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케빈에 대하여

Posted 2014. 1. 24. 05:54, Filed under: structured thinking/reviews
케빈에 대하여. 구독하는 다른 블로그에 같은 영화 리뷰가 올라오는 경우는 드문데. 유독 이 영화 리뷰는 서너 번씩 본 거 같다.
아기 울음소리에 인상 구기는 엄마를 보면서, 우리 고양이 새끼 때가 생각났다. 딱 저 모양새였다.-_ 행위의 정당성을 떠나서 심정이 100% 이해된다.
엄마가 부정적인 감정동요를 계속 보이니까 점점 아이의 통제감에 물이 오르는 것 같다. 열라 다루기 쉽겠지.
아예 감정을 숨기는 것도. 그렇다고 감정을 터놓고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엄마에게서 일종의 수동공격적 행태가 보이는 것 같다.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아이 팔 부러뜨린 걸로 엄마를 조작하려 드는 장면. 저런 유치한 조작에 휘둘릴 정도로 엄마는 불안정하다. 자존감이 바닥이다.
사과조차도 솔직하지 못하다. 열라 사무적이다.-_ 눈도 안 마주치고. 딱딱한 말투에 그게 잘못된 행동이라서 미안하다가 뭐냐.

...엄마의 문제와는 별도로. 어떻게 그런 뒤틀림을 16살이 되도록. 까먹지도 않고. 하루하루 매일같이 안고 살아갈 수가 있는 거지.-_
일반적 의미에서. 케빈의 삶에서 (엄마 외에?) 의미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야말로 무의미. 허무의 절정이다. 근본적으로 존재 자체가 뒤틀려 있다.
이 모든 걸 전부 엄마 탓으로 돌리겠다는 건 너무 가혹하다. 모든 건 양육 탓이다 식의. 잔인할 정도로 단순하고 뻔한 클리셰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게 문제다. 이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은데... 맥락도 비슷했던 것 같은데.
아빠가 여동생과 놀아주는 원투쓰리.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수면을 터치는 장면. 이게 케빈의 심리가 (그나마)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신이 아닌가 싶다.
결국 자기 스스로 뭔가를 깨부수는 거다. 그게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하든 아니든. 허무. 무의미의 극단에서 현상유지를 포기한 거다.
(...굳이 의미부여를 하자면. 엄마는 그 물에 그냥 얌전히 얼굴을 담근다. 표정이 썩어 있고.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지만.)

결국 케빈 입으로는. 지독한 허무를 드러낸 것 외에 아무 것도 말한 게 없다. 이 영화를 보고 케빈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모든 시점은. 케빈 엄마의 시점이다. 이런 시점에서는 언뜻 모든 게 다 엄마 탓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정작 케빈과는 말조차 제대로 해 본적 없다.

영화를 보면서. 으레 그렇지 하는 수준을 넘어선. 극단적 케이스로서의. ‘부모 뜻대로 안 되는 자녀’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안 낳아봐서 실감은 안 가지만. 하다못해 심즈를 하더라도.-_ 아이는 특별하다. 아이가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건. 결국 인생(의 일부)이 뜻대로 안 된다는 것.
굳이 아이에게 과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더라도. 삶의 의미까진 아니더라도. 부모로서 굉장히 의욕떨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 고양이가 나한테 끝까지 정을 안 주고 수년간 케빈처럼 적대적으로 일관했다면. 내가 계속 데리고 있었을까. 아마 바로 내쳐버렸겠지.
가정이나 육아에 대한 환상이 없을 뿐더러. 나를 닮은 2세를 갖는다는 게 상상이 안 간다.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원작 소설이 있다는데 다음에 책 살 때 같이 구입할 예정이다.

'structured thinking > reviews'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 중후반기 독서 기록  (0) 2014.08.18
영화, 겨울왕국  (0) 2014.01.24
영화, 파이트 클럽  (0) 2014.01.23
영화, 블랙 스완  (0) 2014.01.22
Respons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