섬세한 다채로움, 즉 미사, 고백, 의례의 대부분, 그리고 신의 대리자로서의 사제의 중요성 등을 잃어버렸다.


p.118-

 현대 문명은 인간의 삶이 왜 보다 높은 의미에서 하나의 희생이어야 하는지를 이제는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것은 현대 문명이 직면한 긴급한, 그러나 또한 위험하고도 윤리적으로 까다로운 문제다. 인간은 만약 어떤 것이 그에게 의미있는 것이라면 놀랄 만한 일들을 스스로 짊어질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당연히 하나의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지만 인간이 발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들도 그의 개인적 욕구와 불안에 대항하면서까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실행하기에는 모두 너무 천편일률적이고 너무 안이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p.157-

 나는 오직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적인 경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오직 -비관적으로 말해서- 마귀와 악마의 두목, 벨제붑Beelzebub 사이에서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 마귀는 만다라나 어떤 그와 비등한 것이고 벨제붑은 그들의 신경증이다. 호의적인 합리주의자는 내가 마귀를 가지고 벨제붑을 내쫓고 내가 온전한 신경증을 종교적 신앙의 속임수로 대치한다고 말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고 경험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종교적 경험은 절대적이다. 그에 관해서 우리는 논쟁할 수 없다. 사람들은 그저 그런 경험을 가진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상대방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이로써 토론은 끝날 것이다. 세상이 종교적 경험에 대하여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상관이 없다; 그것을 가진 사람은 그에게 삶의 원천이 되고 의미와 아름다움이 된, 그리고 세계와 인류에게 하나의 새로운 광명을 가져다 준 위대한 보배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피스티스Pistis(믿음과 신뢰), 그리고 평화를 가지고 있다. 그런 삶이 온당치 않다고, 그런 경험이 타당하지 않으며, 그런 믿음과 신뢰Pistis는 단지 착각일 뿐이라고 말하도록 허용한 기준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어떤 사람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진리보다 인간의 궁극적인 일에 관한 더 나은 진리가 정말 있겠는가? 내가 무의식에서 창조된 상징들을 주의 깊게 고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들은 현대인의 비판적 정신을 설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들은 압도적이라는 매우 유행에 뒤떨어진 이유 때문에, 그 상징들은 주관적으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신경증을 치유하는 것은 신경증만큼 확신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신경증이 너무도 생생한 현실인 까닭에 도움을 주는 경험 또한 그와 똑같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 현실이어야 할 것이다. 비관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대단히 현실적인 착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착각과 치유적인 종교적 경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말의 차이일 뿐이다. ...아무도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경험이 인생을 보다 건강하게, 보다 아름답게, 보다 온전하게, 또는 보다 의미 있게 그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형성해 가도록 돕는다면 사람들은 여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혜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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