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 외 - 인간과 상징 (동서문화사) p.30~p.34 발췌.


 ...프로이트는 꿈에 ‘자유 연상’ 과정의 출발점으로서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회의를 느꼈다. 잠자는 동안에 무의식이 만들어 내는 풍부한 환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유 연상 기법은 부적당하며 오류를 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동료 한 사람이 러시아에서 기나긴 기차여행을 하다가 겪은 일을 들려줬을 때부터 나는 그런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어를 몰랐고 키릴 문자를 해독할 줄도 몰랐지만, 철도 안내판에 쓰인 그 기묘한 문자가 왠지 흥미로워서 공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그 문자의 의미를 여러모로 생각해 봤다.

 그러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른한 기분에 젖은 채 그는 이 ‘자유 연상’이 낡은 기억을 무수히 상기시키고 있음을 느꼈다. 그중에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불쾌한 기억-잊고 싶다는 생각에 의식적으로는 잊어버렸던 것-도 있어서 그는 문득 괴로워졌다. 그는 실로 심리학자가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억압된 감정적 주제이자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며 많은 경우에는 신경증 증상까지 일으키는 그것과 맞닥뜨린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환자의 콤플렉스를 알아내려고 할 때 반드시 ‘자유 연상’ 과정의 출발점으로서 꿈을 이용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주위를 둘러싼 원의 어느 지점에서나 똑바로 중심점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러니까 키릴 문자뿐만 아니라 수정구슬에 대한 명상, 기도바퀴(prayer wheel: 마니차, 기도할 때 돌리는 바퀴 모양의 경전), 근대 회화, 또는 아주 사소한 일에 대한 잡담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출발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꿈은 다른 출발점들보다 더 낫지도 않고 못하지도 않은 보통 수단에 지나지 않지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사실 꿈은 만성 콤플렉스와 관련돼 있는 정서적 충격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만성 콤플렉스는 외부 자극이나 장애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음의 약점이다). 바로 그렇기에 자유 연상은 어떤 꿈으로부터도 그 사람의 중대한 비밀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까지 내 생각이 옳았다면) 저절로 도출되는 결론이 있다. 꿈에는 그 자체로 (단순히 콤플렉스를 가리키고 드러내는 것 이상의...) 특별하고 좀더 의미있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꿈은 저 밑바닥에 있는 생각이나 의도를 드러내면서 -비록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명확하고 의미심장한 구조로 나타날 때가 많다. 따라서 나는 ‘자유 연상’을 통해 관념의 연쇄 작용을 일으키면서 콤플렉스에 도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꿈의 실제 형태나 내용에 좀더 주목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어쨌든 다른 방법으로도 콤플렉스에 쉽게 도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새로운 견해는 내 심리학 발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말하자면 나는 꿈의 본디 내용에서 점점 멀어지는 연상 작용을 좇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나는 오히려 꿈 자체에서 연상되는 것들에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다. 무의식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특별한 내용이 꿈 속에 표현되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그 바탕이 되었다.

 이처럼 꿈에 대한 내 태도가 변하자 분석 방법도 변했다. 내가 쓰기 시작한 새로운 기법은 꿈이 지닌 다양하고 광범위한 측면을 모두 고려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의식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만 꿈은 꼭 그렇지는 않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꿈을 이해하려면 온갖 방면에서 살펴봐야 한다.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을 손에 넣어서 그 형태를 속속들이 파악할 때까지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뜯어보는 것처럼.

 프로이트가 처음으로 사용한 ‘자유 연상’ 기법을 내가 어쩌다 멀리하게 되었는지는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한 듯싶다. 나는 꿈 자체에 가능한 한 밀착하면서, 꿈의 실체와는 상관없이 꿈에서 파생되는 관념이나 연상은 모조리 배제하려고 했다. 물론 이런 관념이나 연상을 통해서 환자의 콤플렉스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신경증 장애를 일으키는 콤플렉스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큰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콤플렉스를 밝혀내는 방법은 그 밖에도 많이 있다. 이를테면 단어 연상 검사(주어진 일련의 단어를 보고 환자가 무엇을 연상하는지 조사하고 그 반응을 연구하는 방법)를 통해서도 심리학자는 얻고자 하는 자료를 모두 얻을 수 있다. 다만 한 개인이 지닌 전인격의 심리적 생활 과정을 알아내고 이해하려는 작업에서는 그의 꿈과 상징적인 이미지가 좀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이 세상에는 성적 행위를 상징하는 (또는 비유적인 형태로 표현한다고 여겨지는) 이미지가 얼마든지 있다. 이런 이미지들은 연상 과정을 거쳐서 성교에 대한 생각이나, 누구나 성적 태도 속에 지니고 있는 특정한 콤플렉스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콤플렉스는 판독할 수 없는 러시아 문자들을 보고 떠올린 백일몽을 통해서도 충분히 밝혀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꿈이 성적인 비유 말고도 더 많은 정보를 담아낼 수 있으며, 이런 현상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고 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관한 예를 살펴보자.

 한 남자가 열쇠 구멍에 열쇠를 찔러 넣는 꿈, 묵직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꿈, 거대한 망치로 문을 때려 부수는 꿈을 꿨다고 하자. 이 꿈들은 모두 성적인 비유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실은 그의 무의식이 스스로 어떤 목적에 따라 이런 특정한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열쇠, 몽둥이, 망치 중에 하나-를 골랐다는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몽둥이 대신 열쇠가, 망치 대신 몽둥이가 특별히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중요한 작업을 통해서 어쩌면 꿈에 나타난 것이 성적인 행위가 아니라 전혀 다른 심리적 문제임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추론 끝에, 꿈에서 명백하게 나타난 소재만을 사용해서 꿈을 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꿈은 자체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 특정한 형태는 무엇이 꿈에 속해 있고 무엇이 거기서 벗어났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런데 ‘자유 연상’ 기법을 쓰면 꿈의 소재에서 지그재그의 형태로 점점 멀어져 갈 뿐이다. 내가 쓰는 방법은 오히려 꿈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방식이다. 나는 꿈의 이미지를 중앙에 두고 그 주위를 돌면서, 꿈꾼 당사자가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을 전적으로 무시한다. 꿈을 분석할 때마다 나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자, 다시 꿈으로 돌아갑시다. 꿈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나요?” ...



p.56 발췌.


 ...이 꿈의 이미지는 상징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황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얼른 이해하기 힘든 은유법을 써서 간접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그것도 꽤 자주 일어나는데) 꿈이 그 의미를 의도적으로 위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감정이 담겨 있는 회화적 언어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72 발췌.


 ...어떤 사람들은 힘의 원천에 해당하는 본질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인데도 단지 꿈을 통해 ‘위장’되어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꿈이 상징적이라고 가정하는 이상, 우리는 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꿈을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 사람들에게 꿈의 해석이란 아무 의미 없는 작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새삼스레 찾아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p.86~p.88 발췌.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어째서 꿈은 좀더 솔직히 직접적으로 시원하게 할 말을 하지 않는 걸까?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았고 나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져 봤다. 꿈이 일부러 명확한 정보를 주지 않고 결정적인 점을 숨기면서 사람의 애간장을 태운다는 점에 대해서는 나도 자주 놀라곤 한다. 프로이트는 인간 심리의 어떤 특수한 기능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여 그것을 ‘검열기관’이라고 불렀다. 그는 검열 기관이 꿈의 이미지를 왜곡하여 인지하기 어렵고 오해하기 쉬운 것으로 변질시켜 버려서, 꿈꾸는 사람의 의식을 속이고 꿈의 참된 주제를 은폐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꿈꾸는 사람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숨김으로써 이 ‘검열 기관’은 불쾌한 생각이 주는 충격으로부터 잠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꿈이 잠의 보호자라는 이 이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꿈은 종종 잠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의식에 접근하는 과정에서는 마음의 잠재적 내용이 ‘지워버리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잠재의식 상태에서 관념이나 이미지는 의식 상태에서보다 훨씬 낮은 긴장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잠재의식 상태에서는 관념이나 이미지가 정의(定義)의 명확성을 상실한다. 그것들의 관계는 필연성이 약해지면서 모호한 유비(類比)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것은 합리성을 잃고 몹시 난해해진다. 이런 현상은 사람이 너무 피곤하거나 열병에 걸렸거나 중독되는 바람에 마치 꿈꾸는 듯한 상태에 빠졌을 때도 관찰된다. 그런데 이 느슨한 이미지들 가운데 어떤 것에 좀더 강한 긴장감이 부여되면, 그 이미지는 잠재적인 상태에서 다소 벗어나 의식의 영역에 가까워지면서 훨씬 명확히 정의되기에 이른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꿈이 자주 유비적인 표현을 쓰는 이유, 하나의 꿈 이미지가 다른 꿈 이미지 속에 섞여 들어가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깨어 있을 때의 논리적·시간적 척도를 꿈에 적용하기 어려운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꿈의 형태는 무의식의 본연에 충실한 것이다. 실제로 꿈이 산출해 내는 소재는 잠재의식 상태에서는 바로 그런 형태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꿈이 ‘인정할 수 없는 소망’으로부터 잠을 보호한다고 말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가 꿈의 ‘변장(變裝)’이라고 일컬었던 꿈의 형태는 실은 모든 충동이 무의식 상태에서 자연히 취하고 있는 본연의 형태일 뿐이다. 이런 까닭에 꿈은 명확한 사고를 산출할 수 없다. 만일 꿈이 명확해진다면 그것은 경계를 넘어 의식의 영역에 들어온 것이므로 이미 꿈이라고 할 수 없다. 꿈이 의식적인 마음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점을 빠뜨리고, 개기일식 때 나타나는 희미한 별빛처럼 오히려 ‘의식의 변두리’만 드러내는 듯이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꿈의 상징이 대체로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난 심리 세계를 그대로 표출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의미나 목적성은 의식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 전체에서 작용하고 있다. 유기체의 성장과 마음의 성장 사이에는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식물이 꽃을 피워 내듯이 마음은 상징을 창조한다. 우리가 꾸는 꿈은 모두 이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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