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245~p.246 발췌.


 융 박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꿈을 연구함으로써(그 스스로는 8만 개도 넘는 꿈을 해석했다고 추산하였다) 한 가지 사실을 밝혀냈다. 즉 꿈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꿈꾼 당사자의 삶과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리적 요소로 이루어진 거대한 조직의 한 부분인 것이다. 융 박사는 또 전체적으로 볼 때 꿈은 하나의 배열이나 패턴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 패턴을 융 박사는 ‘개성화 과정’이라고 부른다. 꿈이라는 것은 매일 밤 다른 광경이나 이미지를 산출하므로,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여기에서 어떤 패턴도 찾아낼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몇 년 동안 꾸준히 연구한다면 어떤 일정한 내용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또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똑같은 이미지나 풍경이나 상황을 되풀이해서 꿈꾸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이러한 꿈을 계열 전체에 걸쳐 관찰해 나가는 사람은 꿈이 천천히 변화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만일 꿈꾸는 사람의 의식적인 태도가 꿈이나 그 상징적 내용의 적절한 해석에 영향을 받는다면, 그 변화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꾸는 꿈은 복잡하게 뒤얽힌 패턴을 이룬다. 그 속에서 우리의 소질이나 성향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또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이 복잡한 문양을 오랜 기간 동안 관찰하다 보면, 숨겨진 규칙성 또는 방향성이 여기에 작용하고 있으며 이것이 눈에 띄지 않는 느릿느릿한 마음의 성장 과정-개성화 과정-을 진행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마음의 성장은 의지력이라고 하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음의 성장은 꿈속에서 종종 나무로 상징된다. 느리지만 힘차게 자라나는 나무의 자연스런 발육 과정은 명확한 하나의 패턴을 이루기 때문이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249~p.250 발췌.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 산에 있는 소나무 씨앗은 나무의 잠재적인 형태이다. 이 씨앗은 소나무의 미래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개개의 씨앗은 어느 날 어느 곳에 떨어진다. 여기에는 토양, 토질, 지면 경사도, 햇빛이나 바람을 받는 정도 등등, 온갖 특수한 요인이 존재한다. 씨앗 속에 잠재해 있는 소나무의 전체성은 이러한 상황에 반응한다. 이를테면 뿌리가 바위를 피해서 뻗는다든지, 줄기가 태양 쪽으로 기운다든지 하는 식으로 상황에 맞춰서 나무의 성장 형태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개의 소나무는 천천히 현실화되는 과정을 통해 자기의 전체성을 충족시키면서 현실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실재하는 소나무가 없다면, 소나무의 이미지는 단순한 가능성이며 추상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개인의 내부에 있는 이러한 개성의 실현이 바로 개성화 과정의 목표인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그리고 다른 모든 생물)에게 일어나는 이 과정은 무의식 중에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인간이 자기의 내적 인간성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개성화 과정은 개인이 그것을 인지하고 의식적으로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소나무가 자신의 성장을 인지하고, 자신의 형상을 결정짓는 여러 가지 변화를 즐기는지 싫어하는지는 우리로선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분명히 자신의 발전 과정에 의식적으로 참가할 수 있다. 인간은 자유롭게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 발전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음을 자각할 때도 있다. 좁은 의미의 개성화 과정에는 이러한 협조가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앞서 이야기한 소나무의 비유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무엇인가를 경험한다. 소나무가 성장할 때에는 생래적인(타고난inborn) 전체성의 배종(胚種germ)이 운명에 의한 외부의 작용과 타협한다. 하지만 인간의 개성화 과정은 그런 타협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주관적인 체험을 통해 어떤 초인적인 힘이 창조적인 방법으로 우리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또 비밀스런 계획에 따라 무의식이 자신을 이끌고 있다는 느낌도 받는다. 마치 무엇인가가 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하지만 그것은 나를 보고 있다. 그것이 바로 꿈을 통해 나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마음 속의 ‘위대한 자’일 것이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262 발췌.


 친구에게 결점을 지적당하고 엄청난 분노를 느낀 경우가 있다면, 바로 그 지적을 통해 당신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그림자의 일부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런 그림자의 결점 때문에 ‘나보다 나을 것도 없는 타인’에게 비판을 받는다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타인이 아닌 당신 자신의 꿈-자신의 존재 안에 있는 내적 판단-이 당신을 그렇게 비판한다면 과연 어떨까? 그 순간 당사자는 자기 자아를 인식하고는 당황하여 침묵에 빠질 것이다. 이러한 만남 뒤에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자기 교육 과정이 시작된다. 말하자면 그는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과 맞먹는 심리적 과업을 수행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불행한 영웅의 첫 번째 과업은, 수많은 가축들이 수십 년 동안 어질러 놓은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하루 만에 청소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만 해도 기겁하여 좌절할 만큼 엄청난 과업이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266 발췌.


 ...그림자는 대체로 의식이 필요로 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이 가치는 개인의 일상생활로 통합되기 어려운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270 발췌.


 그림자와 친구가 되느냐 적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림자가 반드시 꿈꾼 사람과 적대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듯이 그림자를 대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져 주기도 하고 대항하기도 하고, 또 친하게 지내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무시되거나 오해받을 때에만 적대적인 힘이 된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270~p.272 발췌.


 ...그러나 그림자가 저항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충동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이것을 강하게 억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 그림자의 힘은 ‘자기’의 요청과 같은 방향을 지향하기 때문에 강력해지기도 한다. 그 내적인 압력의 배후에 있는 것이 자기인지 그림자인지 분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불행히도 인간은 달빛 아래 있는 것과 같다. 달빛 아래에서는 모든 사물이 흐려져서 서로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저것이 대체 무엇인지, 그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게 된다. (이런 현상이 바로 무의식적 내용의 ‘오염(contamination)’이다.)

 융 박사가 무의식적인 인격의 일부를 ‘그림자’라고 이름지었을 때에는, 비교적 정확히 정의된 요소를 두고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림자가 늘 그렇게 명확하지는 않다. 그림자에는 자아가 모르는 모든 것이 혼합될 수도 있고, 귀중하기 이를 데 없는 막강한 힘까지 포함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앞의 꿈에서 등장한 프랑스인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불량배인지, 아니면 가치 있는 내향적인 인간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보다 앞서 언급했던, 도망쳐 나온 말 세 마리도 마찬가지다. 과연 그 말을 자유롭게 달리게 놔둬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처럼 꿈만으로는 사태가 명확해지지 않을 경우, 의식적 인격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림자상이 가치 있는 유용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억압되기보다 실제 체험에 동화되어야 한다. 자아는 자만심이나 우월감을 버리고, 부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그림자 요소를 삶 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행위는 격정을 이겨 내는 행위와는 정반대되는 것이지만, 그와 똑같은 정도의 영웅적 결단을 필요로 한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273~p.274 발췌.


 어두운 상(像)이 꿈속에 나타나 무엇인가를 요구할 때, 우리는 그 상이 인격화된 자신의 그림자 부분인지 아니면 인격화된 자기인지, 또는 둘 다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 어두운 동반자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결점을 상징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수용해야 할 유의미한 생활 방식을 상징하는 것일까? 이를 구별하는 것도 개성화 과정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이다. 게다가 꿈의 상징은 너무 미묘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확신을 가지고 해석할 수는 없다. 이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그 윤리적 의혹의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최종적인 결론이나 행동은 보류하고-꿈을 계속 관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심오한 무의식의) 힘은 개인이 직접 느끼는 수밖에 없으며, 그는 여기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294~p.295 발췌.


 그런데 내적 세계의 안내자로서 아니마는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아니마의 이 긍정적인 기능은 아니마가 제공하는 감정, 기분, 기대, 공상을 남성이 진지하게 받아들여 어떤 형태-글, 그림, 조각, 악곡, 무용 등-로 정착시킬 때 작용한다. 남성이 끈기 있게 꾸준히 이런 작업에 열중할 경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또 다른 무의식적인 소재가 솟아나와 기존 소재와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어떤 공상이 특정한 형태로 정착되면, 이번에는 감정 반응의 평가에 따라 그것을 지적·윤리적 측면에서 검토해 봐야 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그것을 절대적인 현실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렇게 정착된 이미지를 ‘단순한 공상’으로 치부하고 속으로 의심해서는 안 된다. 개인이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이 작업을 실행에 옮길 때 개성화 과정은 점점 현실화되다가 마침내 본디 형태를 갖추게 될 것이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302 발췌.


 안타깝게도 이 인격화한 무의식 중 하나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면, 우리 자신이 정말로 그런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런 생각과 감정이 무의식에서 비롯된 줄 모른다. 자아는 그 생각이나 감정과 동화되어 버리므로, 그로부터 분리되거나 그것의 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된다. 말하자면 그는 무의식에서 생겨난 이미지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이 이미지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의 진정한 생각이나 감정과 상반되는 엉뚱한 짓을 저질렀음을 깨닫고 두려움과 후회를 느끼게 된다. 그때까지 그는 자아와는 무관한 심리적 요인의 포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297 발췌.


 개성화 과정의 이 단계에서 나타나는 정체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공상이나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개인의 고통스러운(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간단한) 결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개인이 자기의 공상이나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비로소 아니마상이 내적 현실로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했을 때 아니마는 마침내 본모습-‘자기’가 보내는 메세지를 전달하는 ‘내적인 여성’-을 되찾게 된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310 발췌.


 개인이 아니마나 아니무스 문제를 오랫동안 진지하게 다룬 끝에, 아니마나 아니무스를 자신과 부분적으로 동일시하게 되는 폐해를 극복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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