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영 - 한국의 샤머니즘과 분석심리학: 고통과 치유의 상징을 찾아서 (한길사) 中 얼기설기 발췌.


p.311-

 샤먼들이 경험하는 가역적 빙의... 자아의 의지로서 무의식에 대한 집중을 통해 자아를 넘어서는 원형의 세계와 접촉하고 거기서 다시 현실로 되돌아올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신비가들은 ‘사로잡힌’ 채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상들의 뜻을 찾아내고 그것을 현실로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p.124-

 입무자는 빙신과 말문 열기가 가능해진 순간 마술사가 된다. 다시 말해 마력의 소유자, 마나 인격이 된다.

 기독교를 비롯한 불교·도교의 성직자 역시 일시적으로 마나 인격으로 변하거나 행세한다. 혹은 그러한 신도에게 투사를 받을 위험에 처한다. 그러나 샤먼은 서슴없이 몸소 실천한다. 아니 그렇게 되는 것이 내림굿의 목적이다. 그러나 샤먼은 항상 마나 인격으로 행세하지 않고 빙신된 순간 신령이 되어 신령의 말을 전할 뿐이며 그 뒤에 신령들은 다시 하늘로 보내진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곧 신령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모든 초인적 능력은 신령과의 접신을 통해, 신령의 도움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마술사와 샤먼의 중요한 차이이다.


p.196-

 수호신이 누군가에게 내릴 때 그는 형용하기 어려운 오싹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나라 만신도 같은 말을 한다. “갑자기 몸이 저릿저릿해지고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은 느낌이 오면 어떤 센 힘에 이끌리듯 뛰어올라가 작두를 탄다.”


p.280-

 패티슨(E.M. Pattison) 등은 신앙치료의 실례를 조사하였는데, 환자의 치유 혹은 치유되었다는 느낌(perception of healing)은 그 병의 기질적 병리(病理)나 증세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그들의 신앙체계와 그 삶의 양식(life style)을 재강조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실증했다.

 키에브도 데브러(Devereux)의 말을 인용하여 샤먼의 치유는 엄밀히 말해서 현대 정신의학적 치유(psychiatric cure)가 아니라 일종의 교정적인 감정적 체험(corrective emotional experience)으로서 진정한 병식(病識)이 없는 방어의 재배열(repatterning)을 유도하는 것임을 시인하였다.


p.285-287

 샌드너(Sandner)... 나바호 인디언의 메디슨맨... “메디슨맨은 항상 환자의 무의식에 직접 작용하는 ‘상징’을 조작함으로써 치유를 유도하며, 환자의 고통과 혼란스런 체험에 의미와 질서를 주며 그 ‘상징’을 받아들일 때 환자는 치유된다.

 융학파의 원로 정신과의사 마이어(C.A. Meier)는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고대 그리스에서 활발히 실시된 사원수면(incubatio)의 치병과정과 현대 정신요법과의 관계를 분석심리학적 입장에서 논했다. 그 치료효과의 핵심은 꿈에 의신(醫神) 아스클레피우스(Asclepios)를 만나는 데 있다. 오랜 기다림 뒤에 -환자는 그때까지 사원의 일정한 장소에서 잠을 잔다- 아스클레피우스가 환자에게 현몽하여 치료에 대한 지시를 전달하거나 환자 꿈에 보이기만 해도 병은 쾌유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1965년 그리스 에피다우로스(Epidauros)에 있는 아스클레피우스 사원의 작은 전시관에서 환자가 병의 치유에 감사하여 신에게 바친 수많은 석상 및 비석(votive offerings)을 목격한 일이 있다.

 한국민간치료의 역사 가운데서도 꿈과 그 꿈에 나타나는 치료신의 역할은 그리스인들의 꿈에 나타난 의신의 역할이나 그 치료과정과 심리학적으로 동일한 현상에 속한다. ...이러한 의신들은 결국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치유능력의 형상적 현시, 즉 치유자 원형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처병의식의 참가자가 샤먼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임을 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이와 같은 원형상을 샤먼이라는 인간 속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며, 샤먼의 절대적인 권력을 높이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참여자의 마음을 자극하여 치료자 원형상이 활성화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무의(巫儀)의 참가자들도 무당에게 평범한 부모의 상뿐 아니라 신화적인 의미의 초인적 구원자의 상을 투영하여 대인관계가 아닌 하나의 신인(神人)관계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현대의 정신치료에서 흔히 일어나는 전이현상(transference)도 사실은 환자의 개인적인 과거 감정의 재현을 넘어서서 항상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원형의 투사를 뒷받침한다.

 다른 한편, 무당이나 샤먼은 정신치료자가 환자의 이와 같은 특수한 투사작용을 환자로 하여금 심리학적 문제로서 소화시키도록 하는 데 비해서 환자나 참여자들이 투사하는 원형상에 스스로 자신을 동일시한다. 달리 설명하자면 이들은 참여자가 투사하는 원형상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일치하는 자신의 마음 속의 원형상을 적극적으로 불러내 그것과 일체가 되어 행동함으로써 참여자 자신이 내면의 치료자원형들과 접촉할 수 있게 해준다. 무당이나 샤먼들은 조상이 되고 옥황상제가 되고 손님이 되고 시왕(十王)이 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무의식적 상징인 치료자원형과 하나가 된다. 인간인 그가 스스로 신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형상의 투사와 원형상의 적극적 수용이라는 두 가지 작용이 그 극치까지 진행되는 것이 굿 혹은 샤머니즘 제의(祭儀)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 치료자 원형상의 투사란 아무런 근거 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샤먼이 그러한 것처럼 무당은 범속한 사람과 달리 고행을 체험한 사람이며 그를 극복한 사람이며 또 범속한 성(性)의 분극(分極)을 극복한 사람이다. 연극이든 진실이든 그는 망아상태를 통하여 저승의 존재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저승에 대하여 알며 그 기능을 조절할 수 있다.

 한국의 무당은 치병의식이든 다른 명목의 의식이든 제의 도중 종종 자기의 고통을 최대한 반추한다. 이 재체험의 강도와 진실성에 따라서 환자나 참가자에게 주는 영향의 정도가 다르다.


p.551-

 주무는 휴식·식사시간에 자주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병굿 날짜를 잡아놓고 나서 꾸었던 꿈과 등장했던 사람의 생김새, 특징 등을 얘기하면서 병자와 가족들에게 누구인지 물어보고 확인한다. 확인되면 그것을 병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고 공수에 이용한다. 다소 특이한 과정이다.


p.554-

 또한 무당은 환자의 병에 관여한 원혼을 굿하기 전 꿈에서 본 인물상이나 환자의 꿈에 자주 나오는 인물에서 얻으려고 한다.


p.571-572.

 한국 샤머니즘에서 정동성의 주된 대상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 죽은 가족의 사령에 얽힌 감정적 콤플렉스, 한마디로 ‘조상 콤플렉스’이다.

 ...한국 샤머니즘의 치료 구조의 핵심은 바로 죽은 이를 포함한 이 가족 콤플렉스라는 사실을. 무당을 찾는 손님들은 가족 및 조상 콤플렉스의 자극에 감정적으로 흔들린다. 여기서 정신치료적인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p.678-

 샤머니즘 문화는 전이를 쉽게 일으킬 수 있는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430-

 한恨이란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다. 완전히 연소되지 못한 감정이다. 이를테면 ‘남은 말’, ‘못 다한 말’이다. 그러므로 산 자를 괴롭히는 원령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그 노여움을 풀기 위해 제사나 굿이 끊임없이 계속된 것은 삶이 삶답게 살아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삶이 완성될 때, 감정이 충분히 소화되었을 때 거기에는 남는 것, ‘미련’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바로 삶의 완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원령에 대한 여러 가지 민간의 제의와 금기 등은 결국 못 다한 삶을 완성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한이란 감정적 잔재이며, 그것이 있는 한, 그 외계로의 투사인 원령과의 관계는 끊기지 않고 유지될 것이다.
 원령은 제대로 대우받고 매장되기를 희구한다. 다시 말해서 합당한 질서 속에 안주되기를 원한다.

p.461-

 죽은 자의 한은 산 자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는 아직 충분히 연소되지 못한 잉여감정이다. 이것은 죽은 자가 완전히 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그 원한이 살아 있는 사람을 괴롭힌다는 우리나라 민간의 관념과 일치된다. 야쿠트족이 생각하듯이 죽은 자는 죽은 뒤에도 영혼이 되어 옛집 주변을 서성거리는데 그는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채 내버려둔 일을 완성해야 한다. 영혼은 ‘다시 죽기 위하여’ 그렇게 서성거리는 것이다. 다약Dayak 족에서는 세 번 혹은 일곱 번 죽는다. “비겁한 자는 여러 번 죽지만 용감한 자는 한 번 죽는다.” 어느 서부영화의 대사처럼 사령의 ‘한’은 삶의 작업의 미완성에 대한 ‘한’이다. 동시에 그 완성을 추구하는 목적을 지닌 감정적 콤플렉스이다. 이 삶의 완성은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심리학적 의미의 완성을 말한다.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화함으로써 분열된 마음을 통일로 이끌어 전체정신, 즉 자기로 돌아오게 하는 과정을 말한다. 무당이 이와 같은 한을 망령의 입을 통해 산 자에게 체험시키는 행위 뒤에는 그러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넋두리에서 무당의 역할은 분석적 치료자가 피분석자의 고통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찾아 그에게 전해주는 역할과 비슷하다. 우리나라 무당도 샤먼처럼 때로는 영혼의 인도자이다.


p.485-

 산 자의 입장에서 볼 때 죽은 자와 다시 만나는 추체험(追體驗)은 무엇보다 죽은 자에 대한 원초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여 표현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는 ‘죽음’을 완성해야 한다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저승으로 가기를 꺼려 언제나 이승에 돌아오고자 하는 죽은 자는 앞에서 말하였듯이 사실 ‘아직 완전히 죽지 못한 자’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방황하고 죽을 ‘장소’를 완전히 찾지 못한 영혼은 대체로 한을 가진 혼들인데 이 혼을 구체적 현실로 보든, 상징적인 심적 현실로 보든 산 자나 의식세계의 기능을 마비시킨다. 그러나 이 영혼의 방황은 오직 산 자를 괴롭히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삶의 ‘나머지’를 제대로 살아서 진정으로 죽기 위한 것이다.


p.484-

 산 자가 죽은 자의 인형을 만드는 데는 유감주술(sympathetic magic)의 목적도 크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산 자를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사령을 보이게 만들고 이것을 뚜렷한 형상 속에 붙잡아두는 데 목적이 있다. 우리가 해롭다고 느끼는 것은 대개 우리가 그것을 잘 알 수 없을 때 일어난다. 즉 무의식적인 요소들처럼 보이지 않고 알 수도 없으나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 이것이 보이게 될 때 그 해로운 작용은 자아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다. 보인다는 말은 심리학적으로 이미지로서 인식된다는 말과 같다. 이는 융학파의 정신치료에서 무의식의 원형상들을 그림이나 조소형태로 표현하도록 권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의 상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의 환상과정(imagination)이다. 무의식의 내용이 이것으로 표현되는 동시에 그림 그리는 자아와 그 소재인 무의식의 내용 사이에 대화가 성립된다.


p.392-

 저승길은 매우 멀고 험하며 숱한 장애물이 가로막혀 있다. 그때마다 장애를 이기는 처방을 받아 극복해야 한다. 돕는 자, 안내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주인공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모험이다.


p.398-

 흔히 민담에서 이니시에이션의 주재자가 주인공에게 불가능한 과제를 부여하고 결국 초인적 능력의 도움을 받는 것처럼...


p.435-437 

 입무 주재자로서의 사령... 샤머니즘에서는 사령이 그 해로운 작용을 통해서 장래의 샤먼을 단련하는 입무의 주재자 역할을 한다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다. 입무 주재자는 반드시 사령이 아니고 동물이나 다른 귀신일 수도 있으나 사령이 산 자에게 주는 고통에 그와 같은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은 샤머니즘의 독특한 관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샤머니즘에서는 대체로 죽은 자가 주는 고통은 신력(神力)을 획득하는 중요한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사령은... 병고와 고문을 주는 무서운 존재이나, 동시에 고통을 통해 진정한 치료자, 샤먼 혹은 메디슨맨으로 단련시키는 권위 있는 스승의 역할을 한다.

 고통과 질병의 의미는 샤머니즘의 입무과정처럼 높이 평가받는 데가 없다.

 시베리아 민족들, 특히 에스키모족에서는 죽은 자의 마력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강했다. 죽은 자와 귀령들을 만나기 위해서 무덤 옆에서 잠을 자거나 동굴에서 며칠씩 굶거나 특수한 약초를 씹으며 귀신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p.596-

 샤먼은 스스로 많은 병귀에 먹혀야 하고 해체의 고문을 여러 차례 겪음으로써 위대한 치료자의 조건을 구비한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샤먼이 되는 기본적인 전제조건인 셈이다. 한국의 무당, 특히 강신무도 상처 입은 자이다. 무조 바리데기 또한 버림받는 상처를 겪었다.


p.582-p.584

 의신(醫神) 혹은 영웅신화를 보면 이들은 스스로 상처를 입었지만 이를 극복한 사람들이라는 점이 강조되거나 어린 시절에 박해를 받고 죽음의 위험에 던져졌다가 숱한 고행 끝에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 제시된다. 원시사회의 이니시에이션의 고통이 어른이 되기 위한 것이라면 샤먼 후보자의 시련과 고통은 신성한 치료자가 되도록 하는 소명으로서의 목적의미를 가진다. 인격의 창조적 변환을 위해 거쳐야 할 고통이다.

 한국의 샤머니즘에서 무엇보다 이러한 치료자원형상의 전제조건인 시련과 고통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무당들이 조상의 이야기라고 알고 있는 ‘바리공주’(혹은 바리데기)의 무조 전설이다.


 무조신화는 바리데기 유형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같은 유형의 설화는 한국 샤머니즘의 여러 신화적 내용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라 할 수 있다. 불교적·도교적 색채를 강하게 풍기는 이 이야기는 그 이념에서 상당히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회생시킬 수 있는 능력과 죽은 넋을 저승에 보내는 영혼의 인도자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초인적 권능은 결코 우연히 혹은 학습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승으로부터 ‘버림받음’, 죽음에 이르는 고행, 수도로써 획득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조건은 다른 민족의 신화나 종교적 표상에서 치료자원형상과 그 갖추어야 할 조건에서 일치한다. 바리데기는 모든 인류의 무의식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치료자원형의 한국적 유형이다.

 가부장사회의 기존질서와 가치관에서 배척되고 버림받는다는 것은 철저한 고독, 혹은 고립, 사회적 자아, 즉 페르조나의 죽음이다. 이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며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비통상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창조의 주역들은 창조작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먼저 사회집단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했다. 그리고 한국의 샤머니즘 신화는 이 시련의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춘향·심청·황진이... 이들이 영웅으로 인정되는 것은 모두 이들이 겪은 고뇌의 의미를 높이 사고 있기 떄문이다. 고뇌를 겪지 않은 자의 넋은 한국 샤머니즘의 신들의 계열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만약 들어갔더라도 무당이나 참여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한다. 결국 잊혀진 신(deus otiosus)으로 다만 신의 족보에만 올라 있을 뿐 별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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