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181 발췌.


 ...일반적으로 영웅 상징의 필요성은 자아가 강화될 필요가 있을 때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즉 무의식이 지닌 잠재력의 도움 없이 의식의 힘만으로는 어떤 과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그런 필요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163-p.164 발췌.


 ...신과도 같은 수호자는 사실상 그 영웅의 마음 전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좀더 넓고 포용력 있는 동일성을 나타내면서 영웅 개인의 자아에 결여되어 있는 힘을 보충하는 존재이다. 이 수호자의 특별한 역할을 자세히 살펴보면, 영웅 신화의 본질적인 기능이 바로 영웅 개인의 자아의식 발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수호자의 도움으로 영웅은 앞길을 가로막는 온갖 삶의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 나가면서 자신의 역량과 약점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한 개인이 이런 입문 의식을 무사히 치르고 인생의 성숙기에 접어들면 영웅 신화는 이제 의미를 잃어버린다. 영웅의 상징적 죽음은 개인의 성숙이 성취되었음을 뜻한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는 영웅 신화의 특수한 형식이 존재하며, 이 형식이 자아의식의 발달 과정에서 개인이 도달해 있는 특정한 단계에 상응하는 모습을 갖춘다는 점을 우리는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그 형식은 어느 특별한 순간에 그가 조우하는 특정한 문제에 딱 들어맞는다. 즉 영웅상이 발달해 가는 과정은 인간의 인격 발달 단계를 반영한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162 발췌.


 ...영웅 신화는 모두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되풀이해서 이야기한다. 즉 영웅은 언제나 음지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나 인생 초기에 초인적인 힘이 있음을 증명하고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거나 놀라운 위력을 보이고, 악한 무리와 싸워서 이들을 무찌르고, 오만(hybris)이라는 죄의 씨앗을 마음속에 키우다가 이윽고 누군가의 배신이나 ‘영웅적인’ 희생으로 인해 몰락하여 결국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169-p.171 발췌.


 ...이 기본적인 주제는 (마지막 주기인 ’쌍둥이’에서 되풀이되는데) 실제로 중요한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은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자기 오만에 희생되지 않고, 또는 신화적으로 말하면 신에게 질투를 받지 않고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나바호 인디언 신화에 나오는 전사신(戰士神)들처럼 이들 역시 오만해진 나머지 그 힘을 남용하다가 파멸을 자초하게 된다. 하늘에도 땅에도 그들이 퇴치해야 할 괴수는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들은 만행을 저지르다가 마침내 천벌을 받기에 이른다. 위네바고 인디언의 말에 따르면, 결국 이들 손에 걸리면 남아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들 앞에서는 세계를 지탱하는 기둥까지도 위태로워진다. 결국 쌍둥이는 땅을 떠받치고 있는 네 마리 동물 가운데 한 마리를 죽임으로써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는 이승에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 쌍둥이가 받은 벌은 죽음이었다.

 ‘붉은 뿔’ 주기에서나 ‘쌍둥이’ 주기에서나 우리는 도에 넘치는 자부심, 즉 ‘오만(hybris)’의 죄를 영웅의 희생이나 죽음으로써 갚는다는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붉은 뿔’ 주기에 대응하는 문화 수준을 가진 원시 사회는 화해의 인신공희(人身供犧) 의식을 통해서 이 운명적인 위험을 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주제는 매우 상징적인 중요성을 지니면서 인류의 역사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되어 왔다. 이로쿼이족이나 몇몇 알곤킨족처럼 위네바고족도 이 개인적이고 파괴적인 충동을 완화시키는 토템 숭배 의식으로서 사람 고기를 먹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 신화에 나오는 영웅의 배신이나 패배 이야기를 보면, ‘오만’에 대한 벌로써 이러한 제의 같은 희생이 이루어진다는 주제가 좀더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나바호 인디언과 마찬가지로 위네바고족은 극단으로까지 치닫지는 않는다. ‘쌍둥이’는 죽음으로 갚아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었지만,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무책임한 힘에 겁을 먹은 나머지 영원한 휴식을 취하기로 합의를 보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로써 서로 모순되는 인간의 양면은 다시 평형을 되찾는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193~p.198 발췌.

 심리학적 의미에서 영웅상(英雄像)을 자아 자체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영웅상은 유아기 초기에 부모의 이미지로 환기된 원형에서 자아가 자신을 분리시키는 데 사용되는 상징적인 방편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융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본디 인간은 전체성을 느끼는 감각,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강력하고 완전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개인이 성장함에 따라 이 자기-마음 전체-로부터 개성을 지닌 자아의식이 출현하는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융 박사의 후계자들은 영아기에서 유아기에 이르는 과도기에 나타나는 일련의 사건-이를 통해 개인의 자아가 출현하게 된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아의 분리 현상은 근원적인 전체성에 대한 감각을 크게 해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그 뒤에도 자아는 정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전 상태로 돌아가 자기와의 관계를 다시 확립해 나아가야 한다.

 영웅 신화가 정신적 분화 과정에서 첫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내 연구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미 나는 자아가 전체성을 지닌 처음 상태에서 상대적 자율성을 획득하기까지 네 개의 주기를 거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자율성을 획득하기 전까지는 개인은 성인에게 주어지는 환경을 자기 것으로 수용할 수 없다. 그런데 영웅 신화는 이 분리와 해방이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영웅 신화는 그런 분화가 일어나는 과정과, 그 결과로 자아가 의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제시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아직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즉 개인이 가치 있는 인생을 영위하면서 사회 내부에서 개성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감각을 얻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그 의식을 의미 있게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고대 역사와 현대의 미개 사회 의식에는 성년식 신화나 의식에 관한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다. 이 의식을 통해 젊은 남녀는 부모로부터 떨어져 강제적으로 그 씨족이나 부족의 일원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아이의 세계와 결별함으로써 젊은이들이 갖고 있던 원초적인 부모 원형은 상처를 받게 된다. 이 상처는 집단생활에 동화되는 과정을 거쳐 치료해야만 한다(집단과 개인과의 동화는 종종 토템 신앙의 동물로 상징된다). 그리하여 집단은 손상된 원형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면서 제2의 부모가 된다. 바로 이 부모를 위해서 젊은이들은 처음에는 상징적인 희생 의식을 치르게 되지만, 그 결과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융 박사가 “강대한 세력에게 젊은이를 제물로 바치는 듯한 격렬한 의식”이라고 평가한 이 의식에서, 우리는 원초적인 원형의 힘이 영웅과 용의 싸움으로 상징되는 방식에 의해서는 왜 영구적으로 극복될 수 없는지 알아낼 수 있다. 즉 그런 방식으로 자아가 분화되면 누구나 무의식의 풍부한 힘으로부터 소외된 듯한 상실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쌍둥이’ 신화에서 자기와 자아가 과도하게 분리되면서 나타난 오만(hybris)이 자기네 행동에 대한 쌍둥이들의 두려움으로 인해 수정되고, 그 결과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다시 자기와 자아의 조화로운 관계로 돌아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부족 사회에서 이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성년식이다. 이 의식에서 신참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모자(母子) 동일성 또는 자기 및 자아와의 동일성 상태까지 퇴행함으로써 상징적인 죽음을 체험한다. 이 상태에서 그는 새로운 탄생의 제의를 통해 의례적(儀禮的)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토템, 씨족, 부족 또는 이 세 가지가 결합된 커다란 집단과 자아를 진정으로 통합시키는 첫 번째 행위이다.

 부족 사회에서나 그보다 더 복잡한 사회에서나 이 의례는 항상 죽음과 재생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 의례는 유아기 초기에서 후기로 이행하는 단계이든, 청춘기 전기에서 후기로 이행하는 단계이든, 아니면 청춘기에서 성인기로 이행하는 단계이든, 어떤 단계에서는 인생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옮겨 가는 ‘통과의례’를 신참에게 제공한다.

 물론 이러한 입문 의례는 청년의 심리학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개인이 삶의 새로운 발전 단계에 다다를 때마다 자기의 요청과 자아의 요청 사이의 원초적 갈등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사실 이 갈등은 성인기 초기에서 중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서유럽 사회에서는 35~40세)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중년기에서 노년기로 넘어갈 때도 개인은 자아와 마음 전체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이 무너져 가는 것에 대항하여 영웅은 자아의식을 방어하라는 마지막 임무를 받는 것이다.

 이런 결정적인 시기에 통과의례의 원형은, 세속적 성격이 강한 사춘기 의례보다 정신적으로 훨씬 만족스럽고 의미심장한 전환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맹렬히 기능한다. 이러한 종교적 의미에서의 통과의례의 원형적 패턴-옛날부터 비의(秘儀)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것-은 개인이 태어날 때, 결혼할 떄 또는 죽을 때 특별한 예배 형식을 요구하는 모든 교회 의식의 밑바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웅 신화를 연구할 때와 마찬가지로 통과의례를 연구할 때에도 분석가는 현대인, 특히 피분석가의 주관적인 경험에서 실례(實例)를 찾아야 한다.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오는 사람의 무의식 속에서,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 통과의례의 주요 패턴과 똑같은 이미지가 발견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주제는 고난, 즉 시련을 통한 힘의 증명일 것이다. 이는 영웅 신화를 암시하는 현대인의 꿈 내용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동일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가령 폭풍과 구타에 시달려야 했던 선원이라든가, 비 모자 없이 인도를 도보로 여행했던 사람의 적응력 시험이 그러한 예이다. 또 잘생긴 젊은이가 제단에서 인신공희의 제물이 되었을 때도, 육체적 고난이라는 이 주제가 앞서 이야기했던 첫 번째 꿈의 논리적 귀결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희생은 통과의례의 도입부와 비슷하지만 목적은 확실치 않다. 마치 새로운 주제로 이어지는 길을 트기 위해 영웅 주기를 마무리해 버린 느낌을 준다.

 영웅 신화와 통과의례 사이에는 한 가지 놀라운 차이가 있다. 전형적인 영웅상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설령 그 직후에 오만함 때문에 벌을 받거나 죽음당하더라도 일단 목적을 이루기는 한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통과의례를 거치는 신참은 개인적인 야심이나 모든 욕망을 포기하고 집단이 부여하는 고난에 빠질 것을 강요당한다. 그는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도 없이 이 시련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며, 심지어 죽을 각오도 해야 한다. 이 시련이 가벼운 것(일정 기간 단식을 하거나 이빨을 뽑거나 문신을 하는 것)이든 고통스러운 것(예를 들면 고통스러운 할례, 신체 일부를 절개하거나 절단하는 육체적 고통)이든 그 목적은 언제나 똑같다. 요컨대 죽음의 상징적인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재생의 상징적인 느낌을 경험하게 하려는 것이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204 발췌.


 ...이 상징적 의례 체험을 통해서 그는 배타적인 자율성을 버리고, 단순히 영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삶을 받아들였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228~p.231 발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징은 그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를테면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자극이 필요한 사람은 디오니소스교의 ‘천둥 의식’ 같은 격렬한 통과의례를 경험하고, 억제가 필요한 사람은 후기 그리스의 아폴론 신앙을 암시하는 신전이나 신성한 동굴의 규제에 몸을 맡긴다. 고대 문헌 자료나 현대의 의례 대상자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완전한 통과의례는 두 주제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통과의례의 근본적인 목적은 젊은이의 성격에 내재해 있는 ‘장난꾸러기’ 같은 거친 측면을 길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 필요한 의식이 아무리 과격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상자를 정신적인 문명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종류의 상징 체계도 있다. 아주 먼 옛날에 생겨난 성스러운 전통에 속하는 이 상징체계는 개인 인생의 과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상징들이 반드시 신참을 어떤 종교 교리로 끌어들이거나, 세속적인 집단의식에 동화시키려고 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 상징체계는 너무나 미숙하고 고정적인, 또는 지나치게 경직된 상태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필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좀더 뛰어나거나 성숙한 성장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상징은 인간 존재를 한정짓는 온갖 양식을 인간이 벗어던지게끔-또는 초월하게끔-도와준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어린아이는 완전성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아의식이 출현하면 어린아이는 이 감각을 잃어버린다. 성인이 되어 이 완전함의 감각을 되찾으려면 마음속 무의식의 내용과 의식을 결합시켜야 한다. 이러한 결합이 이루어지면 융 박사가 말한 ‘정신의 초월 기능’이 생겨난다. 이 기능을 갖춰야 인간은 비로소 자기의 가장 높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즉 개성적인 ‘자기’가 지닌 가능성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초월의 상징’은 이 목표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나타낸다. 이 상징을 통해서 무의식의 내용은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상징 자체는 말하자면 무의식의 내용의 생생한 표현이다.

 이러한 상징들의 형태는 다양하다. 이 상징은 역사 속에 나타나든, 인생의 결정적인 단계를 맞이한 현대 남녀의 꿈속에 나타나든 항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상징체계의 가장 오래된 단계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장난꾸러기’ 주제와 마주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장난꾸러기는 무법자 같은 영웅이 아니라 어엿한 샤먼이다. 놀라운 마력과 직관을 갖춘 그는 원시적인 통과의례의 대가(大家)이다. 그의 힘은 육체를 떠나 새처럼 이 세상을 날아다닐 수 있는 가상의 능력에서 나온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240 발췌.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에게 전해 내려왔거나 꿈속에 나타나곤 하는 상징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현대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억압의 상징과 해방의 상징 사이에 존재하는 해묵은 갈등이 우리의 현재 상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것은 이러한 상징의 심리적 의미가 아니라 단지 오래된 패턴의 특수한 형식뿐이다. 이 점을 인식하면 그것을 이해하는 작업도 한결 쉬워질 것이다.



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242 발췌.


 알다시피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험과 훈련, 악덕과 미덕, 자유와 안정의 갈등을 겪는다. 그런데 이 대립되는 개념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의 이중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말일 뿐, 이러한 갈등을 해소시킬 해답은 도무지 발견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해답은 있다. 억압과 자유가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통과의례에서 그 합류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의례는 개인에게도 집단에게도, 내부의 상반되는 힘을 결합시켜서 삶의 균형을 잡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례가 반드시 자동적으로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통과의례는 개인 또는 집단이 삶의 특정한 국면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새로운 삶의 양태로 해석하지 않으면, 그 순간은 그냥 지나가고 만다. 통과의례는 본질적으로 복종의 의례에서 출발하여 억압의 시기를 거쳐 이윽고 해방의 의례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겪어야 개인은 자신의 인격에 깃든 모순된 요소를 화해시킬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개인은 참된 의미에서 인간이 되고, 참된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주인다운 균형과 조화의 상태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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