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영 - 한국의 샤머니즘과 분석심리학: 고통과 치유의 상징을 찾아서 (한길사) 中 입무과정: 샤먼이 되는 길 p.66-p.82 발췌.


 1) 고통의 의미


 샤머니즘의 입무과정이 적힌 여러 문헌에는 샤먼이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지적하고 있다. 샤먼이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시베리아 샤먼뿐 아니라 1930년대 우리나라 무당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샤머니즘에서 이와 같은 고통은 입무 시 신체의 해체(뜯김)라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야쿠트족(Yakut)의 한 샤먼은 말했다. 장차 샤먼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대개 누구나 ‘죽음’을 겪어야 한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사흘 동안 막사에 누워 있게 된다. 다른 한 샤먼은 샤먼이 될 후보자의 사지가 잘리고 쇠갈구리로 분리되는 입무의식을 보고했다. 살덩어리는 뜯기고 액체는 버려지고 뼈는 깨끗이 씻기며 눈알은 뽑힌다. 그 뒤에 모든 뼈가 수집되고 다시 쇠로 묶인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샤먼 후보자는 내내 호젓한 곳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혼자 누워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 마술사들은 입무수술을 하는데, 모든 기관이 제거되고 그 자리는 결정(結晶)으로 메워진다. (이상의 체험은 대체로 환상이나 꿈에서 겪은 것들이다. 원시부족에게 환상이나 꿈의 체험은 실신, 신체적 동통, 정신적 해리와 마찬가지로 구체적 현실이나 다름없다.)

 한국무속에서도 무당이 될 사람은 병고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많은 예가 발표되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무당이 될 사람은 몹시 앓는데 그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다. 사람을 피하여 방 안에 들어박힌다. 그래서 피골이 상접해질 정도로 쇠약해진다. 그러다가 별안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생겨 한겨울에도 눈 내린 들판을 맨발로 달려 나가 미친 듯 춤을 추어 엑스터시 상태에 빠진다.

 원시민족의 성인식, 샤먼이 되는 과정에서도 어느 종족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고통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문제는 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점인데,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현저하다. 물론 야쿠트족은 이 몸서리치는 고통을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하며 정령들에게 해체의 고문을 중지해달라고 빈다. 그러나 정말 소명이라면 고행을 참고 견딘다. 이와 같은 고통을 많이 체험하면 할수록 종족으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 야쿠트족의 경우 큰 샤먼은 해체를 세 번 거치는데, 그에 비해서 작은 샤먼은 오직 한 번만 거친다는 믿음이 있다. “그는 세 번 몸이 찢겼다”는 말은 그가 큰 샤먼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의 이른바 강신적 입무과정에서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비교적 소극적이다. 무당의 사회적 지위, 사회집단의 의식구조, 신령에 대한 무속 사회의 의미 규정 등과 관련시켜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야쿠트족이나 다른 종족들이 입무의 잔인한 고통을 참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신의 소명에 따른 성스러운 고통이기 때문이다. 또 신령이 주재하는 이와 같은 고통은 특수한 힘, 즉 천상과 지하계를 날 수 있으며 병자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고통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정령이 힘의 원천이라는 생각이 우리나라 무속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북아메리카에서는 더 확실히 각인되어 있다. 고통은 바로 다른 신령들처럼 구체적이고 때로는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되어 있다. 그것은 질병의 원천이기도 한 동시에 힘의 원천이다. 에스키모족은 입무고행으로 이끌어줄 정령을 만나기 위해서 어두운 굴속으로 들어가 며칠씩 굶기도 한다.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샤머니즘에서 고통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는 샤머니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심리적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 기술문명은 고통을 해소하는 데는 지대한 공헌을 했으나 그것을 극복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고통이란 열등한 것이어서 없애야 하는 것이라는 전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의학 특히 정신요법의 임상적 체험에서는 고통의 의미에 대한 과소평가가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심인성 신체반응에 속하는 환자 가운데 100년 전 시베리아에 태어났더라면 샤먼이 될 병이라고 했을 법한 증상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다. 실제로 ‘신경증’ 환자들의 병고는 하나의 소명이다. 여기서 소명이란 낡은 생활태도를 새로운 생활태도로 바꾸어야 한다는 점에서 소명이다. 고통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으나 ‘노이로제’ 환자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고통의 대상을 지엽적인 곳에 투사한다. 분석적 정신치료의 목적은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환자에게 깨닫게 해주는 데 있다.

 융이 말한 대로 ‘신경증’이란 그 의미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심혼의 고통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심혼의 고통에서 모든 정신적 창조가 출현하여 정신적 인간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융은 말한다. 여기에 의사가 환자에게 고통의 정신적인 의미를 전달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환자가 요청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념은 결코 현대인의 발견이 아니라 샤머니즘 속에 이미 싹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행의 방법: 해체


 샤먼 후보자들이 환상이나 꿈속에서 체험하거나 실제로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무참한 해체과정은 심리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와 같은 생각은 진정 그들의 육체가 실제로 절단되었다가 다시 재생되는 구체적 사실을 말해주는 게 아니다. 물질적 분해가 아니라 무의식의 심적 체험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목이 잘리고 사지가 절단된다는 것은, 나와 동일시된 어떤 것이 산산조각이 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의 해리과정(dissociation)이다. 이 상태는 분열병적 상태와 비길 수 있다. ‘정신’이란 우리가 흔히 믿는 것처럼 항상 잘 통제되는 단일구조라기보다 분할 가능한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세계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의식의 세력이 증대하면 의식은 여러 가지 인격으로 해리될 수 있다.

 해체과정은 정령(무의식적 콤플렉스)에 의한 자아의식의 해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아의식의 죽음, 즉 무의식화를 초래한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정신적 위기이다. 해체의 모티브는 반드시 샤머니즘의 입무과정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완성에 이르는 길에서 만나는 전환기적 위기는 흔히 해체(갈기갈기 찢김)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융은 「미사에서 본 변환의 상징」에서 연금술사였던 초시모스(Zosimos)의 환상을 가톨릭에서 드리는 미사의 한 과정과 비교했다. 이 환상 속에는 샤먼들이 구체적으로 체험한다고 믿는 해체현상이 일어난다. 융은 이것을 샤머니즘의 해체과정이 샤먼 후보자를 새롭고 더 활성화된 인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처럼, 초시모스가 재생의 상징을 정신적으로 체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해체의 모티브는 샤머니즘이나 연금술 이외에 힌두교의 의식, 오시리스(Osiris) 신화, 디오니소스, 또는 티베트 죽음의 서 가운데에도 나타난다. 죽음과 부활이 문제가 되며, 전환과정이 중요해질 때 이 현상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이 민간설화 혹은 개인의 무의식 속에 나타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저자가 일하던 스위스의 한 정신과 병원에 입원한 60세 된 네덜란드 태생의 여자 분열증 환자는 식도와 내장이 악령들에 의해서 찢겨나가고, 따라서 몸이 텅 비었다고 호소하였다.

 “나는 죽은 몸입니다. 나는 텅 비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마술을 할 줄 알지요? 내 목을 떼고 나를 진정으로 죽여주세요. 내 목을 수술해 주세요. 나는 죽고 싶으나 죽을 수가 없어요.”

 입무의 고통과 다름이 없다. 진정한 ‘죽음’을 통한 진정한 ‘부활’. 새로운 인격형성에 대한 무의식적 희구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 환자가 말하는 죽음이란 구체적인 죽음이며 인격 변환으로서의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신분열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징의 구체화(본래 상징은 그 의미를 말로 남김없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인데 이것을 잘 알려진 구체적 사물이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즉 상징symbol을 기호sign으로 파악하는 것이다)가 이 환자의 생각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이 새로운 자아로의 변환을 일으키는 중요한 기회라는 것을 모른다. 진실로 죽을 수 없는 사람은 진실로 살 수도 없다. 샤먼은 그러나 죽음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산산히 부서진다. 그리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부활한다.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심연에 잠겨 있는 상태는 정신병적 상태이다. 그러나 죽음을 극복하고 나면 이 정신병적인 고뇌와 지리멸렬한 정신상태는 인간이 새로운 인격으로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음을 알 수 있다. 낡은 자아가 죽지 않고 새로운 자아로의 전환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해체와 죽음이 부활로 인도되는 것은 아니다. 야쿠트족의 한 샤먼은 이렇게 보고했다.

 “여기서는 샤먼의 목을 자른다. 머리를 막사의 벽판에 건다. 이때 그는 살아 있어야 한다. 의식을 지키고 심지어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한다.”

 다른 보고에는 이렇게 썼다.

 “먼저 정령들은 내 머리를 잘라 기다란 막대기에 꽂는다. 정령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본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말이다. 이 두 이야기는 위험한 정신착란 상태에서도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고통이 아무리 심해도 그것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강한 자아의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무의식의 여러 가지 문제를 소화시키는 데 어느 정도 분화되고 든든한 자아가 불가결하다는 분석적 정신요법의 진리를 샤먼들은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죽지 않는다”는 우리나라의 속담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일깨운다.

 고통 속에서 깨어 있는 것, 이런 주제가 ‘샤머니즘’에 얼마만큼 널리 퍼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공식적인 입무제를 다시 한 번 지내는 것은 진정한 ‘죽음’과 ‘부활’을 다시 한 번 가르쳐주는 기회를 부여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제대로 괴로워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입무과정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현대의 분석가 수련과정과 비슷한 점이 많다. 분석(analyse)이란 분석심리학에서는 고통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연속적인 변환과정이나 다름없다. 무의식의 세력은 분석을 통해서 활성화되기 때문에 약한 자아(ego)의 소유자는 분석과정 중 실제로 무의식의 콤플렉스에 지배받기 쉽고 때로는 해리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위험한 자율적 심상군이 나타나면 조심해서 다루거나 사람에 따라서 계속 분석해서는 안 될 때가 있다. 무의식의 여러 심상을 이해하려면 감정적인 체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내용을 소화할 수 없다. 샤머니즘의 특징은 이와 같은 감정적 기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하는 데 있다.

 입무고행에 대해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는 대단히 합목적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후보자의 ‘살’은 질병의 정령과 불행의 정령에게 나누어준다는 보고가 있다. 병귀에게 줄 살이 모자라면 그것을 취하지 못한 귀령의 병은 고칠 수 없다. 정령과의 일종의 성찬이 가지는 심리학적 의미는 분석가의 수련에서 항상 강조되는 감정적 소화, 즉 경험을 통하여 무의식의 내용을 자신의 피와 살로 소화시키는 체화과정이다. 샤먼 후보자는 몸소 질병의 성질을 체험해야 한다. 이와 같은 면은 치료자가 먼저 자기의 무의식의 내용을 소화시켜야 한다는 분석가의 수련원칙에서 볼 수 있다. 교육분석이라 부르는 심리학적 작업을 위해 샤먼은 입무체험을 통해 그 주재자인 ‘정령’의 지도를 따른다고 할 수 있다.



 3) 골격으로의 환원: 해체(찢김)와 먹힘


 해체의 궁극적인 목적은 골격(骨膈)으로의 환원이다. 그보다 더 작은 해체는 없다. 골격은 원시인에게는 최소단위, 그 이상 분화할 수 없는 생명의 요소이다. ‘뼈’는 파손되어서는 안 되며 잃어버려서도 안 된다. 만일 잃어버리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와야 하는데 이때 그 다른 사람은 죽는다. 그러므로 뼈는 다시 살아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엘리아데의 풍부한 예증과 비교를 통한 설명은 뼈의 심리학적 의미를 거의 비슷하게 묘사했다. 엘리아데가 생명의 원리, 생명의 최후 원천이라고 할 때 이 말은 그대로 심리학적 이론에 적용된다. 나아가 뼈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영원불변의 창조적 원천의 상징이며 영혼의 근원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골격으로의 환원은 일종의 영화(靈化)과정이며 육(肉)적인 것, 물질적인 것, 세속적인 것의 지양이다. 에스키모 샤먼에서 해체과정이 아니라 금욕과 단식, 정신집중을 통하여 스스로를 골격상태로 바라보는 행위는 중앙아시아의 샤머니즘이나 불교의 탄트라 요가의 명상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은 한국 샤머니즘에서는 극도의 자폐, 질주, 광분, 엑스터시와 실신, 허주굿, 내림굿의 순서로 대치된다. 입무제 없이 엑스터시 뒤에 신어머니에게서 굿을 배우거나 스스로 굿을 하기도 한다.

 엘리아데가 『재생의 비의』에서, 해체는 목축민족에게 특이한 것이고 농경민족에서는 흔히 먹힘이 이니시에이션의 모티브가 된다고 한 말은 흥미롭다. 하나의 씨앗이 대지의 품속에서 죽어 다시 싹이 트듯이, 혹은 신화나 전설에서 영웅이 거대한 괴물이나 짐승에 먹혔다가 다시 살아나듯 ‘먹힌다’는 것은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 죽음에서 새로운 자아로 재생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해체의 주제와 그 목적을 같이한다.

 즉, 같은 목적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이다. 하나는 ‘해체’를 통하여, 다른 하나는 짙은 어둠에 휘감겨 싸우며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얼’로 축소되는 것이다.

 


 4) 저승으로의 여행


 입무의 고통을 극복한 샤먼은 여러 가지 능력을 획득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천상과 지하계를 향한 마술적 비상력(飛翔力)이다. 그것은 수호신을 만나거나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데리고 가는 등의 목적으로 수행된다. 이와 같은 저승으로의 여행은 이미 입무과정 가운데 엑스터시의 경지에서 경험된다. 저승으로의 여행은 엘리아데에 의하면 샤머니즘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나라 샤머니즘에서는 이와 같은 ‘저승으로의 여행’이 체계적으로 키워진 것 같지 않다. ...시베리아의 샤먼이 하늘로 날아갈 때 우리 무당은 하늘을 향하여 빈다. 하늘은 그만큼 감히 침범할 수 없을 만큼 우리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빌면 와주는 인자한 존재이기도 하다. 시베리아의 샤먼이 ‘나’(자아의식)의 의지를 앞세우는 마술적이고 능동적인 특징을 보여준다면, 우리나라의 무당은 자아보다도 ‘하늘의 뜻’을 생각하는 종교적 경향과 수동적 태세를 보여준다고 할까.

 저승으로의 여행, 이것은 잃어버린 세계에 도달하려는 인류의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이며 분열에서 전일(全一)로, 좁은 세계에서 넓은 세계로 향하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표현이다.


 샤머니즘은 현실의 제약을 뚫고 영원으로 향하고자 하는 모든 사회적 현상, 개인적 갈등 속에 숨어 있다. 의식의 제약을 뚫고 무의식의 세계와 통하려는 인간의 노력, 망아상태가 일어나는 모든 현상 뒤에 샤머니즘이 있다. 마리화나를 피우며 환상의 세계에 탐닉하는 히피족 뒤에, 유사종교의 엑스터시 발작 뒤에, 최루탄과 싸우며 거리를 밀고 도는 흥분한 학생집단의 체험 속에, 심지어 알코올 중독자의 엑스터시 뒤에도 샤머니즘은 있다. 현대문명의 합리주의적 일방성 때문에 잃어가는 그 세계, 저승으로 가고자 하는 동경의 몸부림이다.

 그러나 샤먼은 방황하는 몽환자가 아니다. 그는 저승에 가지만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다. 이 능력은 입무의 고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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