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J. Wallin - 애착과 심리치료 (학지사) 中 발췌.


p.7-

 이 책의 출판 여정은 ‘심리치료가 어떻게 사람들을 변화하게 하는가?’ 단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p.15-

 관계를 통해 변화를 도모하는 치료의 모델... 이런 관계는 탐색과 발달 그리고 변화를 위한 필수조건인 안전 기지를 제공하여 환자가 스스로 느껴서는 안 된다고 여겨 온 것을 느끼고, 알아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것을 알아보는 모험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안전감으로 인해 치료적 관계는 환자가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그리고 아마도 표현할 수 없었던- 부정되거나 분열된 경험에 접근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할 수 있다. 분열되고 언어화되지 않은 감정과 사고 및 충동에 접근하며 분명하게 말로 표현하고 성찰하는 것은 환자의 ‘이야기하는 능력(narrative competence)’을 강화하고... 그 동안 부인되어 온 경험의 통합을 촉진함으로써 환자 안에 좀 더 일관되고 안정된 자기감을 키워 준다.


p.16-

 환자의 최초 애착 패턴이 언어 습득 이전 시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과 이 때문에 경험이 부정되고 분열되었을지 모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치료자는 아직까지 말로 표현해 보지 못한 경험이 비언어적으로 표현되는 것에 민감하게 조율할 필요가 있다. 즉, 치료자는 “알고 있지만 생각해 보지 않은 것(unthought known)”이라고 부른 것과 접촉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치료적 대화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은(혹은 생각할 수 없는) 저변의 의미를 포착하려면 몇몇 저자들이 치료자의 ‘쌍안시(binocular vision)’라고 부르는 능력, 즉 환자와 치료자 두 사람 모두의 주관성을 따라갈 수 있는 치료자의 능력이 요구된다. 여기서 기초가 되는 가정은 환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혹은 표현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분열되거나 부정된 경험을 다른 사람 안에서 불러일으키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 실연하고 혹은 구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는 임상적인 시사점은 치료자는 자신의 주관적 경험과 환자와 치료자가 함께 만들어 내는 전이-역전이 재연 그리고 감정과 몸의 비언어적 언어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환자가 부정해야 했거나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에 접근하여 궁극적으로 통합을 이루도록 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p.171-

 Bowlby는 ...‘잊혀져 있던’ 어떤 것을 자각하게 된 환자가 특징적으로 보이는 반응에 대해 Freud가 했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사실 저는 항상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단지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뿐입니다.” ‘알고 있지만 생각해 보지 않은 것(the unthought known)’이라는 자극적인 이런 어구를 만들어 낸 Christopher Bollas는 어쩌면 앞의 구절을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알지만’ 생각하지 않은(혹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또한 우리가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언어화되지 않은(혹은 언어화될 수 없는) 지식은 의식적인 자각의 범위를 벗어나 저장되므로 그 영향력이 지대하다. 이 때문에 이런 지식은 아동기뿐만 아니라 심리치료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p.173-

 애착 연구의 한 가지 결론은 발달적인 이유 혹은 방어적인 이유로 인해 중대한 경험을 묘사할 수 있는 단어가 환자에게 결여될 수 있다는 것인데...


p.180-182-

 우리가 명시적으로 기억해 낼 수 없는 것-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거의 항상 다른 방식으로 반드시 표출된다.

 우리는 우리가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을 타인을 연루시켜 실연하거나 타인 안에서 그것을 불러일으키고 혹은 구현하는 경향이 있다.

 ...

 엘리엇은 그에게 너무나 친숙하지만 동시에 그가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했던-혹은 인식하기를 거부했던- 어떤 각본을 나와 함께 실연했다.

 엘리엇은 내 안에서 몇 가지 경험을 불러일으켰다고 추정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비언어적으로 소통하고 있었던 것과 또 한편으로는 내가 내적으로 영향받을 만큼 충분히 수용적이었다는(혹은 취약했다는) 것 두 가지가 다 작용한 탓이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의 말에 의해 전달되는 정보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와의 동일시를 통해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엘리엇이 무엇을 느꼈는지에 대해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느낌을 내가 직접 경험한 것과 같았다. 이런 주관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하는 환자들은 치료자가 그들을 ‘내면에서부터 깊숙히(from the inside out)’ 알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환자들은 또한 그들이 말로 소통할 수 없거나 혹은 소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구현하거나 혹은 치료자가 구현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실연(enactment)과 불러일으키기(evocation) 그리고 구현(embodiment)은 환자가 알고 있지만 생각해 보지 않았고 -그리고 이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소통하는 주된 수단이다. 따라서 알고 있지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을 전달하는 이런 통로를 치료자가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거의 언어로는 매개되지 않지만 우리가 알고 또 알려지게 되는(knowing and being known) 이런 방식들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


p.187-

 환자의 암묵적 관계 지식에서 변화가 갑작스럽게 (만남의 한순간에) 발생하든 혹은 점차적으로 (환자가 기대하는 것보다 점차 좀 포괄적이고 협력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발생하든 간에 그 맥락은 항상 실연적이고 상호주관적인 것이다. Frieda Fromm-Reichmann은 수년 전에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설명이 아니라 경험이라고 말한 바 있다.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왜 그런지에 대한 이유보다 관계라고 말할 수도 있다.


p.190-193-

 이 환자가 알기를 꺼렸고 그래서 나에게 말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을 내 안에서 불러일으켰다는 설명은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를 말하는 것이다. 투사적 동일시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따르면, 이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서 감당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다른 사람에게(혹은 다른 사람 안으로) 투사하는 과정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우리가 투사한 것을 상대가 동일시하게끔 유도하는 방식으로 상대를 대한다. 투사적 동일시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방어기제로 여겨지지만 비언어적 의사소통의 양식이기도 하다.

 Melanie Klein이 원래 생각했듯이 투사적 동일시는 본질적으로 유아와 심리적 발달이 크게 미흡한 성인의 마음속 환상(fantasy)인데, 이들은 자신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든 재배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Klein의 통찰을 ‘대인 간에 일어나는 과정’으로 개념화한 공은 일반적으로 정신분석가인 Winnicott과 Bion에게 돌아간다. 그들은 Klein이 전적으로 내적 현상으로 간주한 것이 실제로 대인 간 현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서부터 그 이후까지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거나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경험을 실제로 타인 안에서 불러일으킨다.

 Bion은 그의 이론에서 ‘정상적인 투사적 동일시’를 유아기에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라고 이론화했다.

 ...Stephen Seligman은 유아와 부모 관계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아의 투사뿐만 아니라 부모의 투사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런 유아와 부모 관계나 다른 친밀한 관계-결혼과 심리치료와 같은-에서 성인들은 분명히 투사적 동일시를 사용한다. ...투사적 동일시의 복잡성... 첫째는 이것이 양방향적이라는 사실이고, 둘째는 치료자로서 우리는 환자가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것이 환자에게만 속한 것이라고 너무 쉽게 가정하는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모자걸이가 있어야 모자를 걸기 마련이다.

 환자들은 그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 안에서 그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면대면 의사소통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것을 투사적 동일시라 부르든 비언어적 의사소통이라고 부르든 간에, 분명한 사실은 환자가 그들의 경험에 대한 공명을 우리 내면에서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심리치료에 대한 상호주관적, 관계적 접근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즉, 환자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 접근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에게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환자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이해하며 잘 활용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주관성을 이용... 환자의 비언어적인 소통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이런 소통이 우리 안에 일으키는 반향을 인식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런 반향을 인식한다면, 우리 안에 불러일으켜졌다고 우리가 믿는 것을 환자에게 의도적으로 개방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매우 중요할 수도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환자가 말하지 않은 경험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를 얻은 다음 그런 이해를 환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우리 안에 불러일으켜진 것에 대한 우리의 자각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경우에는 환자 스스로 감당할 수 없다고 느끼는 어떤 경험을 우리가 애써서 성공적으로 감당해 내는 모습을 환자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몸의 언어를 제외하고서, 환자가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하지 못하는 것을 종종 치료자인 우리 안에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 모든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p.388-

 ‘분석의 제삼자’... 분석시간에 일어나는 치료자의 주관적 경험은 치료자와 환자 두 사람의 무의식적 심리 상태의 뒤섞임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따라서 치료자의 경험뿐만 아니라 환자 경험의 어떤 측면들을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p.392-

 우리는 환자들이 그들의 전이 이미지를 투사하는 텅 빈 화면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환자들이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것을 담아내는 새 그릇이 절대로 될 수가 없다.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최고의 희망은 우리 안에서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환자의 영향력에 대해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에 영향을 미치는,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그릇-즉, 우리 자신의 주관성-의 속성에 대해 가능한 많이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환자에 대해 어떻게 하기로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것은 흔히 우리의 무의식적인 욕구와 감정과 의도다. 비언어적 의사 소통의 통로를 통해 환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바로 이것들이다.

 우리가 이런 복잡성을 무시하면 환자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반면에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아직은 환자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곳-즉, 환자와 치료자 각자의 주관적 경험과 이 두 경험들 간의 관계-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게 된다.


p.396-

 우리가 처음부터 환자 행동의 의미에 집중하기보다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두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p.404-

 환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실연에 매몰될 수 있고,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조종하는 동기를 깨닫도록 도움을 주는 정신화 능력을 활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단순히 실연에 대해 경계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실연이 인식되지 않고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때떄로 그 결과는 비교적 무해하거나 심지어 긍정적이기도 하다. 치료에서 공유되는 모든 경험의 무의식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그것을 일일히 분명하게 살펴보지는 않는다. 혹은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인식되지 않은 어떤 실연들은 정확히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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