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그린 - 신화와 점성학 (문학동네) 中 군데군데 띄엄띄엄 발췌.

 

p.22-24- p.25- p.30-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소명감’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느끼고 거기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서 다이몬은 가장 확실히 드러난다. 그런 사람들의 ‘인격’이 어떤 영역에서 창의적 노력의 형태로 외부 세계에 구체화될 때 그것은 그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다이몬의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다이몬이 갖는 추진력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려고 노력... 융이라면 이것을 자기(Self)와 조화를 이루어 그에 순종하면서 사는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전통 종교의 사고 방식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신의 뜻에 따라 사는 일이라고 말할 것이지만, 그러나 신은 안에 있으며 우리는 결국 노발리스가 운명과 혼을 동일시했던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사실 개인의 전 인생 패턴은 그의 다이몬이 각인된 것으로서, 세월이 흐른 후에 보면 그 패턴이 좀더 명확히 드러난다. ...

 개인의 출생천궁도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별자리들은... 개인의 혼이며, ‘그가 속해 있는 무리의’ 신이며... 하나의 신화(미토스)이며, 이야기 속에 생생히 그려지는 하나의 틀 또는 안(案)-발전의 패턴, 원형적 주제-이다. 한 별자리에는 몇 개의 다른 신화적 인격들이 깃들여 있고, 그 속에서는 한 편의 드라마가 상연되며, 그것은 때로는 비극적이고 또 때로는 희극적이지만 항시 어떤 목적성을 지닌다. 개인적인 발전 패턴의 뼈대를 형성하는 이런 이야기들... 우리가 운명(다이몬의 형태로서의)으로 체험하는 어떤 것...

 천궁도 속에서 신화적인 드라마를 읽을 수 있을 때까지는 점성술을 말하는 일이 단편적이고 불완전하며 (피상적이며-) 단지 정적인 상황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진실을 제대로 알거나 전하지 못한다.

 

p.42- 양자리-

 이아손... 늙은 아버지old father를 죽이고 개인으로서의 독립성을 확보하려는 인간 정신의 주제(양자리 드라마의 핵심)...

 왕위 찬탈과 위험에 처한 어린 왕자의 테마...

 

p.65-66- 황소자리-

 미트라 제의... 십우도... 불교도들의 이해 방식은 여기서 매우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황소를 죽일 것이 아니라 상호 존중의 발전적 패턴 안에서 그것과 춤추는 법을 배워, 황소는 좀더 인간이 되고 인간은 좀더 짐승이 되도록 하라. 압도해오는 관능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황소의 지칠 줄 모르는 탐욕과 잠재적인 문제점들을 지성 속으로 끌어들여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나는 자주 보았다. 이것은 물론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미노스도 미노타우루스를 미궁에 가둠으로써 그것을 시도했었지만, 그렇게 되면 대개는 몸이 마음의 폭압에 항거한다. 또한 그들과는 반대로 관능과 감각의 노예가 되어 황소나 암소가 인간성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황소자리 사람들도 나는 보았다. 그러나 이것도 소와 사람 양쪽을 다 만족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다 참다운 자기Self를 거부하고 사적인 욕망을 위해 남의 것을 소유하려 했다가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는 미노스 왕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p.108- 사자자리-

 사자는 융이 (그리고 니체가-) 암시하듯이 변해가는 과정의 한 단계를 나타낸다. (최종 단계가 아니라는-)

 

p.123-131- 처녀자리-

 그리스인들은 처녀자리를 정의의 신녀神女 아스트라이아(또는 디케)와 동일시했다. 헤시오도스에 의하면 그녀는 제우스의 딸로서 인간들이 전쟁이나 살육을 일삼지 않았던 황금시대에 지상에 살았었다고 전한다. 그녀는 일반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앉기도 했으며 시장 같은 데서 나이 든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자연의 법을 따르도록 훈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점점 타락하여 범죄를 저지르게 되자 인간 종족을 미워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영원히 지구를 떠났으며 아버지 제우스가 있는 하늘로 올라가 처녀자리가 되었다. ...아스트라이아의 정의는 법정의 법이나 사회적 격식 따위와는 관계가 없다. ...보릿단 한 움큼을 손에 쥔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는 아스트라이아는 보다 현실적인 여신이다.

 “디케(아스트라이아)는 인간과 짐승과 식물들을 포함한 자연계의 모든 생명의 길이다. 그것은 또한 저 위대한 동물로서의 우주의 길이며 관례이며 정해진 진로이다. 계절을 통해 나타나고 초목의 일생을 통해 보여지는 길이다.”

 ...그녀는 자연 속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질서를 다스리며, 인간에 대한 그녀의 혐오감은 처녀자리 사람들이 무질서와 혼돈과 손상과 소모를 싫어한다고 하는 전통적 해석과 그대로 일치한다. ...아스트라이아의 통제 아래 우주의 모든 자연물들은 그 나름의 주기와 가치를 지니며 모든 것이 때와 장소를 갖는다. 이러한 다이몬을 생각하면 처녀자리 사람들이 의례주의적 경향과 ‘타당성’ 위주의 인생관을 지니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처녀자리는 고결한 여선생 같은 아스트라이아와 소아시아의 주신제酒神祭에서 난교와 매춘을 주관하는 달의 여신을 뒤섞어놓은 듯한 깊은 모순을 보여준다. ...처녀자리 사람들은 일생 동안 이 대립하는 요소들 사이에서 그들을 포용하려고 노력하며 고투한다. 개인으로서의 그들은 어느 한쪽을 버리고 다른 한쪽을 구현하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별자리의 운명이 그러한 분할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어려움에 봉착한다. ...

 처녀자리가 갖는 의미 못지않게 ‘처녀’라는 말의 의미도 복잡하다. ...신화적 문맥과 관련된 점성학상의 처녀자리는 오늘날 말하는 처녀의 의미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백 개의 젖가슴을 갖는 에베소의 검은 아르테미스 같은 존재... 이 여신의 헌납 요구에 부응하여 젊은 여인들은 사원에서 결혼 전에 이방인에게 몸을 팔며 하룻밤을 보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테미스는 ‘처녀’라고 불린다.

 “현재의 우리는 ‘처녀’라는 말을 ‘순결’과 동일시하지만 그리스어의 파르테노스parthenos나 성서에서 처녀virgin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알마흐almah는 원래 그런 뜻이 아니었다. 그리스어의 그것은 순결과는 무관하게 아직 미혼인 소녀를 가리키는 용어였고, 나아가서는 미혼모까지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히브리 단어 역시 혼전의 순결 여부와 관계 없이 ‘미혼’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음탕할 수도 있는 여자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아타르가티스나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같은 고대의 처녀 여신들은 그들 스스로가 매춘부였으며, 그들의 사원은 여신이 육화한 존재인 매춘부들이 경건한 남성을 반反 신성의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그에게 은덕을 베푸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매춘부는 신화 속의 처녀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우선 자기 내면의 존재와 결혼한 후 두 번째로 한 남자와 결혼하는 자유로운 여인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면적 모순이 처녀자리 사람에게 커다란 긴장을 선사할 것임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처녀자리가 상당히 신경질적인 별자리로 알려진 것도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처녀자리 사람의 내면적 윤리감은 그것이 자신의 시대와 사회로부터 빌려온...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면적인 것일 경우, 비상식적인 성행위로 간주할 수 있는 것과도 다투지 않는다. 이러한 내면적 윤리감은 그 스스로 얼마든지 강한 것일 수 있으며 일반의 상식적인 규범 못지않게 ‘공정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는 그 주인공이 자신의 반대 극인 아프로디테와 공감하지 못하고 ...‘순결’을 지키기 위해 본능을 공격하는 경우, 글자 그대로 운명이 되어버리는 신화이다. 그때 생명력은 하데스처럼 깊은 곳으로부터 분출하여 처녀에게 체험을 강요한다. 그러나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가 사실화되는 경우(세상에는 -육체적 외에도-여러 가지 강간이 있다)에조차도 그 체험으로부터 어떤 결실이 얻어진다. 이것은 단지 성적인 측면에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종합적인 관점을 얘기하는 것이다. ‘처녀’가 단지 성적인 순결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처녀 여신의 매춘이 단지 모든 이용자들에게 성적인 효과만을 체험케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이, 자연의 질서를 신뢰하고 생명의 흐름에 심신을 개방하여 자신을 관류하는 힘과 그에 따른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이라 이해하고 싶다. ...

 

p.131-

 사자자리의 성배 탐색이나 쌍둥이자리의 대립 요소 화해, 황소자리의 황소 길들이기 등등...

 

p.159- 전갈자리-

 거미와 뱀, 용 따위의 반 짐승 형태로 나타나는 원초적인 ‘어머니’의 세계... 포유류와는 거리가 먼 이 냉혈 동물들은 인체의 불수의적 기능을 상징하는 것이며... 전갈자리를 주관하는 다이몬은 지하세계의 왕과 여왕을 통해서 이미지화되기 때문에 결국 명왕성Pluto에 관련된 신화들이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일반에 알려진 전갈자리의 상징은 아르테미스-헤카테 여신이 자신을 화나게 한 미남 사냥꾼 오리온을 없애기 위해 지옥으로부터 불러낸 커다란 전갈이다.

 전갈자리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신화는 ...영웅과 용의 주제를 맴돈다. 양과 사자, 게, 쌍둥이 형제 등이 그랬었듯이 이 별자리의 영웅도 자기 나름의 어떤 것을 구하고 있으며, 우주뱀蛇의 친척인 용은 우리가 ‘무서운 어머니Terrible Mother’로 체험하는 무의식의 또 한 가지 다이몬적 요소이다. 에리니에스 같은 존재도 무서운 어머니의 한 단면이지만 무서운 어머니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은 구렁이(constrictor-)이다. 용과의 싸움은 보편적인 주제이지만 특히 전갈자리 사람들의 인생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들은 인간 본능의 이 파충류적 면모와 그것의 무섭고 파괴적인 힘에 좀더 확실히 좀더 자주 맞닥뜨린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히드라와 헤라클레스의 싸움이다. 또 하나의 예는 니벨룽겐의 보물 창고를 지키는 용 파프니르와 지크프리트의 투쟁이다. 우리는 살다 보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이 용의 영역을 체험해야만 한다. 그러나 전갈자리 태생에는 그것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나이가 들수록 심도를 더해간다.

 

p.178- 전갈자리-

 ‘음울한 운명’의 독기와 지옥의 끈질긴 투쟁을 상징하는 전갈자리... (부정적 모성 콤플렉스-)

 

p.192-201- 염소자리-

 ‘하늘의 빛’의 계시에 의해 활력을 얻었던 인간의 정신은 이제 ‘아버지’의 이름 아래 복종의 입문 의례를 시작한다.

 풍작을 위해 늙은 왕을 희생시키는 신화... 여기서는 늙은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탄생해야 하며, 둘이 목숨을 걸고 싸워 하나가 남아야 한다. 양자리에서는 아들이 불의 신으로서의 아버지를 만나며, 아버지의 질투 섞인 분노가 미성년인 아들을 위압한다. 사자자리에서의 아들은 병든 정신으로서의 아버지를 만나며, 그의 병은 의식意識을 통해 구원받아야 한다. 염소자리에서의 아버지는 땅 자체이며 물질계의 현실 원리이다. 연금술의 상징주의에서는 이 늙은 왕이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 어미나 누이와 짝을 짓고 해체된 후 짝의 자궁 속에서 젊은 왕으로 다시 태어난다. 늙은 왕 크로노스는 자신도 자기 아버지와 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자식들을 먹어치운다. 그러나 그 자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숨겨졌던 아들이 봉기하여 반역한다. 티탄으로서의 크로노스는 자신의 지상적 천성을 통해 어머니인 대지의 여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크로노스는 독립적인 남성 원리가 아니며, 어머니가 다스리는 생식 원리의 남성적 측면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남근의 이미지... 크로노스와 그의 낫은 왕의 희생 의례에 관련된 상징이다. ...이 의식에서 낫은 땅을 비옥하게 하고 농작물이 다시 자라게 할 죽음의 상징물이었다. 크로노스는 아테네에서 보리의 신 자바지우스Sabazius로 숭배되었고 매년 보리밭에서 몸을 잘린 뒤 오시리스처럼 사람들에게 애통함을 선사했다. 그는 스스로 젊은 왕이자 늙은 왕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한 짓을 나중에 자신도 당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 연로자와 연소자의 이러한 이중성과 단일성이 염소자리에 관련된 신화적 주제들 중 하나이다.

 왕의 처형에 관한 고대의 상징...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자 유태인의 왕인 크리스트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모든 희생 왕 구세주들(미트라와 탐무즈, 아도니스, 그리고 아더 왕에 이르는)이 그렇듯이 동지 무렵에 태어났다. 이 시기는 일 년 중 태양의 세력이 가장 약하고 밤이 가장 긴 때이다. 대지는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회복과 구원을 갈망한다. 황량함과 죽음이 도처에 있고 인간의 마음속에도 가득하다.

 ...우리는 이 황무지를 퍼시발과 성배의 이야기에서 만났었다. 그러나 퍼시발은 사자자리의 전형이고 여기 염소자리의 전형은 병든 성배의 왕 바로 그 자신이다. 아티스와 마찬가지로 신의 아들인 크리스트는 십자가에 못박힌다. 십자가는 물질의 나무이며, 어머니이며, 물질계의 삶을 나타낸다. 그것은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말했듯이 매년 농작물을 다시 자라게 하기 위해 절단되어 흙으로 되돌아가는 희생 왕에 비슷한 이미지이다. 그러나 성체 절단 의식은 영靈을 재생시키며, 자연을 재생시키는 원형으로 오래 전에 귀착되었다.

 ...달갑지 않은 책임을 짊어지는 일이 염소자리 사람에게 주어진 통과의례의 특징이며, 그것은 물질에(대지에. 현실에-) 얽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는 확실한 대가를 충분히 치르기 전에는 방탕한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아버지는 하늘이 아니라 땅속에 계시기 떄문이다. 탕아는 거부당하고 아래로 내던져져 현실적 체험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회의와 절망의 위기 또한 염소자리에 속하는 것이므로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와 속죄’라고 하는 신화적 주제는 조지프 캠벨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훌륭히 설명한다. 염소자리 사람들은 사자자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언제나 자신의 아버지에게 실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찾는 ‘아버지’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버지의 분노는 염소자리 사람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새턴(토성)은 하늘이 아니라 땅과 관련된 ‘무서운 아버지’이며, 그의 게걸스럽고 파괴적인 모습, 질투심, 편집증, 권력욕 등은 염소자리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는 죄악의 체험을 환기한다.

 ...캠벨은 아버지와 아들의 양극이 개인 속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있다. 이 부자父子는 딱딱하고 엄중하게 삶의 규율을 강요하는 보복적인 아버지와 활기에 넘치고 욕망이 꿈틀거리는 아들이다. 도덕과 수치심, 합법성과 무법성이 염소자리 사람의 내면에서 서로 반대되는 어떤 요소들인 것처럼 보인다. 아들은 아버지의 징벌을 받아야만 하며 결국 아버지가 자신 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늙은 왕인 아버지는 아들의 반항에 직면해야 하며 결국 그것이 오래 전에 떠났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젊은 정신임을 깨닫는다. 아버지를 통한 아들의 입문의례는, 염소자리 사람들이 실제의 부자 관계에서 자주 불만스런 상황을 겪고 그리하여 그것을 자기 내부의 좀더 깊은 차원에서 발견해야만 하는, 그것이 마치 운명인 것처럼 느껴지는 내면적 체험이다.

 “아이가 자라서 어머니 품안을 빠져나와 어른들의 세계에 접하게 될 때 그의 정신은 아버지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미래의 어떤 것을 나타낸다. 아버지 자신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는 아버지를 스승으로 삼아 좀더 넓은 세계 속으로 한걸음 내디디게 된다.”

 박해자나 사람 잡아먹는 괴물로 나타나는 아버지의 첫 모습, 세상의 ‘규율’과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요구당하는 과정, 자비로운 ‘아버지’와 불사의 혼에 대한 꿈 등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입문의례.. 토성적인 길... 젊은이들은 무엇이든 지금 해야 하며,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필요한 준비나 조건을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왜 기다려야 하는가? 이것이 젊은이의 특성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즉각적이고 자연발생적이다. 그러나 염소자리 사람의 입문의례는 그런 젊은이다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토성의 효과가 두드러질 때 이 의례가 특히 깊이 있게 치러지며, 염소자리 사람에게 이것은 일생 동안 끊임없이 반복된다. 왜냐하면 소유할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아버지’의 왕좌를 딛고 넘어서야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떠나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 세속적 책임과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은 아들에서 아버지로, 소년에서 성인으로, 아직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정신이 현실 세계에 실제로 기여하게 되는 형태를 통해서 나타난다. ...젊은이에게는 이것이 혼란을 선사할 위협적인 요소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만의 개성과 특수성을 마치고 지금까지의 자기애적인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 수납에 의해 부과되는 속박은 역설적으로 하나의 자유를 선사한다. 아버지가 요구하는 것을 치름으로써 신뢰가 생겨나고 정말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의 정신은 ‘저 위’ 어딘가에 공허한 이념으로 남을 수밖에 없으며, 현실의 시련과 투쟁과 실패를 통하여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게 된다. 실패는 염소자리 사람의 인생 여정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절망을 극복하지 못한 신념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p.225-240- 물고기자리-

 ...물고기자리는 다른 별자리들과 달리 신화 속에 깊이 파묻혀 있으며, 관련 설화 역시 그리스 시대보다 몇 세기 이전의 신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 ...

 물고기는 매우 오래된 다양한 상징을 갖는다. 그것은 비옥성을 다스리는 여신의 주신제(酒神祭)적 요소로부터 크리스트의 초월적 육체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범위를 포용하는 짐승 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슈타르와 아프로디테의 새이자 성령의 상징이기도 한 비둘기와 마찬가지로, 물고기는 이교적이면서 기독교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여성적인 본성을 소유한다. ...하늘의 두 물고기에 관한 초기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신화는 그들을 위대한 아타르가티스 여신으로 숭배한 시리아·페니키아의 물고기 의례에 연결한다. 우리는 그녀를 처녀자리에서도 만난 적이 있다. 이 여신의 사원에는 연못들이 있었고 거기에는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되어 있는 신성한 물고기들이 살았다. 이 사원에서는 물고기로 만든 요리를 먹는 일이 의례적으로 거행되었으며, 여신 자신이 물고기의 형상으로 묘사되었고 사제들은 물고기의 껍질을 입었다. 이 물고기의 여신에게는 이크티스Ichthys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역시 물고기였다. 그는 나중에 염소자리의 염소-물고기와도 이어지는 바빌로니아의 물고기 신 에아Ea로 발전한다. 아타르가티스와 이크티스는 또한 이슈타르와 탐무즈이고, 키벨레와 아티스이며,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이다. 바빌로니아의 신화에 따르면, 두 마리의 물고기가 유프라테스 강에서 커다란 알을 발견하여 그것을 육지로 옮긴다. 비둘기 한 마리가 그 위에 둥지를 틀고 며칠 뒤 알에서 여신 아타르가티스가 태어나며, 그녀의 청에 의해 물고기들은 하늘로 올라가는 영광을 얻는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에 와서 아프로디테와 그 아들 에로스가 물고기로 변하여 괴물 티폰으로부터 도망치는 내용, 또는 물고기들이 모자(母子)를 구조하고 봉사의 대가로 하늘에 올려졌다는 내용이 되었다. 그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꼬리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태모신과, 의례를 통해 주기적으로 희생되는 그녀의 아들-연인이 물고기들이라는 점...

 “신화 속에서 태모신은 그 자식들에게 대체로 위험스런 존재이다. 예레미아는 물고기 한 마리가 다른 물고기를 먹어치우는 모습이 초기 기독교의 램프에 나타남을 언급하고 있다. 남쪽물고기자리의 으뜸별 이름(포말하우트-‘물고기의 입’-)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고기의 상징에서처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게걸스런 욕망이 물고기자리에 해당된다. 물고기자리는 ‘색정적이고 게걸스러우며 탐욕적이고 물릴 줄 모르는’ 기질을 대변한다고 전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 세상과 그에서 비롯된 쾌락의 덧없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속성들은 대부분 어머니이자 사랑의 여신인 이슈타르, 아스타르테, 아타르가티스, 아프로디테와의 관계로부터 연유한다. 그리고, 행성신으로서의 비너스는 물고기자리에서 기능 항진을 일으킨다.”

 두 마리 물고기 중 하나는 비옥성의 여신이고 다른 하나는 이 여신의 아들이다. 여신은 원초적 본능(환상과 무의식-)의 세계를 나타내는 게걸스럽고 음란하며 해로운 존재이지만, 그 아들은 (의식화의 ‘싹’으로서의-)구원자이고 이크티스이며 크리스트이다. 그들은 꼬리를 묶은 끈으로 영원히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떨어질 수 없다. 고대의 종교적 상징주의가 보여주는 물고기에 대한 양면가치적 해석은 이러한 짝을 반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증오와 저주의 표상이고 불분명하면서 동시에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물고기는 티폰(여신과 그 아들이 물고기로 변하여 피해 달아났던 괴물)에게 바쳐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화 속에서 또다시 반복되는 이야기를 본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구원하는 자는 저주받은 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음을,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그녀에게 다시 되돌아가도록 운명이 정해진-일시적 수정(授精) 매개자이자 삶을 갱신시키는 창조적 불꽃으로서의 그녀에게 영원히 묶여 있는- 우리네 삶의 무상하면서도 신성한 이미지가 여기 나타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물고기자리의 신화는 ‘어머니’와 그녀의 연인-아들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아들의 때이른 비극적 죽음과 재탄생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 구원의 신은 ‘어머니’ 자신이나 또는 멧돼지·뱀·수사슴·늑대 등 그녀의 토템 동물들 중 어떤 것에 의해 해체된다. 구원자로서의 아들을 우리는 사자자리와 염소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거기서의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물고기자리에서 만나는 것은 ‘어머니’의 아들이며 일시적으로 ‘차입된’ 아들의 씁쓸하고 감미로운 이야기이다. 가슴에 사무치는 이 이야기는 기독교의 교의로 채색되어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를 보면 점성학의 시대 구분법에 따른 물고기자리 시대와 지금까지의 기독교 시대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복음서에 나타난 첫 제자로서의 어부들이나 ‘사람을 낚는 어부’ 및 빵과 물고기의 기적 등을 볼 때 그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기독교의 상징주의에서는 크리스트와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물고기로 묘사되고, 물고기는 종교적인 식사 메뉴로 등장하며, 침례 의식은 물고기의 연못에 몸을 담그는 형태로 나타난다. 기독교 의례에서 우리는 크리스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 이런 관점을 생각하면 인류의 정신사에서 예수는 아티스와 탐무즈와 아도니스의 직계 자손이며, ‘어머니’를 상징하는 십자가에서의 그의 때이른 죽음은 로마인이나 유태인들이 그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가 그를 다시 집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구원과 희생의 주제는 물고기자리 이야기의 핵심을 이룬다. 물고기자리 사람이 스스로 삶의 희생자가 되든 고난의 구세주와 같은 존재가 되든 궁극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그 둘은 한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게걸스런 물고기 여신 쪽도 역시 마찬가지다. 희생자가 그녀로부터 구조되거나, 구원자가 다른 이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희생된다. 구원자와 희생자, 그리고 죄 많고 저주스런 괴물- 이 세 이미지는 같은 주제의 서로 다른 측면들이다. 물고기자리 사람들이 운명에 의해 희생당하거나 구원받는 경향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이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거의 사실이며, 보통 양쪽을 함께 체험한다. 왜냐하면 상처입은 사람만이 연민심을 갖기 때문이다. ...

 ...나는 여기서 두 마리 물고기가 헤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고기자리 사람들은 ‘어머니’의 혼돈스런 세계를 항시 가까이에 느낀다. 그 깊은 혼돈으로부터 이들은 창의적인 영감을 얻으며 ...이들 대부분이 내면적으로 커다란 고통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무의식 세계와의 이런 연대는 현 시대의 문화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항시 가까이에서 해체하려고 벼르는 ‘어머니’와 그 ‘아들’로 존재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남성의 마음은 흔히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 물고기자리에서는 예술적 창조 작업도 죽음과 해체의 경험을 요구한다. 이지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어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어설픈 시도로 끝나고 항시 제자리로 되돌아와버리는 물고기자리 사람들... 표면의 바로 아래에 불합리한 세계가 출렁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끈으로 묶여 심연에 그토록 가까이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여성은 그것이 훨씬 쉽다... 설령 이런 각본이 일부 성공한다 해도 여기에는 여신의 광란적인 어둠과 연인-아들을 탐식하는 성향이 숨어 있다.

 내 생각에 넵튠(해왕성)은 자신의 지배궁인 물고기자리에 대하여 그럴듯한 신화적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넵튠은 ...명목상 바다의 신이지만 ...땅의 신에 더 가깝다. ...물고기자리의 기묘한 남녀 양성적 복합성이 구체화된 특별한 전형을 신화 속에서 찾아야 한다면 나는 윌터 오토가 ‘창조적 광기’의 이미지라 믿었고 케레니가 ‘비합리성의 근원’이라 불렀던 디오니소스를 택하고 싶다. 그의 출생과 삶과 속성을 통하여 우리는, 정신적으로 자신의 아비인 제우스의 탁월한 높이에 이르면서 동시에 ‘어머니’의 광적인 환희... 그 깊은 곳에 몰입하는 물고기자리의 다이몬을 알게 될 것이다.

 ...정신과 본능의 양 차원이 통합된 어떤 느낌... 그것은 자연과(동물, 식물, 신처럼 느껴지는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된 의식 상태이다. 자연이라든가 죽음 없는 삶과의 이 황홀한 합일경은 신의 개성 속에서 예리한 고통의 체험과 연결된다. 디오니소스는 어찌 보면 크리스트의 어두운 측면, 즉 남근상과 함께하는 크리스트이다. 그는 크리스트와 마찬가지로 희생자인 동시에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의 이야기는 잔혹하다. 이 신은 자신과 대등한, 이를테면 칼리나 바스테트, 세크메트를 제외하면 다른 어떤 신도 거기 견줄 수 없는 야만성을 연출한다. ...물고기자리의 게걸스런 물고기가 화현한 존재이며, 구원자와 영원히 함께하는 괴물 티폰이다. 이것은 자연 속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야만성이며, 크리스트를 죽이는 군중이며, 아도니스를 물어뜯는 멧돼지, 자식들의 살점을 원하고 희생물의 가슴에서 심장을 뜯어내는 죽음의 여신으로서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자연은 또한 사랑스럽고 자비로우며, 디오니소스 역시 그런 존재일 수 있다. 그의 의례의 감미로움과 황홀함(해체된 동물들의 잔혹성과 신의 머리와의 통렬한 결합 양쪽을 포함하는)은 자연의 그러한 이율배반적 정신을, 즉 죽음과 함께 영원한 삶을 체험케 하는 다이몬을 만들어내었다.

 ...신과의 합일을 구하는 신비주의와의 이상한 연결, 그리고 펜테우스(디오니소스 자신의 인간적 모습)에 대한 디오니소스의 복수가 보여주는 잔인성... 그것은 성자들의 이야기에 항시 나타나는 모순이며 거기에는 거룩함과 사악함과 잔인함이 함께 존재한다. ...물고기자리에는 서로 반대되는 이런 두 가지 요소가 공존...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제우스의 아들로서 이따금 ‘지하의 제우스’라고도 불리는 젊은 신 디오니소스와 헤라 사이의 반목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반목(과 사랑)이며, 거기서 사랑과 미움, 소유와 파괴, 흐릿함과 게걸스런 호색성이 생겨난다. ...야만적 열정을 극복하는 것이 구원자인 아들의 과제이고, 열정 그 자체는 ‘어머니’이다. 그러나 추종자가 합일을 갈망하는 이 신은 이상하게도 참다운 남성 신격이 아니며,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나 구약 성서의 야훼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는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기도 한 자웅동체이다.

 이 신화의 드라마에서 물고기자리 태생이 어떤 측면을 보여주든 ...그의 내면에는 모든 연기자가 살고 있다. 신인 디오니소스와 방탕한 다이몬을 거절하면서 비웃는 에고인 펜테우스가 똑같이 미쳐서 찢겨 죽는 운명인 것을 보면 둘은 실제로는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신을 죽인 것은 티탄 족이고, 그들은 지상적 존재이다. 이것은 물고기자리의 정령이 물질계에서 자신의 육체를 감내하며 겪는 고통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육체는 정신의 감옥인 동시에 정신을 탐닉하는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정신 역시 구원자인 동시에 육체를 탐하기는 마찬가지다. 물고기자리에서 그 둘이 서로 사이좋게 공존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물고기자리 태생이 지닌 알코올이나 약물에 의존하는 성향은 정신을 구하기 위함이지만, 결국은 감옥인 자신의 육체를 망가뜨린다. 그러나 여기서 비롯된 커다란 고통을 무마시키는 애주가들의 노래를 통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더 큰 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색다른 다이몬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물고기자리 사람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펜테우스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그를 거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삶 그 자체에 의해 해체되어버릴 수도 있다. 메시아적 인물과의 동일시 또한 물고기자리의 주제이고, 희생양과의 동일시 역시 그렇다. 왜냐하면 이미 보았듯이 그 둘은 한 존재의 양 측면이며 결국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편 물고기자리에 내재하는 깊은 연민심과 바닥 모를 심연으로 통하는 그것의 건설적 운용 기술은 이러한 신과 이웃함을 감내하는 데 대한 선물이며 재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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