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Kerr, M. Bowen - 보웬의 가족치료이론 中 p.185-199 발췌.


-탈삼각관계-


 탈삼각관계 과정은 개인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삼각관계에 끌려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을 삼각관계에 끌어들이는 모호하면서도 보다 분명한 방법들을 인식하는 것에 달려 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의 아버지가 “고모와 나는 사이가 좋지 않아. 그러니 아들, 너도 고모와 친하게 지내서는 안 돼“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삼각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쉽게 인지할 수 있다. 삼각관계가 항상 이렇게 명백하다면, 관계는 비교적 이해하기 쉽고 다루기도 쉬워질 것이다. 더욱 미묘한 삼각관계의 메시지는 얼굴표정, 목소리 톤, 자세의 변화, 그리고 다른 비언어적 신호들로 전달된다.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중요하지만, 어떤 목소리 톤으로 말할 때는 삼각관계를 활성화시킬 수 있고, 다른 목소리 톤으로 말할 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탈삼각관계는 가족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기법이다. 그러나 만약에 탈삼각관계가 하나의 기법으로서 쉽게 학습된다면, 탈삼각관계 책략은 그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한다. 탈삼각관계의 말이나 행동의 결과는, 치료자와 같은 사람이 가르쳐주는 기법보다는 오히려 한 개인이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더욱 예측가능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행동의 체계적 개념화를 나타낸다. 문제의 원인을 어떤 사람이나 사건에 귀인하는 것보다는, 사람과 사건을 연결시킨 정서과정이 중심이 된다. 체계나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인과론적 사고에 의해 촉진되는 것보다 인간행동과 임상적 역기능에 대한 정서적 중립태도로 더욱 증진된다. 타인들과의 관계과정에서 정서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가능해질수록, 탈삼각관계 훈련은 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다.

 정서적 중립성은 인간행동의 특수한 측면을 증명 혹은 증명하지 않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또한 스스로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판단을 능가하지 못하는 규칙을 만드는 것과도 관련이 없다. 규칙 고수는 보통 실제 경우보다 더 중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중립성은 쓸모없는 잡담이나 기회를 엿보는 변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가족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과 관련하여 매우 분명한 지위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정서적으로 중립적일 수 있다. 독단적인 지위, 중요한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지 모르는 무능력함, 그리고 다른 이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 모두는 정서적 중립성의 부재를 어기는 것이다. 요컨대 중립성이란 누군가의 관점 혹은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변화시키려는 데 정서적 투자 없이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만약 한 개인이 정서적으로 가장 연결되어 있는 삼각관계 속에서 더 많은 중립성이나 이탈을 달성할 수 있고 그러한 중립성에 기초해서 행동할 수 있다면, 삼각관계 내의 다른 두 구성원들 간의 긴장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정서적 중립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 두 가지가 특히 삼각관계와 관련있다. 첫째, 다른 두 사람들 간의 관계과정에서 양측면을 볼 수 있는 능력. 둘째,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개념으로 오염된 그 과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예를 들어, 어머니와 정신분열증 아들 간의 강한 공생관계에서 두 사람이 담당하는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처럼 ‘아픈’, ‘비정상적인’, ‘나쁜’, 혹은 ‘애처로운’ 등으로 정의되는 감정과 태도 없이 그러한 관계와 접촉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 인간이 가진 여러 측면을 허용하지 않는 편협함은 삼각관계를 명시하는 것이다.

 행동에 대한 판단 보류와 관련된 규칙을 만드는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 간의 관계문제에서 한쪽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만드는 것은 문제의 양쪽을 진정으로 고려해보는 것이 아니다. 관계문제의 양쪽 편을 따져보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야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 사람이 ‘희생자’이고 다른 사람은 ‘가해자’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종종 한 사람이 ‘아프고’ 다른 사람은 어려운 상황을 악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약물을 복용하고 행동화를 하는 십대 자녀가 가족문제의 주 원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삼각관계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내재적인 정서과정에 대한 증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즉, 개별성과 연합성의 상호작용과, 그러한 상호작용에서 불안의 영향을 이해하여야 한다. 삼각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체계에 대한 감정반응의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 또한 파악하여야 한다.

 효과적인 탈삼각관계는 정서적 중립성에 대한 사고 혹은 태도의 방식을 습득하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러한 태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서도 정해진다. 한 개인이 삼각관계에서 중립적인 지위를 고수하려는 지침원리는, 그가 문제를 가진 어떤 사람과 함께 해나갈 수 있는 것들을 말하거나 행함으로써 삼각관계를 만들려는 어떤 사람의 노력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원칙이지만, 이행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실제로 탈삼각관계를 배울 수 없다. 그 과정에 대해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 것이 관계로부터 성공적으로 탈삼각관계되도록 학습하는 것은 아니다. 책과 강좌가 사람들에게 삼각관계와 탈삼각관계의 기법을 알려줄 수 있을지라도, 사고방식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새로운 사고방식은 천천히 습득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가르친다. 인간의 처리과정과 관련된 체계를 사고하는 데 소모되는 시간과 경험은 사람들이 사고하는 체계가 그러한 과정을 보는 유용한 관점인지 아닌지를 결정가능하게 해준다. 분화와 탈삼각관계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행동에 대한 더 많은 정보가, 인과모델보다 체계모델과 더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는, 불균형 상태에 있는 이자를 함께 있도록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중요한 삼각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감정반응은, 한 사람에게는 동정, 다른 사람에게는 분노와(혹은) 좌절, 그리고 두 사람이 그들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정서적 혹은 물리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 낫다는 믿음이다. 사람들이 떨어져 있도록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일반적인지를 가정한다면, 이자 간에 보다 깊은 관여를 통해서 삼각관계에서 보다 더 벗어나도록 하는 원칙이 ‘이치’에 맞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와 정신분열증 아들에 대한 일반적인 정서에 기초한 반응은, 그들을 분리시키는-어머니로부터 아들을 ‘독립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들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중립적인 태도로 “나는 항상 당신들의 관계를 부러워했고 당신들이 많은 시간을 떨어져서 보냈다니 너무도 당황스럽습니다”와 같은 말로 이러한 중립적인 태도를 전달하는 것은 보통 ‘정서적 기질’에 반대되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은 어머니와 아들 간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중립성을 전달하는 것이다.

 격렬한 부모와 자녀관계에 대해 다르게 그리고 납득할 수 있게 반응하는 것은 인간이 정신분열증적 수준의 문제를 만들어내는 과정의 성질에 대해 사고하는 데 있어서 어떤 중요한 변화를 경험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사람이 정신분열증 환자가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면 그 사람은 그 과정에서 중립적일 수 없다. 중립의 가능성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가족원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죄의식과 같은 반응에 의해 침식당한다. 부모, 결함이 있는 유전자 혹은 가족 외부의 어떤 힘에 대해 ‘질병’의 책임을 돌리거나, 문제에 대한 답을 찾거나 상황을 개선하는 데 책임을 느끼거나, 정서적·물리적으로 가족으로부터 벗어나서 보낸 경험 때문에 지나치게 정서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런 반응들 모두는 한 개인이 그 상황에서 삼각관계되는 방식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는 삼각관계과정에 빠지는 데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고 가족은 그를 그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담당했다.

 체계사고는 인간으로 하여금 비난, 편들기, 죄의식, 분노,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감정들과 인간문제의 본질에 대한 사회적 태도에 의해 강화되고 가족정서체계의 분위기로 통합되는 다른 감정들과 주관적 태도를 넘어설 수 있는 가족 내 정서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다. 정서적 접촉을 하면서 그 과정에 대한 체계적 견해를 보유하는 능력은 자신의 행동을 안내하는 자동적 감정반응과 주관적으로 결정된 태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사고가 강조되고 있는 삼각관계의 문제로부터 충분히 ‘객관적일 때’(감정반응에 의해 편향되지 않을 때)-하나의 삼각관계는 다른 것들로부터 동떨어져서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그리고 그 과정에 대한 꽤 정확한 그림이 그려졌을 때, 그 다음 과제는 개인의 지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각주 1) 이러한 의사소통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정서적 기질에 대응하는 말이나 행동이 포함된다. 정서적 기질에 반대될 때, 두 사람 간의 문제에 대한 관계 내 인간의 정서적 자동성은 의사소통된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반응이 자동적으로 예기된 것이 아닐 때 그것을 즉각적으로 알아챈다. 사람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를 정의할 수 있다. 자기를 정의하는 것이 반드시 특수한 문제에 대하여 자신이 견지하는 입장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자기는 종종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삼각관계가 발생할 수 있는 방식에는 너무나 많은 변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탈삼각관계를 위한 진술이나 행동을 나타내는 예들은 편협한 가능성만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예들은 그들이 기술하는 원칙들보다는 덜 중요하다. 만약 아버지가 딸에게 “네 엄마는 내가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정서적 지지를 필요로 했는지 결단코 몰라”라고 말한다면, 이는 정서적으로 개입된 부부문제에 딸을 삼각관계로 끌어들이려는 꽤 분명한 시도다. 아버지는 단지 자신의 고통에 대해 동정해주는 사람을 찾거나, 딸이 부인을 좀 더 ‘이해심 많고’, ‘지지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딸은 과거에 일상적으로 그러한 행동을 했을 수도 있다.

 탈삼각관계하려고 애쓰는 딸은, “만약 엄마가 아빠가 원하는 모든 지지를 해주었다면, 아버지에게 요구할 수 있는 엄마의 기대는 높아졌을 거에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 말(진실이든 아니든 간에)은 부모 중 어느 쪽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부부 사이의 문제를 다룬다. 만약 딸이 아버지를 안됐다고 생각하고 ‘이해심’이 부족했던 어머니에게 화를 낸다면, 그 감정의 톤은 딸의 말에서 명백하게 나타날 것이고 딸은 중립성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그녀는 계속해서 삼각관계에 끌려들 것이다. 만약 딸이 중립성을 지킨다면, 그녀는 단순히 “아빠, 저는 아빠가 엄마에 대해서 불평하는 걸 몇 년 동안이나 들어왔어요. 그래서 전 결국 아빠가 옳다고 믿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자기의 손을 아버지의 팔에 대고 사실은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님을 아버지가 알도록 미소짓는다. 다른 가능성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 다음에 딸은 엄마를 보고, “아빠와 제가 엄마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아빠는 엄마가 결국 아빠가 원하는 타입의 부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엄마, 제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아세요?”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말에 수반되는 목소리 톤과 얼굴 표정 또한, 한 개인이 삼각관계 안에 혹은 밖에서 전달하는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사람은 목소리 톤과 얼굴 표정으로 그 심각성을 얘기할 수 있다. 몇 분이 지나서, 엄마가 아내와 엄마의 적절한 역할 사이에서 갈등할 때, 딸은 엷은 미소를 짓는다. 그 순간, 엄마는 딸이 정서적으로 새로운 지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엄마는 딸이 부모의 결혼문제를 접하고 있지만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딸이 그들의 일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모든 탈삼각관계의 노력은 쉽게 진행되지 않는다. 정서상황이 강렬할수록, 한 개인의 사고가 중립적이고 이성적인 통제하에서 반응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중립적이지 않은 불안한 사람이 매우 불안한 가족의 삼각관계에서 스스로 벗어나려고 할 때, 그가 가족문제를 더욱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사람들이 불안할 때, 탈삼각관계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보통 삼각관계를 떠나서 자신을 ‘알아내려는’ 시도다. (ㅠㅠ) 그러한 시도는 ‘나는 너희 두 사람의 문제와 상관없어!’와 같은 시끄러운 외침 속에서 드러난다. 이는 어떤 개인이 다른 사람의 희생을 담보로 일종의 편안함을 시도하거나 혹은 이룩하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탈삼각관계는 낮거나 적당한 수준의 불안상태에서 가장 효과적이다. 높은 정서적 불안상태에서, 사람들은 지나치게 초조해 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삼각관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가족 역시 지나치게 긴장해 있기 때문에 그것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다. 불안이 높다면 목표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지 불안이 행동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불안이 감소되면, 그때 탈삼각관계하려는 언어적 표현들은 건설적이 될 수 있다.

 탈삼각관계하려는 말이나 행동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만약 당신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당신은 나와 적이 되는 거야’와 같다. 사람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은, 누군가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반대하는 행동을 방어하거나 설명하려 드는 것이다. 이러한 방어적이고 설명적인 말들은 한 개인을 삼각관계로 다시 빠져들게 한다. (ㅠㅠ...) 그러나 이것은 기술의 실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가 배운 탈삼각관계 기법을 사용했다가 기대한 반응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보통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다. 특히 삼각관계과정은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는 기대하지 않은 결과에 당황한다. 그는 그 점에서 중립적이라고 선언할 수 있으나, 그것은 분명한 허구다.

 상당히 중립적인 한 개인의 탈삼각관계적인 말들은 중립적이지 않은 사람의 말보다 ‘불성실한’ 혹은 비판적인, 비꼬는 것으로 덜 지각된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매우 관여된 문제로부터 탈삼각관계하려고 할 때, 이성적으로 중립적인 사람이라도 ‘불성실’하고 ‘무정하고’, ‘부주의한’ 사람으로 비난받을 수 있다. (ㅠㅠ...) 사람들은 그들이 다시 결코 말을 걸어오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의사와 무관하게 비꼬게’ 될 것이고, 혹은 그들의 배신이 어떤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비난은 탈삼각관계하려는 개인이 어떤 정서적 분리를 획득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며 그를 삼각관계의 이전 연합성 수준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다. (각주 2) 만약 탈삼각관계하려는 개인이 확실히 분리된다면, 그러한 비난에 꼭 반응할 필요는 없다. 그의 중립성은 많은 비언어적 방식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그것은 자동적으로 어떤 비난할 힘도 없어진다.

 탈삼각관계하려는 노력은 말보다는 행동이 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개인은 가족들에게 자신이 고유한 권리를 가진 가족원임을 인정받기 위해 많은 세월을 보냈지만 얻는 것은 거의 없을 수도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의 견해가 가족들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반복적으로 말한다 해도, 그에 대한 가족들의 근본적인 지각에는 큰 변화를 주지 않는다. 분리되고 구별되는 ‘자기’가 되려는 개인의 선언을 무시하거나 중립시키려는 가족의 힘에서 벗어나는 것은, 개인이 가족 내 상호 맞물린 삼각관계의 특성에 대해서 배우고 그러한 지식에 근거하여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행동이 가족에게 무시될 수 없거나 설명될 수 없는 자기를 정의할 수 있다.

 탈삼각관계 행동의 효과는 주로 상호 맞물린 삼각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 달려 있다. 이것은 간단한 임상적 예로 설명될 수 있다.

 가족 도식에서 A는 가족 내에서 하나 이상의 자기를 정의하고자 한다. 그녀의 어머니 C는 생존해 있고 아버지 B는 돌아가셨다. 조부모 D와 E, 고모 G와 고모부 F 또한 돌아가셨다. 그녀의 아버지의 직계 가족의 유일한 생존자는 사촌 H이다. 그녀의 어머지 C에게는 도식에 나타나 있지 않은 생존 가족들이 있다. 왜냐면 모계의 세부적인 요소들은 이러한 특정 탈삼각관계의 예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A 또한 도식에 나타나 있지 않은 형제가 있다.

 A가 자라는 동안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삼각관계는 그녀의 부모와 그녀로 구성된다. A는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더 정서적으로 몰입되었다. A와 그녀의 어머니는 안락한 내부자였고 아버지는 방관자적 지위에 있었다. 삼각관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부모는 서로에 대한 불만족으로 야기된 긴장을 감소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정서적 거리를 ‘이용했다.’ 어머니는 딸에게 정서적으로 과도하게 관여했다. (모녀관계는 결혼생활보다도 어머니에게 더 많은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러한 과도한 관여가 발생하고, 유지되도록 묵인했다. 아버지는 그의 부모와 누나가 살아 있었을 때도 가족으로부터 정서적으로 단절되어 있었다. 이러한 단절은 아버지가 가족 안에서 야기한 가족문제의 소산이고, A의 어머니가 시댁에 대해 가진 매우 부정적인 태도의 결과다. A의 어머니는 남편이 성장해서 자신과 결혼한 후에도 남편에게 사랑받거나 지지받지 못했다고 그들의 관계를 회고했다.

 A는 그녀의 친가 친척들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에 연합했다. 그리고 그 태도는 아버지를 그의 가족들에게서 더 멀어지도록 강화시켰다. A는 조부모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고모와 삼촌 등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그녀는 사촌과 단지 한 번 만났었고, 그 만남은 A와 H가 십대였던 20년 전의 일이었다. 반대로, A는 자라면서 그리고 성인이 되어도 외가 친척들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A의 어머니와의 정서적 과잉몰입은 그녀가 어머니로부터 달성하여야 할 정서적 분리의 정도를 제한했다. 이런 해결되지 않은 애착은 A의 결혼과 A가 낳은 자식들과의 관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런 해결되지 않은 애착이 영향을 미치자, A는 어머니로부터의 정서적 분리를 더욱 원하게 됐다. 부모로부터 더 많은 정서적 분리를 달성하려는 기본 과제는 그 부모와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삼각관계에서 탈삼각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삼각관계는 A와 그녀의 부모다. A와 그녀의 형제 그리고 어머니, 혹은 A와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 간의 삼각관계와 같은 다른 예도 있을 수 있다. 누구도 어떤 삼각관계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한다. 그러나 아주 작은 변화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개인의 기본 분화수준을 높이는 결과가 될 수 있다.

 A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이 부모와의 삼각관계로부터 빠져나오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요구된 것은 A가 부모의 사촌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친척과 정서적으로 접촉함으로써 A는 부모와의 원래 삼각관계를 활성화시킨다. 그녀는 원래 삼각관계를 아버지의 가족 중에서 정서영역을 담당하는 특정인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활성화시킨 것이다. 정서는 개별 인간들의 죽음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 맞물린 삼각관계를 통해 세대 간 전수된다. 가족은 A가 사촌과 접촉하는 것에 대해서 아버지와 접촉하는 것처럼 반응할 것이다. 이것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으나,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가족의 정서문제는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 멈출 수 있지만, 반면에 더 중요한 문제가 이런 식으로 재활성화될 수 있다.

 사촌과 접촉을 하면서, A는 부모와의 원래 삼각관계를 활성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중요한 행보를 내딛게 된다. A가 친가쪽 친척들과 접촉할수록 어머니와의 관계는 혼란스러워진다. “그런 사람들은 만날 필요 없어” 혹은 “사촌을 계속 만난다면, 난 널 다신 보지 않을 거야”와 같은 어머니의 말은 혼란의 증거일 수 있다. 물론, 그 말들은 그것이 파괴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친밀감에 혼란을 겪는 더 큰 증거는 어머니로부터 거부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어머니의 지지와 인정을 받을 것에 대한 확신이 없이 살아가는 데 대한 불안과 같은 A의 반응일 수 있다. A가 삼각관계의 지식에 기초한 사려 깊은 행동과정을 통해, 자신과 어머니의 이러한 감정반응에 동요되지 않는다면, 그때 그녀는 분화하려는 더 큰 가능성에 따라 기능하게 된다. 행동으로, 또한 그녀는 가족에게 자신의 증가한 수준을 정의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사촌을 만나고자 하는 A의 동기가 어머니에 대한 배반에 기초한 것이라면, 사촌을 만나는 것이 비생산적인 가족분쟁을 조장시킬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사고방식의 변화보다는 기교적으로 상황을 바꾸려고 한 노력과 연관되어 가능한 문제에 대한 또 다른 좋은 예다. A가 가족에 대한 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사려 깊게 생각한다면, 그녀가 스스로 결정한 과정에 대한 반응에서 발생하는 나타나는 어떤 소란도 빨리 종식된다. A는 행동 속에서 하나 이상의 자기가 될 능력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사촌으로부터 친가에 대한 새로운 생각도 듣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가족과 관련된 ‘사고체계’ 능력(편견과 비난의 영향에서 벗어난)에 도움을 주고, 인간과정에 대해 보다 정서적으로 중립적일 수 있도록 해준다. 그녀의 노력은 또한 어머니가 과거를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가족원들이 싫어하지만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용기가 다른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고들을 자극하는가는 종종 놀라운 일이다.

 삼각관계와 탈삼각관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보다 삼각관계 활동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의사소통을 인식할 수 있느냐다. (!!!) 또 다른 간단한 임상적 예를 들어보자.

 부모와 네 명의 딸들로 구성된 핵가족이 있다. 아버지는 자녀가 모두 성장한 후에 돌아가셨다. 삼각관계과정의 반영은 막내딸 F가 바로 위의 언니 E에게 하는 말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왜 언니는 우리가 어렸을 때 나를 못살게 굴었어?” 그 말 속에 숨어 있는 비언어적 메세지들은 상당히 강한 정서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게다가, 그 말에 대한 E의 정서 반응에서 강한 분노와 죄책감은 그녀가 여전히 25년 전의 어린 시절에 강하게 몰입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E의 자동적 반응은 스스로를 방어하면서 여동생을 ‘어린애처럼 행동’한다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과거에 이러한 상호교류는 두 자매가 상당한 기간 동안 서로에게 말을 하지 않아서 어머니가 ‘그들의’ 갈등의 조정자로 나서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 연루된 삼각관계(모든 삼각관계가 다른 사람들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는 어머니 B와 두 자매 E, F로 이루어져 있다. 막내딸은 부모로부터 정서적 분리가 가장 잘 안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삶에 지나치게 관여되어 있었고 막내딸에 대한 다른 딸들의 태도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다른 언니들은 막내가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아왔는지에 대해 얘기하면서 종종 그녀를 비난했다. 어머니는 막내에 대한 언니들의 태도를 ‘형제간의 경쟁의식’으로 해석했고, 그러한 태도들을 바꾸려고 계속 노력했다. 어머니는 “언니들은 비열해”라고 말하면서 언니들로부터 받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 불평하는 막내딸의 편을 든다. 어머니는 딸들처럼, 그 과정 안으로 빠져들게 되고, 대부분 자신의 행동과 말로 그것을 더욱 강화시킨다.

 독립할 때 E의 태도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랑과 관심 모두를 전혀 받지 못했다는 식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박탈된’ 사람, ‘좋은 것’을 가진 다른 딸의 ‘희생자’로 생각했다. 놀랄 필요도 없이, E는 무기력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취약점을 지닌 채 집을 떠났다(어머니의 태도와 감정의 융합을 반영). 그녀는 결혼을 했고 자신의 에너지를 대부분 새로운 가족에게 쏟아부었다. 새로운 가족에서 곧 두 명의 자녀를 출산했다. 그녀는 어머니와는 피상적인 접촉을 유지하고 동생과는 거의 접촉을 하지 않았다. F가 독립할 때 그녀는, E보다도 훨씬 더 가족으로부터 단절되어, 다른 자매들보다 삶을 살아가는 데 더 많은 문제를 겪었다. F의 어머니로부터의 단절은 어머니와 함께 지낸 며칠 동안에도 그녀에게 주어지는 어린애 같은 지위를 피하고 싶은 욕구와 관련있었다. 어머니가 F와의 단절을 해결하려는 것을 꺼리는 것은 아마도 F를 대하는 그녀 자신의 두려움이다. (각주 3)

 자신의 핵가족 내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E는 그녀의 확대가족과의 접촉을 재개하려고 했다. 그녀의 노력의 일부는 동생과 더 많이 접촉하는 것이었다. E와 F 간의 주된 문제들은 E가 F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는 것과 동생을 어린애처럼 취급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었다(아동기 삼각관계의 일련의 명백한 반복). E는 동생뿐만 아니라 어머니와의 접촉빈도도 늘린다. 그러나 동생과 어머니는 서로 접촉하지 않았다. 긴장된 거리감은 계속 유지되었고 둘 다 E를 서로에 대한 정보원으로 이용했다.

 여동생이 첫째 아이(G)를 낳고 난 후 주된 변화가 일어났다. 아기가 태어나자 바로 어머니는 몇 년만에 처음으로 막내딸을 찾아갔다. 그것은 매우 오랜 만남이었고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마도 아기의 존재와 함께 조화로운 친밀감이 둘 사이에 다시 생겨났다.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딸의 보호자가 되었고 딸은 어머니의 보호에 의지했다. 새로운 아기의 탄생으로 잠재적인 문제들이 회피됐다. 그 만남 이후,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E의 새로운 시도에 감사하던 막내딸은, 자기를 괴롭혔던 언니를 비난하면서 해명해주길 바랬다. 그것은 삼각관계의 매혹적인 부활이었다.

 만약 E가 F의 비난이 오랜 삼각관계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동적으로) 적대적으로 혹은 방어적으로 반응한다면, 두 자매간의 삼각관계의 긴장은 다시 시작된다. 효과적으로 탈삼각관계하기 위해서 E는 몇 가지를 행해야만 한다. 첫째, 그녀는 삼각관계의 과정을 공정하고 정확하게 인식해야만 한다. 둘째, 그녀는 이전에 그녀의 행동을 편향되게 했던 태도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그녀가 필요로 했던 모든 관심을 주었다면 삶에서 그녀의 정서적 운명은 (아마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에 대한 E의 분노와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했다는 태도는 가족과의 많은 상호작용에서 내재되어 있다. (각주 4) 탈삼각관계에 필요한 세 번째 단계는, 한 개인의 행동에 대한 감정과 주관적인 영향을 인식하고, 그러한 감정과 주관성에 기초한 자동적인 반응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삼각관계과정을 이해함으로써 E는 “그래, 내가 너한테 못되게 굴었어. 그건 네가 항상 나보다 어머니의 욕구를 만족시켜 드렸기 때문에 질투가 났던 거야”라는 탈삼각관계하려는 말을 동생에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응은 F와의 싸움을 피하게 하고, 막내딸과 어머니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성에서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게다가 상당히 정서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인 막내에 대한 어머니의 관여를 강조하기보다는, 어머니의 불안을 경감시켜주려는 막내의 성향을 강조한다. 어머니와 막내딸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성 수준은 막내딸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삶-그리고 부모의 결혼-에서 어떤 기능을 한다. 여동생과 어머니와의 연합성을 더욱 돈독하게 해주는 방식으로 여동생과 의사소통하면서, E는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최근 여동생을 방문한 것이 여동생의 사기를 얼마나 살려놓았는지를 강조한 다음에 장차 더 많은 방문을 하도록 권할 수 있다. E는 “엄마, 누구도 동생을 엄마만큼 잘 보살펴줄 수는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끝맺을 수 있다. 이런 말은 어머니와 막내딸 간의 연합과정을 강조하고, 과장하며, 격려한다.

 자기들의 문제 때문에 당신을 삼각관계에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즉, E가 동생에게 “우리는 삼각관계의 한쪽에서 행동하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편이 더욱 낫다는 것이다. 문제는 동생이 삼각관계를 그런 식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E가 그것을 그런 식으로 보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삼각관계는 ‘정서적 논리’라 불리는 것에 의해 좌우되고 그러한 정서에 의해 지시되는 말과 행동에 대해 반응한다. 삼각관계과정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이성적이고 잘 표현된 설명도 무시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한 개인이 다른 사람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가족에게 ‘가르쳐주지’ 못하거나 혹은 ‘설명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일반적으로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즉, 자기분화를 저해한다. (ㅠㅠ...)

 삼각관계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누군가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모든 곳에서 발생한다. 아무도 삼각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삼각관계로 끌어들이는 것에서 예외일 수 없다. 개인의 분화를 유지하는 것은 회피하려고 하는 관계 안에 문제를 놔두는 것이다. (!!!) 개인의 분화를 유지하는 것은 관계문제의 해결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한 사람의 문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키는 것을 막는다. 개인의 분화를 유지하고 탈삼각관계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조작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한 사람을 조작하고 통제하는 다른 사람들의 시도를 다루는 방식이다. 탈삼각관계하려는 개인의 노력이 효과적이고 삼각관계의 다른 두 구성원들과 적절한 접촉을 계속한다면, 그들의 관계에 있어 어느 정도의 안정성과 향상이 발생할 것이다. 삼각관계의 한 구성원이 자신의 기능에 대해 더 많은 책임감을 가진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가 하는 대로 할 것이다. 이자관계에 있는 각 성원들은 이자관계에 있는 어떤 사람들보다 이탈된 제3자의 더 높은 분화수준에 자신의 기능 분화수준을 높일 것이다. (각주 5)

 정서체계, 분화, 만성 불안 및 삼각관계 개념에 대한 인식은 핵가족 정서체계에서 관찰될 수 있는 다양한 과정들의 상호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핵가족 내 이러한 과정들의 강도에서의 양적 차이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


각주-

 1) 그 과정은 결코 명확한 한 단계, 한 단계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들이 거의 객관적이 되면 어느 지점이나 정서적 중립성이 되기 전에 탈삼각관계를 시도한다. (ㅇㅇ.) 그러나 만약에 한 개인이 자신의 실수로부터 알게 된다면 그때 삼각관계과정은 거의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 효과는 향상될 수 있다. 보통의 경우 적당히 통합된 가족들로부터 잘 통합된 가족들 안에서, 개인의 실수는 또한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높은 스트레스 상태에서는 잘 분화되지 않은 가족이나 적당히 잘 분화된 가족에게 그것은 상당히 파괴적일 수 있다. (ㅠㅠ...) 이것은 자신보다 더 객관적인 치료자 혹은 ‘지도자(coach)’가 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 이상의 자기를 정의하려는 개인의 노력을 과소평가한다. 심지어 분화된 개인의 노력이 그것을 과소평가하려는 사람들에게 합리적인 수준(전체 가족이 건설적인 것처럼 여겨지거나 지각되는)에서 바람직하게 보일지라도,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그렇게 해서 더 많이 분화되려는 개인의 노력을 방해한다. (본문으로)

 3) 성인기에 긴장된 거리감으로의 전환은 자녀가 성장하는 동안 매우 몰입되어 있던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본문으로)

 4) 한 개인의 가족 내 상호 맞물린 삼각관계의 작용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과거 해결되지 않은 감정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감정의 해결은 억제나 거부의 산물이 아니지만, 스스로의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개인적으로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과 관계있다. 체계(의 일면이 된 삼각관계)에 대한 이해는 특정 개인에게 그 원인을 비난하지 않고 각 개인이 역할하는 부분을 정의할 수 있도록 돕는다. (본문으로)

 5) 구조화된 노력에 기초해서 원래 이자 중 한 성원이 본래 더 이탈되어 있던 개인보다 그의 기능과 기본 분화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 분화는 치료자의 기교보다는 지식에 의존한다. 동기화된 가족원들은 치료자의 분화수준을 넘어설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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