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63~p.65 발췌.


 의식이 편견이나 오류나 공상, 그리고 유아적인 욕구에 의해 훼손되면 될수록 의식과 무의식 사이는 점점 더 벌어져서 결국은 신경증적 분열 상태에 이른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건 부자연스러운 생활로 이어지며, 건강한 본능과 자연과 진실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만다.

 꿈의 일반적인 기능은 미묘한 방법으로 마음 전체의 균형을 되찾아 줄 만한 꿈의 재료를 산출함으로써 심리적 평형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가리켜, 우리 심리 구조에서 꿈이 맡는 보충적(또는 보상적) 역할이라고 부른다. 바로 그렇기에 비현실적인 이상을 품고 스스로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나, 자기 능력에 맞지 않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종종 하늘을 날거나 추락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 꿈은 그들의 인격적 결함을 보상해 주는 동시에 그들이 현재 걷고 있는 길이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꿈의 경고를 무시하면 정말로 사고가 발생한다. 희생자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거나 자동차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꼼짝달싹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일종의 보상 행위로서 위험한 등산에 거의 병적으로 집착했다. 말하자면 ‘나 자신을 뛰어넘는 그 무엇’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속에서 그는 자기가 높은 산 정상에서 허공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꿈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즉시 위험을 감지했다. 그 꿈은 일종의 경고였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그에게 좀더 몸조심을 하라고 타일렀다. 그것은 그가 산에서 사고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꿈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6개월 뒤 그는 정말로 ‘허공으로 걸어갔다’. 등반 안내인은 그가 친구와 함께 험한 코스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친구는 암벽에서 발 디딜 곳을 찾으면서 조심조심 내려왔고, 그 역시 친구를 따라 내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로프를 놓쳤다. 등반 안내인의 목격담에 따르면 ‘그는 그야말로 허공으로 뛰어들듯이’ 추락했다. 그는 그대로 친구 위에 떨어져서 두 사람 다 추락사하고 말았다.

 또 다른 전형적인 예를 살펴보자. 분수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는 한 부인이 있었다. 부인은 평소에는 고상하고 훌륭하게 처신했지만 밤마다 꾸는 꿈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온갖 역겨운 것을 연상시키는 꿈이었다. 내가 그 의미를 밝혀냈을 때 부인은 불같이 화를 내며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꿈은 점점 더 강박적으로 변했다. 부인이 언제나 정열적인 공상에 빠진 채 홀로 숲 속을 산책하는 모습이 꿈에 자꾸만 등장하는 것이었다. 나는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몇 번이나 경고했지만 부인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은 숲 속에서 변태를 만나 끔찍한 꼴을 당했다. 비명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부인은 그놈한테 살해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 무슨 마술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단지 그 부인의 꿈은 그녀가 그런 모험을 은근히 동경한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 줬을 뿐이다. 앞서 말했던 등산가가 험한 코스를 헤쳐 나갈 확실한 길을 찾아냄으로써 만족을 얻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분명히 그들은 거기에 혹독한 대가가 따르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부인은 뼈가 몇 대나 부러졌고, 등산가는 자기 목숨을 대가로 지불해야 했다.

 이렇게 꿈은 때때로 어떤 사태가 실제로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꼭 기적이나 예언의 한 형태일 필요는 없다. 인생에 닥쳐오는 갖가지 위험은 오랜 무의식적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위험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줄도 모르고 그쪽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그러나 우리 의식이 모르고 지나치는 것을 무의식이 감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무의식은 꿈을 통해 그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83~p.84 발췌.


 ...앞에서 나는 의식적인 마음의 결함이나 뒤틀림을 보상하는 것이 꿈의 일반적인 기능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이 가정이 특정한 꿈의 성질에 접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한다는 뜻이었다. 어떤 사례에서는 이 기능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때도 있다.

 내 환자 가운데 한 사람은 스스로를 과대평가했는데,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의 고상한 체하는 태도를 역겨워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꿈속에서 술에 취한 부랑자가 하수구에 굴러떨어져 있는 모습을 봤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 광경을 그는 거만하게 묘사하면서 한마디했다. “인간이 그렇게나 타락할 수 있다니, 참 무섭네요.” 이 꿈이 불쾌한 성질을 띠고 나타난 것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그의 판단을 상쇄시키려는 하나의 시도였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곧 그의 형제가 알코올 중독으로 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꿈은 또 한 가지 사실을 시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바로 그 환자가 자신의 외부 또는 내부에 존재하는 형제의 이미지를 보상하기 위해서 그렇게 잘난 체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것을 말이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91~p.92 발췌.


 ...중요한 것은 환자 개개인의 언어를 배우고, 환자의 무의식이 빛을 찾아 더듬어 나가는 방향으로 잘 따라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사례에는 이 방법이 필요하고, 저 사례에는 저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상징을 해석하려는 사람에게 이 사실은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거의 똑같은 꿈을 꾸는 경우도 있다(임상적으로는 쉽게 경험할 수 있으므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진기한 현상은 아니다). 그런데 만일 젊은이와 늙은이가 같은 꿈을 꿨다면, 그들의 심리적 장애를 일으키는 문제는 연령에 따라 다를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꿈을 같은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문득 떠오르는 예가 하나 있다. 꿈속에서 젊은이들이 말을 몰아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꿈꾼 사람은 맨 앞에 있었다. 그는 물이 콸콸 흐르는 도랑에 다다르자 이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도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꿈 이야기를 처음으로 나에게 들려준 젊은이는 매우 주의 깊고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꿈을 꿨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하루하루 모험하듯이 활동적으로 살아가는 다소 무모한 노인이었다. 그 꿈을 꿨을 때 노인은 환자였다. 그것도 의사와 간호사들 속을 썩이는 환자였다. 실제로 그는 의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가 괜히 몸만 상했다고 한다.

 나는 이 꿈이 젊은이에게 앞으로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라고 충고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노인의 경우는 달랐다. 그 꿈은 왜 아직도 그런 위험한 짓을 하느냐고 노인에게 충고했던 것이다. 꿈은 소심한 젊은이를 격려했지만 노인에게는 그런 격려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인의 가슴속에 살아남아 꿈틀거리는 모험심은 실제로 그를 위협하는 커다란 파멸의 불씨였던 것이다. 이 사례는 꿈이나 꿈 상징의 해석이 꿈꾼 사람의 개인적 상황이나 마음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93~p.95 발췌.


 ...상당히 강박적인 꿈이거나 매우 정서적인 꿈이라면, 보통은 꿈꾼 사람이 하는 개인적인 연상만 가지고는 만족스럽게 꿈을 해석할 수 없다. 이럴 때 우리는 (프로이트가 처음으로 인지하고 언급한 것인데) 개인적이지 않은 요소, 또는 꿈꾼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끌어낼 수 없는 요소가 꿈에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프로이트는 이 요소들을 ‘고대의 잔재’라고 불렀다. 그것은 꿈꾼 개인의 생활만으로는 그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 심리 형태로서, 원초적이며, 오랫동안 이어져 온 유전적인 인간 심리 형태로 보인다.

 인간의 신체는 기나긴 진화의 역사를 지닌 여러 기관(器官)들이 모여 있는 박물관이다. 마음도 바로 같은 식으로 구성돼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을 담은 신체가 그러하듯이 마음도 또한 역사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역사’란, 마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언어나 다른 문화적 전통을 통해 과거와 의식적인 교감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인간 마음이 아직 동물에 가까웠던 오랜 옛날에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마음의 생물학적·선사적(先史的)·무의식적 발달을 논하고 있다.

 매우 오래된 이 마음이 오늘날 우리 마음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는 우리 신체가 포유류의 일반적인 해부학적 유형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과 같다. 숙련된 해부학자나 생물학자의 눈은 우리 신체에서 여러 가지 원초적 유형의 흔적을 찾아낸다. 마찬가지로 경험이 풍부한 심리 연구자는 근대인의 꿈 이미지와 원시인의 창조물, 꿈의 ‘보편적 이미지’와 신화적 주제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생물학자가 비교해부학 지식을 필요로 하듯이 심리학자도 ‘마음의 비교해부학’ 지식이 있어야지만 마음을 연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심리학자는 꿈을 비롯한 무의식적 활동의 산물에 관한 경험을 충분히 쌓아야 할 뿐만 아니라, 좀더 넓은 의미에서 신화에 대한 지식도 쌓아야 한다. 그 누구도 이런 준비 없이는 중요한 유사성을 알아차릴 수 없다. 예컨대 강박신경증 사례와 고전적인 빙의(憑依) 현상 사이의 유사성은 양자에 관한 실제적인 지식 없이는 파악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고대의 잔재’를 ‘원형(原形)’ 또는 ‘원시 심상(心像)’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에 관한 내 견해는, 꿈이나 신화에 대해 충분한 심리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비판받아 왔다. ‘원형’이라는 용어는 어떤 명확한 신화적 이미지나 주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자주 오해를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다. 그것은 의식적인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변하기 쉬운 표상이 대대로 유전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원형이란 그런 주제를 표상으로 형성시키는 경향을 말한다. 그 표상은 기본적인 유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세부적으로는 다양하게 변한다. 예를 들어 ‘동족상잔’이라는 주제를 나타내는 표상은 다양하지만 주제 자체는 다 똑같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내가 ‘유전된 표상’을 다룬다고 오해해서, 원형이라는 개념을 한낱 미신으로 치부해 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만약에 원형이 우리 의식에서 유래한 표상이라면(또는 의식이 획득한 것이라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 원형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이 우리 의식에 나타났을 때에도 당황하거나 놀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원형은 사실 본능적인 경향성이다. 그것은 둥지를 짓는 새의 충동이나 조직적 집단을 형성하는 개미의 충동과 마찬가지로 뚜렷이 드러난다.

 이쯤에서 본능과 원형의 관계를 분명히 밝혀야겠다. 우리가 정확히 본능이라고 부르는 것은 생리적인 충동으로서 감각을 통해 지각된다. 그런데 동시에 이것이 또 공상 속에도 나타나서 상징적인 이미지로만 존재하기도 한다. 바로 이 ‘나타남’을 나는 ‘원형’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원형의 기원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원형은 언제 어디에서나 나타나며, 심지어 직접 상속에 의한 유전이나 이주(移住)에 의한 ‘교잡 수정(交雜受精)’이 이루어졌을 리 없는 곳에서도 나타난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106 발췌.


 ...이것들이 표현되는 개개의 형태는 다소 개인적이지만, 그 일반적인 형태는 분명 보편적이다. 이러한 상징들은 언제 어디서나 발견된다. 이것은 마치 동물의 본능이 종류에 따라 매우 다르게 표출되더라도 실제로는 똑같은 일반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갓 태어난 동물이 저마다 개별적인 자질로 본능을 창조해 나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한 사람 한 사람 새로 태어날 때마다 인간적인 방법을 발명해 나간다고 볼 수는 없다. 본능과 같이 인간 마음의 보편적인 사고 형태는 타고난 것이며,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이러한 사고 형태는 개별적인 상황에 맞춰 우리 모두에게서 대개 비슷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이 같은 사고 형태가 속해 있는 정서적인 표현은 지구촌 어디에서나 분명히 똑같이 나타난다. 우리는 그것을 동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물들은 서로 다른 종에 속해 있어도 이 점에서 서로를 이해한다. 그럼 곤충의 복잡한 상징적 기능은 어떨까. 곤충들은 대개 자기 부모도 모르고 교육도 받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인류만이 그 특정한 본능을 박탈당한 생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며, 인간 마음에는 온갖 진화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추론할 수 있겠는가.

 만일 마음을 의식과 동일시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오해를 할 수도 있다. 즉 인간은 애초에 텅 빈 마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 마음은 나중에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배운 내용들로만 채워져 나간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은 의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140~p.143 발췌.


 ...이러한 논의는 원형이 실제 체험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준다. 원형은 이미지인 동시에 정서이다. 이 양자가 한꺼번에 존재할 때에만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이미지로만 되어 있다면 그것은 한낱 그림 문자이므로 별다른 결과도 낳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정서가 더해지면 이미지는 누미노스(또는 심적 에너지)를 획득한다. 따라서 그것은 역동성을 띠면서 반드시 어떤 결과를 낳게 된다.

 원형의 개념을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 본성상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대상을 지금 이렇게 말로 설명하고 있으니,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원형을 기계적인 체계의 일부분으로 여기면서 그것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원형이 단순한 명칭이나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꼭 강조해야겠다. 원형은 생명 그 자체의 일부분으로, 정서라는 기교를 통해 살아 있는 개인과 통일적으로 결합돼 있는 이미지이다. 그렇기에 어떤 원형에도 임의의(또는 일반적인) 해석을 적용할 수는 없다. 원형은 그와 관련된 특정 개인의 전체적인 생활에 나타나는 양식(樣式)을 바탕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의 경우에는 십자가 상징이 반드시 그리스도교 문맥에 따라 해석돼야 한다. 물론 꿈이 그런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강력한 이유를 제시한다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특정한 그리스도교의 의미는 언제나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십자가 상징이 똑같은 의미를 지닐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십자가는 누미노스를 상실하고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단순한 낱말이 되어 버릴 것이다.

 원형이 지닌 특수한 감정의 색조를 모르는 사람은 원형을 한낱 신화적 개념의 집합체라고만 생각한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거꾸로 생각하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나타나기 위해서 그것들을 합쳐 놓을 수는 있으리라. 이 세상 모든 인간의 시체는 화학적으로는 다 똑같다. 그러나 살아 있는 개개인은 똑같지 않다. 그러므로 대체 어떤 이유로, 또 어떤 방식으로 원형이 살아 있는 개인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우리가 끈기 있게 알아내려고 노력할 때에만 원형은 비로소 생명력을 지닐 수 있다.

 의미도 모르는 채 단어를 사용하기만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특히 심리학에서는 더욱 그렇다. 심리학에서 우리는 아니마, 아니무스, 현자, 태모(太母) 같은 원형에 대해 이야기한다. 성자, 현자, 예언자나 그 밖의 성스러운 사람들, 더 나아가 전 세계의 태모에 대해서 우리는 속속들이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 누미노스를 체험하지 못하고 그런 원형을 단순히 이미지로만 알고 있다면, 원형을 논할 때에도 마치 꿈결 속에 주절거리는 것처럼 자기가 정확히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의 누미노스-살아 있는 개인과의 관계-가 고려될 때에만 원형은 생명력과 의미를 얻는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명칭의 의미 따위는 중요치 않으며, 원형이 개인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145~p.146 발췌.


 ...‘개성화 과정’이라 불리는 이 영역에서 상징 해석은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왜냐하면 상징이란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대립을 조화시켜 다시 통합하려는 자연스러운 시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상징을 그냥 보고 넘기기만 한다면 이런 효과는 얻을 수 없다. 그러면 오히려 해묵은 신경증적 조건을 되살려 놓음으로써 통합을 방해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원형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 소수의 사람들조차도 거의 똑같이 원형을 단순한 언어로만 다룰 뿐, 살아 있는 현실성을 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원형의 누미노스가 (부적절하게) 제거되어 버리면, 이제는 끝도 없는 치환 과정이 시작된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되므로, 원형과 원형 사이를 부질없이 옮겨 다니게 된다. 물론 원형의 형태는 어느 정도 서로 교환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원형의 누미노스는 엄연한 하나의 사실이며, 그 원형적인 사건의 가치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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