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새뮤얼, B. 쇼터, F. 플라우트 - 융분석비평사전. (동문선)



p.17-18- 정신 수준의 저하abaissement du niveau mental-

 집중력과 관심의 결여로 인해서 의식의 강도가 감소된 것. 무의식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내용이 나타날 수 있는 상태. 융은 어떠한 무의식적 내용들이 의식에 떠오르려고 하는 임박한 경계 상황을 기술하기 위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융은 의식의 긴장 완화가 주관적으로 냉담, 침울, 우울로 느껴진다고 기술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자아의 목적을 위해서 쓰여지도록 ‘에너지’를 더 이상 명령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한 상태는 원시인들이 ‘영혼의 상실’이라고 불렀던 것과 상응하는 듯하다. 정신 수준의 저하는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과는 상관없는 정신 조건에 대한 기술이다.


p.18-19- 소산 작용abreaction-

 고통스런 순간을 극적으로 재연하는 것, 깨어 있거나 최면 상태에서 그 감정적인 것을 반복하는 것, 비밀 털어놓기, “고통스러운 경험이 정신을 교란시키는 영향력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을 때까지 그 경험의 영향력을 없애는” 이야기의 반복.

 융은 소산 작용이 홀로 사용(암시나 소위 카타르시스적 방법에 의하여)되면, 불충분하거나 소용이 없거나 혹은 해롭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융은 치료의 목적을 억압된 감정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충격과 관련된 ‘분열’의 ‘통합’과 동일시하였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재-경험은 ‘신경증’의 두 극단을 보여 줄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콤플렉스’의 긍정적 혹은 예기되는 내용과 다시 한 번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p.19-20- 실행acting out-

 융의 ‘자아 팽창(inflation)’은 프로이트가 사용한 ‘실행’이라는 용어와 어느 정도 유사하다. ‘무의식적인 바람과 환상에 사로잡힌 주체’는, 그 실행에 의해서 그 바람과 환상을 직접적인 느낌으로 현재에 되살린다. 이 느낌은 그가 그 바람의 근원과 반복적인 특성의 인정을 거부함으로써 증대된다. ‘원형’과 ‘동일시’의 경우와 같이, 우리는 여기에서 미분화되고 아직 자아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실행의 충동적이고 강제적이며 극도로 반복적인 특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한 자아의 권위 결여는, 동인력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식적인 자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신적 내용의 침입에 관한 상징적인 본질은 무시된다.


p.154-155- 메타포metaphor-

 다른 것의 ‘이미지’를 언급하면서 어떤 것을 정의하고 탐구하는 것. 메타포는 의식적인 시적인 장치로 쓰이고, 이야기꾼들과 작가들에 의해서 신비의 미묘함을 제시하기 위해, 그리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자 고심할 때’ 항상 도움을 주는 용도로서 사용된다.

 모든 전제는 정신은 이미지를 따라 추론하며, 가장 합리적인 등가물은 비유 혹은 메타포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따라서 ‘확충’이라는 융의 방법은 해석을 위한 좀 더 완전한 준거 틀의 공급을 포함한다. 그것은 적절한 메타포를 찾는 것이다. 이러한 메타포로부터 합리적인 자아는, 정신의 메세지를 이해하는 데 근접할 수도 있고 확인할 수도 있다. 반면에 정신은 ‘의식’ 속에서 확장된 이미지에 의해 스스로 새로운 방향을 찾을 수 있다.


p.179-181- 인격화personification-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인격화되는 기본적인 정신 작용이다. 예를 들면 정신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격화된 모습들을 ‘꿈과 환상, 그리고 투사’에서 만나게 된다. 융에 따르면 전체 인격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기에 충분한 강도를 가지고 있거나 다수로 이루어진 정신적인 내용들은, 객관화되고 인격화될 때에만 비로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격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정신의 기능을 일련의 자동 시스템처럼 여길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떨어져 나간 것의 위협적인 능력을 없애 주며, ‘해석’을 가능케 해준다.

 그것이 ‘의식’ 속에서 통합될 수 있을 때까지 무의식적 ‘동일시’, 혹은 무의식적인 내용을 사물에 ‘투사’하는 것... “무의식이 자발적으로 인격화한다는 사실...” 그의 철저한 공식화는 심리적 행동이 인격화된 이미지들 사이의 패턴을 바꿈으로써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이러한 형상들이 자신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수용하며, 동시에 그 형상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통제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인정한다. 형상들은 인격화에 의해서 객관성을 획득한다. 또한 그 형상들은 무의식으로부터 분화될 뿐 아니라 서로 구분된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더 이상 합체하려고 하지도 않고 서로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p.124- 이마고imago-

 ‘이미지’ 대신 ‘이마고’가 사용될 때 이것은 이미지들이 주관적으로 생성된, 특히 다른 사람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p.20-21- 적극적 명상active imagination-

 융은 적극적인 명상 안에 현존하는 영상들은 꿈을 예견하기 때문에 성숙이 빨라진다고 느꼈다. 그는 이미지의 객관화가 꿈을 대치할 수 있을 때, 분석의 최후의 단계에서 이 적극적인 명상이 가장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환상들은 의식생활의 협조를 요구한다. 적극적 명상은 신경증 치료를 자극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상상력이 통합된다면, 의식생활의 수고로부터 도피하거나 대치물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신경증 치료에 성공할 수도 있다. 수동적으로 경험되는 꿈과는 반대로 이러한 상상력의 과정은 적극적이고도 창조적인 자아의 참여를 요구한다.

 무의식의 입구 바로 밑에 놓여 있는 내용들을 의식으로 올려보내는 이러한 방법에 정신적인 위험이 있다. 1) 만일 환자가 자신의 콤플렉스의 테두리 안에 계속 잡혀 있다면 이러한 과정은 소용이 없다. 2) 환자는 환상의 출현에 현혹되어 대면을 위한 그들의 요구를 무시한다. 3) 무의식적인 내용들은 매우 높은 단계의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출구가 있을 때 무의식적인 내용들이 인성을 점유해 버린다.


p.75-76- 분화differentiation-

 전체로부터 부분을 구분하기 위해, 이전에 무의식으로 결합되었던 것을 풀고 구별하기 위해, 그리고 해결하기 위해 융은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그리고 나서 ‘의식’ 속에서 좀더 견고하게 분화하고 자리잡았다는 의미에서, 다른 것들보다 더 분화된 인격의 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분화는 자연적인 성장의 과정이며, 의식적인 정신의 기도이기도 하다. 분화는 부모의 형상과 배우자에게 과잉 의존하는 것 및 상호 의존하는 것과 관련되는데, 예를 들면 심리적 기능들의 하나 혹은 여러 기능이 다른 것에 의해 오염되거나 혹은 자아와 그림자가 ‘미분화되었을 때’의 내적인 상태와 관련이 있다. 그 원래의 상태에서는 ‘대극들’이 융합되거나 합체된 상태로 존재한다. 의식의 통합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분화가 요구된다.

 ‘개성화’는 분화를 요구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투사에 의존하는 개인은, 그 자신이 무엇인지 혹은 그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약간 인식할 뿐이다. 그렇지만 융은 전체성보다는 구별과 분화가 합리적인 이성에 더 많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현대인에게는 그의 전체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해 줄 보상적 상징주의에 대한 필요성이 있을 것이라는 개념을 가정하였다.


p.79-80- 분열dissociation-

 분열은 인격 안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무의식적’인 단편에 관해서 언급한 것으로 일종의 ‘자신과의 불화’이다. 이것은 ‘전체성’을 구현하려는 개인의 잠재성의 붕괴를 암시한다. 분열은 ‘신경증’의 중요한 양상이다. 여기에서 분열은 “의식적인 태도와 무의식의 경향 사이의 불일치”로 볼 수 있다. 억압은 분열의 특수한 경우이다. 예를 들면 육체적 충동, 혹은 일반적으로 ‘그림자’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무능함이 분열로 보일 수 있다. 정신이 부분들이나 하위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능력, 혹은 내적인 형상들과 대화하는 능력의 발달은 자아에 의한 분열과는 다르다. 사실상 그러한 활동들은 강하고 의식적인 자아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융은 이따금 ‘분석’을 ‘분열을 치료하는 것’으로 기술했다. 여기에서 그는 기술적인 지식이나 ‘소산 작용’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사실상 ‘분석자와 환자’의 관계가 전이-역전이되는 양상들이 더욱 중요하다. 분석에 있어서 의향은 무의식적 내용을 의식 안에 동화시키는 것을 용이하게 해주며, 따라서 분열을 극복하게 해 준다. 하지만 융은 어떤 신경증에서는 분열의 단계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목표의 성취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p.162-163- 신경증neurosis-

 융은 당시의 정신의학이 정신질환의 정확한 분류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경향에 반대하였다. 융의 전반적인 태도는 신경증 그 자체보다 신경증을 가진 사람이 관심의 대상으로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신경증은 인격의 나머지 부분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신병리학적으로 장애가 있는 ‘정신’ 전체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석’에 있어서 콤플렉스의 내용은 어렵고 중대한 것이지 세련된 임상적 평가가 아니다.

 신경증이란, ‘정신의 자기 규제 기능’을 위한 정신의 자연적인 능력이 (일시적으로) 실패한 것이다.

 동시에 신경증적 징후들은 저변에 깔려 있는 장애나 불균형의 발산물 이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균형에서 벗어나 있고,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자기 치유에 대한 시도로 여겨질 수도 있다.

 신경증에 대한 임상학적인 묘사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융으로 하여금 전형적인 신경증을 종교적 문제처럼 형이상학적으로 언급하도록 만들었다.


p.169-171- 대극들opposites-

 한 쌍의 대극은 그 본질상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연 상태에서 그것들은 분화되지 않은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한 쌍의 두 반쪽들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이 와해되면 대립 작용이 더욱 강해지고, 신경증 장애시에 보이는 것과 같은 정신적인 불균형이 초래된다. 긴장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면 해결책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리고 유일한 교대는 다른 차원에서 좀더 만족스러운 정도로 이 두 가지가 화해하는 데서 찾아져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무의식적인 정신은 두 가지 대립되는 힘의 충돌로부터 세번째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성향이 있다. 이것은 비합리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어서 의식적인 정신에는 기대되거나 이해될 수도 없다. 직접적으로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없는 것으로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세 번째 것은 대립적인 관점의 어느 편에도 즉각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다. 의식적인 마음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대극들을 연합하는 것에 대해 전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관심을 끌 수 있고, 궁극적으로 이 둘을 서로 화해시킬 수 있는 것은 모호하고도 모순적인 ‘상징’이다. 이러한 딜레마에 어떠한 합리적인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갈등 상황은, 바로 ‘두 가지’ 대립이 비합리적인 ‘세번째의 것’, 즉 상징을 만드는 상황이다.

 이러한 갈등의 해결은 ‘합일(coniunctio)’에 의해서, 고아 혹은 버려진 아이와 같은 화해적인 모티프의 출현에 의해서 상징화될 수 있다. 대립이라기보다는 새로 태어난 형상, 즉 발생기에 있는 전체의 상징과 의식적인 정신이 지금까지 인식할 수 있는 것보다 초월적인 잠재력을 소유한 표상이 나타나게 된다.

 다른 모든 연합적인 상징들과 더불어 이러한 모티프는 구원적인 의미를 가진다. 예를 들면 이것은 갈등의 분열로부터 주체를 구원해 준다. 이와 같이 모든 상징들은 그것들이 분열적인 대립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초월하는 한에서 잠재적으로 구원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이라는 대극을 연합함으로써 인간 조건을 초월하는 상징들은, ‘신의 형상’ 혹은 ‘자기’의 일부라고 말해질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 대극들은 항상 분열되어야 하고, 영원히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는 갈등에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악’에 대한 선의 갈등, 혹은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나 비논리적으로 그것들은 무의식적인 ‘정신’ 속에서 합체된다. ‘원형’은 스펙트럼처럼 표현될 수 있는 타고난 대극적인 이원론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예를 들어 ‘위대한 어머니’의 원형을 고려해 보면, 좋은 어머니와 양식을 주는 어머니는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 있고, 나쁘거나 삼키는 어머니는 다른 한쪽 끝에 있다.) 분석적으로 말해서, 원형적인 내용은 그 스펙트럼의 전영역이 의식화될 때에만 통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심리적 결합 혹은 종합은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지속적인 통합은 불가능하다. 융은 대극들의 변환 요구에 대한 저항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인간 존재 안에 있는 ‘의미’의 발견밖에 없다고 믿었다.


p.244-245 초월적 기능transcendent function-

 ‘대극들’을 중재해 주는 기능. 이 기능은 ‘상징’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면서 하나의 정신적인 태도, 혹은 어떤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의 전이를 용이하게 해준다. 초월적 기능은 현실과 상상적인 것, 혹은 합리적인 자료와 비합리적인 자료 사이의 연계를 나타내는데, 말하자면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심연을 건너가게 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융은 “그것은 자연스런 과정이며, 대극들의 긴장으로부터 솟아나는 에너지의 표출이다. 그리고 그것은 ‘꿈’과 ‘비전’ 안에서 저절로 나타나는 일련의 환상, 발생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초월적 기능은 양편에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명제와 반명제를 서로 대등하게 만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를 결합시킬 수 있는 것은 은유적인 진술(상징)인데, 이것은 시간과 갈등을 초월하며 어느 한 쪽에 고착되거나 속하지도 않고, 양쪽에 어느 정도는 공통되면서 새로운 합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초월적이라는 단어는 어느 한쪽을 끌어당기는 (혹은 끌려가는) 파괴적인 경향을 넘어선 능력의 현존을 표현한다.

 융은 이 초월적 기능이 정신적 과정에서 가장 의미 있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초월적 기능의 간섭이 대극들 사이의 갈등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무엇을 위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하지만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융은 초월적 기능이 목표와 목적 없이 진행되지는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적어도 초월적 기능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는 갈등을 극복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하며, 일반적인 편향을 피하도록 해준다. 의식을 자극하는 초월적 기능의 역할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것과는 다른 관점을 제공하며, 마치 더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것처럼 가능한 해결책을 주장함으로써 이따금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p.111- 자웅동체hermaphrodite-

 남성과 여성이 ‘무의식적으로’ 결합된 최초의 단일체, 많은 이미지들 중에서도 우로보로스는 놀랍게도 그런 미분화된 상태를 상징한다.

 비록 이 용어가 양성 상태를 지칭하는 데에도 쓰이고 있지만, 연금술적으로 이 용어는 ‘작업(opus)이 추구하는 것’으로 종종 언급된다. 비록 자웅동체이기는 하지만 마지막 변형은 양성androgyne이라고 훨씬 잘 정의되어 있다. 연금술사들이 원초적 물질(prima materia)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실체는 남성적-정신적 양상과 여성적-육체적 양상이 합해져 있는 하나인데, 그러한 과정의 끝인 청금석(lapis)은 또한 이 두 가지 양상, 즉 분화된 형태이면서도 공존하며 동등하게 존재하는 이 두 요소를 포함하게 될 것이다.


p.39-40- 양성androgyne-

 ‘의식적인’ 균형 상태에서 남성과 여성이 띠고 있는 심리적인 ‘인격화(personification)’. 이러한 인물 속에서는 그 특징이 혼동되지 않으면서 남성과 여성의 원리가 서로 결합된다. 융이 연금술 과정의 마지막 생산물을 상징한다고 보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비유적인 존재이지 구별되지 않는 ‘자웅동체(hermaphrodite)’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남녀 양성의 이미지는 분석에 적절하며, 특히 ‘아니마와 아니무스’와 관련된 작업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연금술의 논문들 안에는 이러한 인물에 대한 언급뿐만 아니라 빈번한 예가 등장한다. 융은 여러 차례 하나의 예로서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는데, 예수 안에서는 ‘성적 분화’의 긴장과 대립이 남녀 양성의 보완성과 통합 속에서 용해되었다.


p.124- 근친상간incest-

 융은 근친상간적 ‘환상’을 정신적인 성장과 발전을 위한 복잡한 ‘메타포’로 여겼다.


p.204-205- 영원한 소년puer aeternus-

 영원한 소년이란 ‘원형’으로 언급되고, 인격의 신경증적 구성 요소로 보인다. 원형적인 우성 혹은 인간의 정신 안에서, 그리고 결합의 시도 안에서 활동하는 극단들의 결합쌍 중 하나에 대한 이미지로 여겨진다. (그 둘 중의 다른 하나는 senex이다.)

 융은 영원한 소년을 어린아이 원형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 반복적인 환상은 다시 젊어질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한 투사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려는 능력, 영원히 진화하는 상태에 있는 능력, 무죄함에 의해 구원받는 능력, 새로운 시작들을 시각화시키는 능력들은 이러한 발생기 구원자의 모든 속성이다. 영원한 소년의 형상은 ‘대극’들을 화해시키는 능력에 대한 상징으로 매력적인 것이 된다.

 영원한 소년의 원형이 인격의 무질서로 보여질 때 가장 놀라운 특성은 ‘영혼’에 대한 지나친 강조이다. 폰 프란츠는 생활에 정착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 소년(puer)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들은 초조하고 관계가 없으며, 이상적이고 항상 다시 시작하고, 나이가 들어가도 무감각한 것 같으며, 교활하지도 않고 상상력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 듯이 보인다. 그러나 소년은 또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일시적인 생활로 이르는 영원한 청소년기와 함께 힐먼은 소년에서 “우리 자신의 최초의 본성, 우리의 최초의 황금빛 그림자... 신의 사도로서 우리의 천사 같은 본질”에 대한 비전을 보았다. 그는 우리가 소년으로부터 운명에 대한 감각과 의미를 부여받는다고 결론짓는다.


p.224-225- 노년senex-

 이 말은 발달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원형적인 개념이다. ‘늙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인데, ‘현명한 노인wise old man’이라는 말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심리적인 특징들의 인격화를 언급하기 위해 분석심리학에서 사용된 노년이라는 말은 보통 나이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아이들도 균형, 지혜, 선견지명, 타인에 대한 관대함 같은 노년의 특징들을 보일 수 있다.

 노년은 종종 영원한 젊음과 대조적인 구분으로 언급된다. 청년의 병리학적 상태는 과도하게 모험적이고 낙천적이며, 상상력과 이상주의의 약동에 빠지는 경향이 있고 지나치게 정신적인 상태를 말한다. 반면 노년의 병리학적 상태는 과도하게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며, 체계적이고 우울하며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


p.164-165- 신성력/누미노즘numinosum-

 융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간에 신념, 즉 초월적인 힘을 믿고자 하는 우선적인 준비가 신성력을 경험하기 위한 요건이라고 생각했다. 신비적인 것은 정복되지 않는다. 사람은 단지 거기에 자신을 개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성력의 경험은 어마어마하고 강제적인 힘의 경험보다 더 상위의 것이다. 그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매력적이고 운명적인 ‘의미’를 간직한 어떤 힘과의 만남이다.

 융은 신성력과의 만남을 모든 종교 경험의 속성으로 보았다. 신성력은 개인적이건 집단적이건 상위의 ‘신의 형상’을 한 모습이다. 종교 경험들을 연구한 후에 융은 그러한 경험을 할 때에는 먼저 ‘무의식적’인 내용들이 ‘자아’의 억압을 돌파하고, 병적인 상황에서 무의식이 침입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무의식적인 내용들이 의식적인 인격을 압도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p.148-149- 마성인격mana personalities-

 전이 상태에 대한 연구들은 역의 시기, 혹은 경계선 상태에 입문자, 신참자, 환자, 혹은 정신분석을 받는 환자는 소위 마성인격들에게 특별히 매료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실제이건 투사된 것이건, 그러한 이미지들의 효과는 개인에게 ‘의식’의 실현 가능한 절정을 향한 방향감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물은 좀더 높은 단계의 의식을 획득했으며, 그것을 획득하는 능력이 확립되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전이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변이적인 인물로서 대단한 가치를 지닌 사람들... 자아가 그들에게서 그 힘을 억지로 떼어 오고, 개인과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그 힘을 요구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통합이 이루어진다.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자신의 반-주술적인 매력과 힘을 상실하게 되는 나중의 단계에서, 피분석자는 마성인격과 두 번째로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 그들은 내적으로 투사가 되었고, 보통 개인 자신의 성性에 따라 정신적인 형태를 취한다. 즉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 혹은 ‘위대한 어머니’, ‘현명한 노인’ 혹은 ‘지혜 있는 노파’로 화신한다. 마나는 ‘인격의 욕구된 중심’에 붙는다.

 자아가 자기와 의식적으로 직면할 때마다 마성인격들이 나타난다. 이상적이고 부패하지 않는 이미지로서 마성인격은 ‘입문initiation’의 과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본질적인 것이다. 입문initiation이 있은 후에야 사람들은 개성이 새로워진 느낌을 가진다. 전이 기간 동안에 잠재되어 있는 위험은 사람들이 마성인격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인데, ‘자아 팽창’이 바로 그 뒤를 이어 나타난다.


p.110-111-

 1) ‘입문(initiation)’은 치유를 암시해 준다. 2) ‘위대한 정신적 치유체계’인 종교적 기능 3) 문자적 혹은 상징적·육체적 혹은 재정적인 희생은 치유를 위해 필요하다- 무엇인가를 포기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4) 치유에 대한 보편적인 필요와 관심이 있다.


p.136- 입문initiation-

 인간이 감히 자연적인 본능에 거슬러서 행동할 때, 그리고 자신 쪽으로 추진하도록 할 때 입문이 일어난다. 선사시대로부터 입문 의식이 고안되었는데, 그것은 인생에서 육체와 영혼을 포함하는 중요한 전이를 준비하고 예시해 준다. 그러한 예식의 복잡성은 ‘정신 에너지’가 습득된 습관으로부터 새롭고 아직 익숙지 못한 활동으로 전환해야 할 때, 거기에 필요한 의식적 용기의 깊이와 넓이가 어떤가를 암시해 준다. 입문자에게는 존재론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나중에 외적인 지위와 마찬가지로 인정된 변화로 숙고된다. 의미심장하게도 사람들은 지식으로 입문되는 것이 아니라 신비 속으로 입문되며, 그렇게 획득된 ‘지식’은 그노시스(gnosis)라는 용어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입문 의식들은 능력이 모자란 사람의 죽음과 좀더 적합한 조건으로 갱신된 ‘재탄생’을 포함한다. 따라서 의식들은 신비하기도 하고 공포스럽기도 하다. 희생도 관련된다.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장기간의 고문이나 극심한 고통이라기보다는 바로 이 희생인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들은 일시적인 ‘자아’의 상실에 상응하는 역의 상태, 혹은 ‘전이’적 상태를 기대한다. 이것 때문에 입문자는 그가 장차 되고자 하는 존재에 투사된 ‘전이’를 행할 능력이 있는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어떤 사람, 사제나 스승, 마성인격을 동반하게 된다. 비록 처음에 투사의 내용이 동일한 입문자로 하여금 원하는 대로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 둘, 즉 입문자와 전수자 사이의 관계는 상징적인 하나이다. 입문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대극들’의 재결합, 정신과 물질을 포함하는 합일이 개인에게 일어난다.

 입문 의식은 정신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며, 모든 외적인 예식들은 변화와 성장의 타고난 심리적 패턴에 따르고 있다. 고질적이고도 널리 퍼지는 변화가 일어나는 반면, 의식이나 예식은 인간이나 사회를 분열되지 않도록 보호할 뿐이다. 그러므로 융이 다음과 같이 쓴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분석’시에 일어나는 무의식의 변형은 종교적 입문 예식들과 아주 비슷하지만, 그것은 원리상 자연스러운 과정돠는 다르다. 예식들은 자연적 과정 속에서 발달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기대하며, 저절로 만들어지는 상징 대신에 전통에 의해서 기술되고, 고의적으로 선택된 일련의 상징들을 선택한다.”

 융은 입문이 ‘치유’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면 그 유용성은 사라졌는데 심리적 동향은 남아 있고 변형은 허락되지 않을 때, 그것은 정신적 유기체 전체를 썩게 하고 오염시킨다.


p.217-218- 희생sacrifice-

 일상적인 용법에서 희생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끊는 것, 즉 포기하는 것이다. 두 가지 의미는 모두 심리적으로 생각될 때 희생과 관련된다. 그러나 두 가지 의미가 희생이라는 말의 원래적인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성화하는 것, 즉 성스럽게 만드는 것이 원래적인 희생의 의미이다. 포기하는 행위는, 인간의 현재 의식을 초월하는 어떠한 지시 원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융은 인생의 어떤 지점에 이르면 우리들 각자는 희생을 하도록 요청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소중히 해온 심리적인 태도, 신경증, 혹은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각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요구는 일상적인 조정에 대한 요구보다 더욱 커진다. 사람들은 더 큰 ‘의미’와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것을 위해서 의식적으로 자아의 지위를 삼간다. 선택이 수반되며, 하나의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의 전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융은 이것을 무의식적 내용이 자신을 드러내고, 대극들이 갈등할 때마다 수반되는 모형으로 보았다. 희생은 ‘의식(意識)’을 위해서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사람들이 드리는 희생의 선물은 그 사람의 인격과 자존심을 상징해 준다. 그러나 그 희생이 드려질 때, 우리는 희생이 함축하는 의미를 결코 완전히 깨달을 수는 없다. 전통적이고 신화적·종교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봉헌된 모든 것은 마치 그것이 파괴되어야 할 것처럼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생이 직접·간접으로 ‘신의 형상’과 관련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희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융은 희생의 필요를 고대의 미신적 잔존물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의 중요한 일부로 여기고 있다.

 희생에 대한 이해는 손실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확증해 주며, 이따금 분산의 효과를 역전시키기도 한다.


p.245-246- 변형transformation-

 변형은 ‘의식’에 이르게 하고, 지금까지 인정되지 못했던 심리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퇴행’과 일시적인 ‘자아감의 손실’을 포함하는 심리적 전이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서 결과적으로 인간은 더욱 완전하게 된다. 이것은 성취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변형이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융은 살아 있는 것은 정지해서는 안 되므로, 이러한 변형의 단계들에 확정된 명칭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변형은 심리치료의 목적, 억압의 심리적인 대극이라고 말해진다. ‘분석’에 있어서, 변형은 여러 면에 걸쳐서 ‘그림자’에 대한 주의 깊은 탐구를 포함하고 있다.

 변형의 상징성은 원시 성년식의 관례들, 연금술, 그리고 종교적 ‘의식’에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예식들의 전부는 전이시에 일어나기 마련인 심리적인 상해를 막으려는 의도로 고안되었다. 모든 변형은 초월과 신비의 경험을 내포하며, 상징적인 죽음과 ‘재탄생’을 수반한다. 비록 약간 과장해서 완전한 회복을 말하는 성향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단지 상대적인 변화가 있을 뿐이며, 개인의 지속성과 ‘정신’은 보존된다. 그렇지 않다면 변형은 인격의 분열, 건망증, 혹은 다른 정신병리학적인 상태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융은 주의를 주었다.

 부정적인 변형이 있을 수도 있다. 그때까지 융은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그는 ‘전체성’에 대한 ‘본능’, 혹은 ‘자아’와 ‘자기’ 사이에 계속되는 대화를 전제로 하는 자연적 과정으로서의 변형에 대해 언급했으며, 이러한 과정을 융은 ‘개성화’라고 언급하였다.


p.207-208- 재탄생rebirth-

 갱생과 부활·초월의 정신적인 경험, 그리고/혹은 외적인 관점에서 관찰될 수 없는 변화이다. 하지만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서 느껴지고 증언되는 실체이다. 이것은 ‘변형’의 ‘원형’과의 만남에 대한 주관적인 결과이다.

 ‘입문’의 과정이나 다른 종교 예식, 혹은 성례 예식에서 초월의 경험은 갱생의 성스런 의식들과 결부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주관적인 변형들은 인간 존재 안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 변화들은 정신병리학적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정신 수준의 저하, 동일시, 자아 팽창, 점유) 그것들은 약, 주문, 최면술, 혹은 다른 주술적 과정에 의해서 유발되고 변화된 의식 상태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관적인 변형은 또한 개성화의 자연스런 과정의 결과로 생겨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보다 큰’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느낀다.

 더 큰 자기를 인격화하는 내적인 형상은 전통적으로 ‘투사’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연금술에서 현자의 돌, 그리스도, 신 숭배, 구루(힌두교의 지도자), 인도자, 지도자 혹은 다른 마성인격으로 대표된다. 융은 이슬람의 신비주의로부터 신(Khidr)의 형상을 해석함으로써 재탄생의 과정을 설명하였다. 융은 그러한 이야기들이 우리를 사로잡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변형의 원형을 나타내고, 우리 자신의 무의식의 과정들에 필적하기 때문이다.


p.247- 트릭스터/장난꾸러기trickster-

 융이 트릭스터의 이미지와 처음 부딪혔을 때, 그는 위계질서와 중세 계율이 놀라울 만큼 발전되는 것과 더불어 카니발 전통을 상기했다. 중세의 계율에서는 악마가 ‘하나님과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융은 트릭스터가 메르쿠리우스의 연금술적인 형상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트릭스터는 짖궂은 장난과 악의적인 농담을 좋아하고, 모양을 바꾸는 능력이 있으며, 이중적인 본성(반은 동물, 반은 신)을 가지고 있고, 구원자의 형상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약탈과 고문에도 끊임없이 노출되는 충동을 지니고 있다. 대체로 부정적인 ‘영웅’인 트릭스터는, 다른 사람들이 이루기 위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실패한 것을 그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성취하려고 한다.

 하지만 트릭스터는 신화적 형상이며, 내적인 정신의 경험이기도 하다. 그가 나타나는 장소, 나타날 때마다 그의 인상적이지 못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의미한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변형시키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따라서 그는 에난티오드로미의 성향을 상징해 준다. 또한 그가 어색하고 ‘무의식적’인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그의 행동은 불가피하게도 ‘의식’에 대해 보상적인 관계를 반영한다. 융은 “그가 가장 분명하게 출현하는 모습을 보면, 트릭스터는 전혀 분화되지 않은 인간 의식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의식은 동물의 수준을 거의 벗어난 ‘정신’에 상응한다.”라고 쓰고 있다. 트릭스터는 동물보다 더 열등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본능에만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우고자 하는 열심에 있어서 그는 인간 의식의 온전한 양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트릭스터의 가장 놀라운 측면은 아마도 그의 무의식뿐만 아니라 무관계성과도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심리학적으로 융은 트릭스터의 형상을 ‘그림자’와 동등한 것으로 보았다. “트릭스터는 ‘집단적’인 그림자의 형상이며, 개인 속에 있는 인격의 모든 열등한 특징들의 총계이다.” 그러나 그의 출현은 원시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남아 있는 흔적에 대한 증거 그 이상이다. <리어왕>에서처럼 그의 출현은 실제 상황에 존재하는 동력의 덕을 보고 있다. 자신의 오만으로 인한 의식적인 대실수의 결과 때문에 미친 왕이 방황할 때, ‘슬기로운’ 바보가 그와 동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릭스터의 이미지가 적극적이 되는 것은, 재난이 일어났거나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트릭스터가 꿈, 그림, 동시적인 사건들, 말의 실수, 환상적인 투사와 온갖 종류의 개인적인 사건들에 출현할 때 보상적인 에너지가 방출되어 왔다. 하지만 그 형상을 인지하는 것은 ‘통합’을 위한 첫발을 내딛는 것에 불과하다. ‘상징’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원래 파괴적인 무의식 상태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으나 아직도 극복되지 못했다. 개인의 그림자는 인격의 연속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제거될 수 없다. 집단적인 트릭스터 형상은 계속해서 자신을 재건한다. 모든 자칭 구원자들의 영상에 활기를 돋우는 힘과 신비를 나타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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