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투데이 - 김충렬 박사의 치유상담 - 칼 융의 분석심리학과 상담치료. http://www.christiantoday.co.kr/sections/oc_13



(14) ‘직관’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감정’과의 차이점은 中 발췌.


 직관은 감각이나 경험, 연상이나 추리 등의 사유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정신작용이다. 직관은 다른 원천에 의해 얻지 못하는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근원적이고 독자적인 인식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직관은 일반적으로 뚫어보는 능력이라고 한다. 이런 직관은 우리가 남의 꿈을 잘 꾼다거나 지식의 근거를 갖지 않고도 잘 알아맞히는 것을 두고 말한다. 이런 직관은 ‘본능적인’ 파악능력이다.

 직관(直觀, intuition)이란 무의식적인 방법으로 인식을 유도하는 심리기능이다. 직관은 주로 무의식적 과정이기 때문에, 그것의 본질을 의식에서 파악하기 매우 어렵다. 의식에서 직관 기능은 예상하는 태도, 관조하고 조망하는 것으로 나타는데, 언제나 그 결과를 보아야지만 얼마나 많은 것을 들여다보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이 정말 객체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직관은 감각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때로 제 육감각(六感覺) 또는 초감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각의 단계처럼 오감각(五感覺)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느껴지는 특성이 직관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직관은 감각과 곧잘 혼동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외향성의 경우에는 감각과 직관은 둘 다 객체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에 직관이 감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경우의 감각은 분명히 직관적인 관조를 방해하여 사람의 시선을 객체의 물리적 표면으로 향하게 하지만, 직관은 바로 그것을 지나 그 뒷면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직관의 기능이 이상을 일으키면 무의식의 내용과 강하게 혼용되기도 한다. 특히 집단무의식의 내용과 강하게 혼용되거나 이에 따라 제약된다. 그렇게 되면 직관형은 극도로 비합리적이어서 이해하기 곤란해지기도 한다.



(18) 칼 융이 말하는,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의 차이 中 발췌.


 개인무의식은 어떤 이유에서든 잊어버린 것, 현실세계의 도덕관이나 가치관 때문에 현실에서 억압된 것들이다. 개인무의식은 또한 성적인 것들도 포함되면서 그 밖의 모든 심리적 경향, 희구, 생각들, 고의로 눌러버린 괴로운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의식에 도달하기에는 그 자극의 강도가 약한 것들이 모두 포함한다. 개인무의식은 무의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억압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개인무의식은 무의식이라는 특성에서는 억압된 내용 뿐 아니라, 의식의 문턱의 값이라는 식역치(識閾値)에 이르지 못한 모든 심리적 소재가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소재가 문턱의 값 아래에 있는 것은 억압의 원리로만 설명하는 게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무의식이 반드시 억압되어 있다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의식에는 억압된 소재 외에도 의식에 오르지 않은 감관 지각을 포함한 의식의 문턱 아래에 들어 있게 된 모든 정신적인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의식화될 내용의 싹들이다. 다만 이 모든 무의식의 내용이 그것이 개별적인 존재가 획득한 것들이라면 개인적인 성질의 것, 즉 개인무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32)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칼 융의 원형적 해석 中 발췌.


 원형에서는 인간의 뇌와 정신의 구조 간에 비교가능성이 가능할지 모른다.



(34) ‘아니마’의 긍정적 측면, 섬세함과 예술성 中 발췌.


 아니마는 내적 인격으로서 무의식과의 관계에서 작용하면서 의식과 무의식의 연결기능도 갖는다. 아니마는 깊은 무의식에 작용하여 진정한 자기와의 관계와 조화를 이루어 인격의 원만성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것과 관련하여 아니마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인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마력을 가졌다는 점에서다. 아니마의 사랑의 특성이 내면의 원형적 인격을 만나는 것이라면, 이는 인격의 조화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특성은 반드시 무의식으로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의 연결성도 내포하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연결성에서는 육체와 지혜라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융이 아니마 개념을 설명하기 위하여 즐겨 인용하는 소설은 라이더 해거드의 《그녀》(She)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의 ‘그녀’는 아주 아름다운 여자일 뿐 아니라, 불사(不死)의 여사제(女司祭)이기도 하다. 그녀는 고대의 지식을 많이 알고 있고 감추어진 교리도 잘 파악하고 있다. 어떤 남자가 정서와 본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면, 여자는 그 남자에게 성적 매력을 발휘하여 그에게 '육체의 지혜'를 가르쳐 주어 인간의 품으로 그를 돌려놓는다. 이런 경우에 때로는 아니마는 무의식의 화신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 여자는 그에게 초월적인, 아주 오래된 지혜를 갖춘 사람으로 보인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황야의 이리》(Der Steppenwolf)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외된 남자의 원형인데, 그의 소외상태를 불쌍히 여긴 한 평범한 젊은 여자가 그를 유혹하여 환상적으로 심리의 발전을 도와준다. 그렇게 하여 그는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중적인 특성은 육체와 정신의 연결성에서 이해되기 쉬운데, 성적인 경험은 반드시 성적이라고 볼 수 없는 느낌과 정서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 줄 수’ 있다. 사랑에 빠져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성적인 경험도 결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해라는 전반적인 차원도 결여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적인 것을 경험함으로써 ‘열정’과 정서적인 가치를 알게 된다. 성적인 관계는 ‘인생의 의미’ 그 자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44) 인간 영혼이 갖는 신비한 특성, 심리학 용어 해석만으로 부족 中 발췌.


 ...분석가는 정신문제에 대한 임상진단 외에 심리학적 진단을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임상진단은 오랜 의학적인 체계에 따라 서구에서는 대체로 라틴어로 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개인 인간의 특성을 진단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일수만은 없다. 개인의 심리특성이란 어떤 틀에 의해서, 그리고 수학공식처럼 진행될 수 없고, 진정한 진단은 개인의 여건과 상황 등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융은 이러한 진단에 대해 오히려 일반적인 용어가 더 효과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어떤 환자에 대하여 공포장애, 강박장애로 표시하기보다는 ‘어머니의 귀염둥이’라고 하는 방식의 표현이다.

 ...융은 “심리학적 진단은 콤플렉스 진단”임을 말한다.



(48)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 中 발췌. (뭔뜻인진 대충 알겠는데, 나중에 윤문이 필요할 것 같다.-_-)


 인간의 정신에서 의식과 무의식, 또는 무의식과 의식은 균형적인 상태가 되어야 한다. 양자간의 심각한 불균형은 정신병을 초래한다는 점에서다. 어떤 사람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지나친 환상에 빠져 있다면, 이는 정신의 두 요소인 의식과 무의식이 불균형을 초래한 결과이다. 사람에게 때로 환상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지나칠 때 의식을 압도하여 정신의 문제를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환상에 빠져 있다면, 그 환상적인 체험의 결과는 점진적인 변형과 자율적 콤플렉스의 해소를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변형은 바로 무의식과 대결하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만약 변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의식은 어떤 축소되지 않는 조건적 작용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둘 중의 하나인데, 어떤 경우에서는 우리의 모든 분석과 이해에도 불구하고 노이로제 증상을 유지하게 되거나, 노이로제와 같이 힘든 강압적 전이(轉移, Uebertragung)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서는 암시, 선한 의지 그리고 단순히 축소적인 이해가 무의식의 힘이 파괴되는 것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분석자가 무의식에 몰두할 때에 특이한 무의식과의 대결을 결심해야만 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물론 무의식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서는 분석자가 무의식을 해석할 수 있기 위하여 이미 사전에 무의식에 관하여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즉 무의식과의 대결의 경우에서는 무의식의 해석보다는 다른 어떤 것이 중요하다. 즉 환상의 형태에서 의식에 나타나는 무의식적 과정의 분리가 중요한 것이다.



(50) 우리가 나약해질 때, 의지하고 기대고 싶은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희망 中 발췌. (뜻 긴가민가한 것만 내맘대로 쪼끔쪼끔씩 덧붙이기...)


 ...‘마나-인격’의 면모는 반드시 고매한 인격적 특성만이 아니라, 동물이나 야수 심지어는 악마적인 면모까지 가진다. ...

 ...아니마는 이 (분화. 극복)과정으로 자율적 콤플렉스라는 악마적인 힘(a.k.a. 마나...)을 상실하게 된다. 아니마는 쇠약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사로잡음’을 실행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아니마는 ...‘여주인-심혼’이 아니라, 우리가 원시인과 대화할 수 있는 직관적 본성의 심리‘기능’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라이더 해가르드(Rider Haggard)의 ‘순종해야만 하는 그녀’(She-who-must-be-obeyed)의 표식이라는 인격의 마술력을 상기하는 것이다. ‘그녀’(She)는 마나-인격(Mana-Persoenlichkeit), 즉 불가사의한 인식과 힘으로 무장된 완전히 심령적, 마술적 특성의 존재(마나)이다. 물론 이 모든 속성은 무의식적 자기인식의 순수한 투사에 기인하고 있다.

 그 무의식적 자기인식이란 덜 시적인 표현으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나는 나의 의식적 의지를 교묘한 방법으로 회피할 수 있는 정신적 요인이 내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정신요인은 내 머리에 탁월한 생각으로 자리할 수 있으며, 나에게 바라지 않으며 환영하지 않을 기분과 정서를 유발시킬 수 있고,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고, 타인과의 나의 관계를 잘못된 방법으로 방해할 수 있다. 분석자는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무력감을 느끼고 있으며,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그것을 좋아한 나머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융은 여기에서 시인은 이것을 때로 예술적 기질이라 부르고, 시인이 아닌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기대한다고 말한다.

 ...마나-인격의 획득이나 소유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아니마를 숙달하여 마나를 획득한 사람은 마나-인물을 죽이는 사람이 그녀의 마나에 한 몸이 되고 있다는 원시적 관념에 동의한다. ...분석자는 분명히 이를 알고 있고, 또한 그러기에 마나를 수용하면서 의식적으로 마나-인격이 되어간다. ...이 심혼의 위험은 미묘한 성격이며, 이 위험은 의식의 팽창을 통하여 아니마와의 대결로 획득한 모든 것을 소멸시킬 수 있다.

 ...마나, 즉 아니마의 자율적 가치를 그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마술사(Zauber)의 모습... 분석자 자신은 아니마의 마나를 소유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자기팽창(Inflation)의 문제... 만약 그것이 참으로 아니마를 극복한 자아였다고 한다면 마나 역시 자아에 속해 있으며, 그 결과는 의미 있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마나가 (자아에 속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하여 작용하고 있지는 있는가? 이 질문은 틀림없이 자아와 아니마의 관계에서는 근본적인 시금석일지도 모른다! (그러할 때) 자아는 그렇게 의미있게 된 상태가 아니라, 단순히 다른 무의식적 모습에 떨어진 원형(‘마술사’, 마나-인격)과의 혼합이 되었기 때문에 작용하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아니마도 전혀 극복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마나도 획득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단순히 더 큰 힘의 동일한 성(性)의 모습이 부친형상(Vaterimago)과 일치하는, 심지어는 더 큰 힘을 소유하는 새로운 혼합이 나타난 것이다.

 ...애석하게도 자아는 자기인식의 기능을 소유할 때만, 후퇴가 가능하고, 모든 힘과 의미의 환상이 가장 신속하게 와해될 수 있다. (자아팽창-오만으로 자기인식의 기능이 손상되었다면. 이는 자아가 마나를 가진 상태가 아니다. 라는 얘기인 것 같다) 이는 실로 자아의 제한된 특성이자 어떤 기만의 상태이다. 다시 말하면 자아가 아니마를 극복하지 못했기에 아니마의 마나를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즉 의식은 무의식에 관한 주인이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니마는 자기의 주인적인 월권으로 자아에게 무의식과 대결이 가능할 정도로 손상을 입힌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 대결의 목적은 무의식에 대한 의식의 승리가 아니라, 두 세계의 균형을 이루는 재건이었다. ...그러기에, 만약 자아가 (무의식에 대한?) 어떤 승리에 대한 스스로의 요청이 무산되게 내버려둔다면, 자동적으로 마술사로 인한 사로잡힘도 중단될 것이다. ...때문에 분석자는 (그) 이상의 전반적인 문제에 관하여 소박한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신속한 개관으로 모든 단계를 (신속하게 도달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51) 평범 뛰어넘은 위대한 인격과 신적 체험 희구하는 인간 中 발췌.


 ...자아가 외관상 아니마에 속한 힘을 스스로 끌어당기는 한에서는 자아는 직접적으로 마나-인격이 된다. 이러한 발전은 거의 규칙적인 현상이다. ...

 ...원형으로 인한 사로잡힘(Besessenheit)은 단순한 집단적 모습, 일종의 가면에 이르는 사람을 만든다.



 (...아니마와의 동일시를 극복하고 분화시켜야 하듯, ‘마나-인격’ 또한 자아와 동일시될 것이 아니라 극복되고 분화되어야 한다는 얘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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