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부쩍 느껴오던 정체성의 비연속성이란 테마에 대해 뭔가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읽었던 책이다.
사고방식, 가치관, 감성, (감성에 기반한) 음악 취향(!) 등에서, (다른 사람도 그럴까 싶을 정도로) 극심한 대격변을 여러 차례 맞았던 나이기에.-_-
추억담이라든지 너 이랬었지 등등 과거와의 동일성이 상기될 때마다 불편하고 낯선 느낌이 든다. 그 진술들이 나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
좌파적, 선비적 사고방식이 무너지고 허무주의적 감성이 들어서면서, 과거의 가치관, 사고방식이 몹시 낯설게 느껴지지만.
but 그런 사고적. 의식적인 비연속성과 별도로. 미묘한 감수성과 정서의 패턴 측면에서는 여전히 (무의식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느낌도 있다.
어릴 때 알던 친구가 나를 본다면. 나로부터 그때 (익숙한) 그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너 변했다는 말부터 튀어나오지 않을까.

이 책은 자아에 관한 입장 중에 (직관적이며 쉽게 받아들여지는) 고전적 ‘진주 이론’에 반대하는, 소위 ‘묶음 이론’을 소개하는 책이다.
진주 이론은, 말 그대로 우리 자아의 중심에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알맹이, 소위 ‘나다움’을 규정하는 진주 같은 핵심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그게 육체 자체이든, 뇌이든, 기억이든, 비실체적 영혼이든 간에. 데카르트 식으로는 모든 걸 다 떼내고 남은 ‘생각하는 나.’)
이런 식의 생각 아래에서는. ‘본질인’ 핵심과 ‘비본질적인’ 곁다리가 분리될 수 있다. (힌두 등 신비주의적 사고에서. 무아의 경지 운운 하는 것들 등 - )
양파껍질 비유가 쉽게 와닿는데. 진주 이론에서는 양파 한가운데의 알맹이가 진정한 양파이고. 껍질은 다 곁다리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진정한 나(다움)를 찾아라.” 식의 슬로건들에서 보이듯. 굉장히 흔하고 자연스럽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고이기도 하다.

반면 묶음 이론은, 자아의 중심에 있는 불변의 본질 같은 건 없으며, 자아란 서로 공조하는 육체, 기억, 의식 등으로 통합된 구조물이라는 입장이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이런 생각들, 이런 생각들을 소유한 무엇과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은 이런 생각들의 모음일 뿐이다.”
양파껍질 비유에서 보자면, 오히려 양파 껍질들이 바로 나다. “...기억, 경험, 학습 같은 것들, 세월 속에서 축적된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다.”
이런 식의 생각 아래에서는, 자아의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분리해내려는 시도가 의미가 없어진다.
“자아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어떤 것... 개인의 여러 속성의 중심에 있는 변하지 않는 본질 혹은 실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컴퓨터가 단일 실체가 아닌 수많은 프로그램의 집합이듯 자아도 하나의 굳건한 실체가 아니며. 자아의 통일성은 그 산출물이지 그 기반이 아니다.

말하자면, 제목이기도 한 자아의 속임수란, 단일의 고정불변의 자아라는 건 복잡한 자아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user illusion이다, 라는 것.

우리가 느끼는 자아의 단일성이, 우리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상태로 남아있다는 게 아니다. “자기성(selfhood)은 동일성(sameness)이 아니다.”
우리는 유동적이며 항상 변화하는 무정형의 존재이므로, 시공간 내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아의 동일성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계속 같은 사람으로서의) “나는 누구인가?” 보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실존적 질문이 더욱 중요해진다.
그러니까, 속성 자체가 변하기에 우리의 정체성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자아를 보는 관점이 살짝 바뀐 것만으로도 이미 생각해 오던 것에 대한 (간접적인) 답을 얻은 것 같다.
나를 규정하는 자아의 불변하는 핵심이란 없기에, ‘나의 본질’이란 환상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동일성’에 기반한 정체성에 목맬 필요가 없다는 것.
자아는 원래 시시각각 변하므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건 지극히 당연하며, 이질적인 비연속감에 굳이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
비연속감에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인) 과거의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라는.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게 훨씬 낫다는 것.
또,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와의 연속성에 대해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무엇보다도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삶을 살자는 것.

어떤 책을 읽으면서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는 기분이 참 오랫만이다. 머릿속에서 일종의 (사상의) 교통정리가 이루어진 듯한 느낌이다.

p.s. 이런 관점의 변화가, 기존의 자아관에 가져오는 변화가 생각보다 격변스럽진 않다... 약간의 맥락만 수정하면 거의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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