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테일러 - 꿈으로 들어가 다시 살아나라 (성바오로) 中 여기저기 갈기갈기 발췌.


 꿈에서 죽음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항상 인격이나 성격의 변형이나 성장과 관련되어 있다. 마치 성장이 일어남에 따라 기존의 인격 구조가 변화되고, 새로운 인격에 길을 내주기 위해 기존의 인격은 죽어야 하는 것과 같다. ...성장과 발전이 필수적으로 죽음의 은유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 에너지는 절대 파괴되지 않는다. 단지 한 에너지에서 다른 에너지로 변형될 뿐이다. 꿈에 한 인물이 죽거나 살해되었을 때 어떤 특별한 이미지로 추정되는 무의식의 에너지가 (그 상으로부터-) 해방되어 다른 새로운 에너지를 형성하게 된다. 꿈에서는 한 형태가 다른 형태로 변형되고, 이렇게 변화하는 상징적인 주제나 패턴은 (하나의 꿈보다는-) 일련의 연쇄적인 꿈들을 다룰 때 점점 더 명쾌하게 드러난다.

 같은 측면에서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는 꿈의 의미는, 예를 들어 위협적인 침입자와 싸우기 위해 집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무서운 적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순간은, 지금이 다시 성장하고 변화해야 할 때라고 말하는 내면의 암시를 회피하고 도망치려는 것이다.

 죽음이란 단지 그 인물로 표현되는 에너지를 (해체하여-) 새롭고 진화된 형태로 재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개성화된 자아의 원형’... 변화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낡은 것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수용할 때 재탄생한다”는 그리스도교의 약속은 최소한 심리학적으로는 필연적이고 생생하다. 자발적인 희생의 원형은 그 진실을 부분적으로나마 의식적으로 살아낼 때 우리 삶에서 구체화될 수 있다.


 ‘자발적인 희생’의 원형은 그리스도교 직관의 핵심이다. 그리스도교의 신화소는 고대의 원형적 주제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자발적 희생을 나무 십자가 교수대와 함께 묘사하는 전통은 많다. 오딘은 스스로가 만인/만물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세계나무 위에서 7일 동안 희생한다.


 트릭스터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서 있는 또 다른 원형이다. 이 원형적 마술사는 남성일 수도 여성일 수도 있으며, 의식적인 자아가 지닌 자기기만과 창조적 가능성 둘 다를 하나의 형상으로 드러낸다. 세계적으로 트릭스터는 흔히 사회 권력이나 위계질서에서 가장 낮고 천시되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이 트릭스터의 선물과 창조로 인해 인류의 의식과 문명이 진보한 것으로 여겨진다.

 트릭스터의 교묘한 선물은 새로운 의식, 즉 새롭게 사고하며 느끼고 존재하는 방식 자체로서 또 다른 원형적 형상인 신성한 아이divine child로 구체화된다. 신성한 아이는 대개 혼란의 와중에 탄생한다. 태어날 때 또는 태어나기 전 자궁 안에서부터 외형상 말을 하고 이동하는 등 기적 같은 능력을 지닌다.

 아마도 서구 문화에서 이 신성한 아이의 가장 친숙한 예는 아기 예수일 것이다. 아기 예수의 형상은 혼란의 와중에 성스러운 부모에게서 기적 같은 능력을 지니고 태어나 나중에 인류 사회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 버리는 다른 신성한 아이의 이미지들과 분명히 연관되어 있다. 헤르메스, 헤라클레스, 디오니소스, 탐무즈, 텔리에신, 모세, 부처, 마호메트 등의 탄생 이야기는 동일한 원형적 패턴을 반영하며 같은 원형을 조금 다르게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다.

 헤롯의 군대가 탄생이 예고된 구세주를 없애기 위해 그 아이 또래의 모든 아기를 살해하는 드라마...

 대개 신성한 아이는 자신을 살해하려는 기존의 낡은 구질서의 박해를 피해 살아남는다. 신성한 아이를 보호해 성인으로 자라게 하는 데는 대개 동물들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 ...꿈에서 동물이 도움을 주러 오거나 방해를 하며 위협적으로 나타나면 어떤 수준에서 우리는 삶에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자연적 충동이 은유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경우에 특정 동물은 대개 특정한 본능을 구체적으로 가리키곤 한다. ...융은 주어진 상황에서 원형적 동물의 상대적 발달과 진화가 곧 내면세계의 역학에서 본능 에너지가 진화적으로 발전하는 단계를 반영한다고 제안했다. ...동물들은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의식적이지 않은 것들을 나타내며, 그림자와 동물이 간혹 한 형상으로 나타나곤 한다.


 만다라는 하나 속에 있는 모든 것의 전체성을 진화시키는 또 다른 원형적 이미지다. 만다라 형상은 항상 각을 이룬 형상과 원을 결합시킨다. ...융은 만다라가 집단적/역사적으로 표현된 많은 예들을 통해 집단적 인간의 삶에서 질서를 잘 갖춘 구조에 반영된 신성한 조화와 질서에 대한 아이디어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만다라가 본질적으로 같은 ‘질서’와 ‘중심’의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비행접시/만다라 이미지는 ‘구질서’가 안팎에서 흔들리기 시작하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잠재적 형태로 존재하는 그런 순간에 등장하는 원형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 비행접시의 이미지는 따라서 임박한 대격변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험난한 여정perilious journey... “결코 돌아오지 못할” 길이라는 경고... 어떤 수준에서 이는 단순히 변화를 막기 위해 동원되는 사회·문화적 압박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 진실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자의식을 확장하는 여행을 할 때 죽음의 땅으로 내려간 그 사람은 실제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되돌아오는 자는 죽음을 경험하고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이 신화적 변형, 즉 죽음과 재탄생은 일생 동안 여러 번 되풀이된다.

 에너지는 파괴되지 않고 단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환될 뿐이다. 꿈속에서의 죽음은 어떤 특정한 형태로부터 에너지가 해방되는 것이며, 자아가 새로 태어나는 데 필요한 전주곡이다. 변화는 항상 우리에게 죽음의 공포와 직면하게 한다. 새로운 것에 자리를 내주는 낡은 것의 ‘죽음’은 우리가 두려움으로 가득 차 물리적 죽음과 동일시하게 되는 심리적이고 영적인 죽음이다.

 개인의 삶이 경직되어 어떤 ‘영속적이고’ 불변하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에서, 죽음으로 여겨지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행동화할 때 우리는 일종의 ‘살아 있는 죽음’을 만들게 된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서 변화하려는 욕구를 억압해 성장이 좌절된 데서 오는 고뇌를 피하려고 죽음을 외부의 다른 것들에 투사하게 된다. 드라큘라와 헤롯처럼 우리는 ‘죽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강박적인 시간을 지내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헤롯과 그리스도는 동전의 양면이다. 헤롯은 신성한 아이divine child가 탄생했으므로 군주로서 자신의 날들이 끝날 뿐 아니라,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영속적인’ 질서가 사라져 버린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의 불씨를 꺼 버리려 한다. 억압과 투사... 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죽음을 아버지와의 신성한 합일 속에서 부활하는 데 필요한 전주곡으로 받아들이라고 설교한다. 이는 개성화 과정의 중심에 있는 죽음과 재탄생의 패턴이라는 심리적 발전에 대한 원형적 은유이다.

 죽음이 초래하는 변화와 일종의 ‘살아 있는 죽음’이랄 수 있는 완벽하게 안정되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현실 사이에 혼동이 일어날 때 찾아오는 공포...

 어떤 사고 체계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전부이며 완전해서 더 이상의 질문이나 수정이 필요없다고 믿는 것... 만일 우리가 삶과 사고와 신념 체계에 아무런 빈틈이나 공간이 없는 척한다면 ‘확실성’과 ‘불변의 불멸’이라는 환상을 창조하게 된다. 그런 환상을 없앤다는 것이 처음에는 (위협적이고-) 두렵고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내면과 문화에서 낡은 것을 떠나보내고 죽음을 받아들인다면(흔히 꿈속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으로) 이전에 억압과 투사로 만들어진 자기기만을 유지하느라 낭비한 에너지를 방출시켜 ‘재탄생‘과 ‘영원한 삶’을 사는 원형적 메시지를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다.


 신성한 아이의 원형은 이미 확립된 질서와 힘으로 그를 파괴하려는 데 맞서 싸워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확립한다. 그와 동시에 트릭스터는 대단한 창조적 충동의 소유자로 이전에는 생각한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졌으며 힘과 권위와 정체된 인물에 고유한 방식으로 ‘보복’한다.

 이전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 사이의 근본적인 연관성을 지적함으로써... 항상 놀랍고 모순적인 방식... 트릭스터는 전통적인 지혜에서 분리된 (이질적인. 종종 대극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내 주며... 오만과 전통적 틀 안에서 스스로의 힘에 대한 부적절한 비전으로 우쭐해진 전체 상황을 변형시키기 위한 창조적 생각의 원천인 동시에 모순적인 ‘보복’을 가져온다.


 전 세계에 등장하는 트릭스터 신화들은 궁극적으로 한 가지 이야기다. 그것은 인간 의식의 진화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 의식이 유일하고 실제적으로 할 수 있는 선택은 미성숙하게 폐쇄적이 되느냐, 개방하느냐 둘 중 하나이다.

 열린 자세로 완전한 범주의 경험에 참여하는 것... 이런 면에서 기본적으로 급진적인 그리스도교의 메시지 “원수를 사랑하라”는 모든 현상과의 궁극적 합일에 대한 단언이다. 개인적 심리 수준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설교는 억압과 투사라는 보편적 문제에 대한 유일한 실용적 해결책이다. ...그리스도교인이든 아니든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며... (단순히 생각만으로 되는 건 아니고-) ...원수라고 생각하는 대상을 사랑하는 역설적인 행위는 우리가 한 개인으로서 성장하고 진화하며 종으로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 꿈 작업은 대단히 실용적 가치를 지닌다.



제레미 테일러 - 살아 있는 미로 (동연출판사) 中 ‘신성한 아이’ 발췌-


 진정한 성장과 변화를 중단시키려는 노력은 항상 비슷한 상징적인 형태로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등장한다. ...‘헤롯의 군대들’의 행동과 그 기저에 깔린 동기는 늘 같다. ...인간 의식에서 ‘보수적인’ 요소들이 바로 그것이다. 고통과 시련과 불의조차 알려지고 익숙한 것이라면 선호하고, 개인과 집단이 변화를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암시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는 원형의 신성한 아이가 탄생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동원되니 말이다. 정말 보수적인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이라면 탐색하거나 분석해 볼 생각도 없이 원칙적으로 무조건 다 거부한다. ‘신성하고’ 제한되어 있는 ‘근본적인’ 비전을 바꿔 놓을 그 무엇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자신의 통제와 지배를 벗어나 의식이 진화해 가고 독립적이 되는 것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신성한 아이도 집단적이고 원형적인 정신 안에 연합군이 있다. 우주가 진화하는 실험을 계속하겠다고, 특히 꿈과 상징 드라마에서 신성한 아이로 대표되는 의식 안에서 자기인식을 계속 진화시키겠다고 몰래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이 신성한 아이들 모두는 태어날 때 박해를 받지만 자연의 힘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자라나 각자 새로운 ‘섭리’를 세우게 된다. 정치·경제·영성적인 삶의 사회 문화 형태가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런 결과 중 하나는 자신들의 이익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 그토록 애써 신성한 아이의 탄생과 성장을 방해한 ‘구질서’가 전복되는 것이다.


 ...신성한 아이 원형은 항상 재난 중에, 기성 세계의 모든 힘이 자신에게 적대적인 상황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이들이 지닌 약속, 즉 신성한 아이가 자라면 아이가 가져온 새로운 창의적인 에너지와 의식으로 전 세상이 변하고 ‘새 빛’이 올 것이라는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신성한 아이는 항상 혼란의 한가운데 와서 인간의 삶을 보다 ‘성스럽고’ 통합되고 의미있는 체험으로 변화시키려 한다.


 ...모양이 바뀐 아이를 씨앗의 형태로 집어삼키는 것, 추격하는 것, 집어삼키는 어머니, 자신을 파괴하려던 세력에게서 벗어난 신성한 아이가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져오는 것... 이 이야기에서 ‘빛’은 의식이라는 오랜 원형적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세상이 ‘깜깜한’ 것은 세상이 무의식적이기 때문이고, 신성한 아이의 임무는 어둠의 한가운데 빛을 가져와 정신의 깊은 곳에서 새로운 의식이 깨어나도록 해서 의식의 가능성과 실행의 새 날을 비추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의식의 자기인식이라는) ‘여명’의 한 가지 결과로 새로운 생각이나 새로운 창의적인 에너지가 의식으로 등장하기 전에 ‘어두운’ (무의식적인) 습관과 관례, ‘늘 그래 왔던’ 식의 구질서가 전복된다. 개인에게나 집단에서 헤롯처럼 현상을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힘들은 언제나 신성한 아이가 성장해 구질서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막으려 한다.

 안정된 사회 질서의 입장에서나 깨어 있을 때 자아의 의식에서 지배적인 유형이라는 면에서 보면 ‘모든 것을 새롭게 하겠다’는 신성한 아이의 약속은 ‘죽음의 위협’으로 보이는 면이 있다. 그래서 내가 속한 사회의 관습에서 보면 신성한 아이는 항상 부정적인 ‘그림자 인물’이나 이단, 비행청소년, 아니면 자주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란 형태로 보일 뿐이다.

 신성한 아이의 원형적인 에너지는 항상 낡고, 성급하게 닫힌, 제한적인 준거 기준과 가능성을 뒤엎는 데 초점을 둔다. 그래서 신성한 아이는 항상 그림자의 성질과 트릭스터의 성질을 내보인다. 신성한 아이 원형의 에너지는 항상 의식적인 깨달음으로 새롭게 들어오는 생각들과 원형의 트릭스터 에너지와 늘 깊이 연결되어 있다. 트릭스터는 한편으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도 다른 면에선 엄청나게 창의적이기에 ‘다루기 어려운tricky’ 성향을 지닌 인간 의식 자체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항상 새로운 의식의 가능성을 예고하는 신성한 아이는 약하고 (하찮고-) 위협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기만과 예상치 못한 창의적인 행위로 분열과 혼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고대로부터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신화적 서사는 태어날 때부터 반대하는 세력의 방해를 뚫고 탄생한 신성한 아이가 살아남아 성공하는 이야기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아기 영웅이 살아남아 의식에서 자기 인식에 변화를 가져왔기에 그들의 사회가 살 수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현대에 들어 다른 종류의 신화가 등장하는데 여기선 신성한 아이가 성장해 세상을 바꾸는 타고난 운명을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원형적인 신성한 아이가 결국 헤롯의 군대에 살해당하는 신화적인 서사의 예... 때로 사람들이 꿈의 경고에 주의하지 않을 때, 헤롯의 군대가 와서 개인과 집단에서 기존의 삶의 질서를 위협하는 신성한 아이를 제거하게 되기도 한다.


 현대인들의 꿈에서 신성한 아이 원형이 발현하는 가장 흔한 예는 ‘등한시한/버려둔 아이를 발견하는’ 모티프이다. ...원형적인 ‘방치된 아기’... 이런 종류의 꿈을 꾸면 자기가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는지 더 창피해하고 끔찍해하는 편이다. 이들 꿈에서 방치된 꿈 속의 아기에게 이름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거기에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있다. 아직 이름은 없지만 창의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 이들 가능성들은 아주 오랜 기간 방치될 수도 있지만 죽지는 않는다. 꿈속에 방치된 아이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아이는 ‘탈수되어’ ...생명과 정서의 물에 목이 탄다. ...그럴 때 그 사람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비난과 불안의 성질은 그 순간 그 사람의 심리 영성적인 발달 단계를 정확하게 보여 준다.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아기’를 돌보는 일에 불가피하게 뒤따르는 불편함을 내키지 않아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다.


 창의적인 심리 영성적 발달이라는 임무를 미루더라도 결국엔 (언젠가는-) 되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방치하고 버린 아기’ 꿈과 ‘잊어버린 수업’ 꿈은 아주 깊이 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신성한 아이는 잊어버렸던 수업의 시험을 어떻게 통과하고, 어떻게 어두운 세상에 빛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어떻게 꿈꾼 이 개인의 삶과 사회가 그것이 궁극적으로 솟아나는 (무의식의) 신성한 원천을 보다 정확하고 진실하게 반영하도록 변화시켜야 할지를 알고 있는 우리 정신의 일부이다. 헤롯의 군대와 같은 ‘구질서’의 힘들은 항상 신성한 아이와 아이를 돕거나 구하는 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갈림길에 서 있다. 하지만 자연의 힘들이 몰래 방치된 아이를 도와주고 지켜준다. 따라서 그 결과는 항상 진행 중이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꾸는 꿈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Respons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