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 영원한 소년과 창조성 (한국융연구원) 中 발췌.


p.240-

 이런 종류의 소설에서는 일상 현실이 갑자기 비밀로 가득한 다른 쪽 사건들로 해체되고 나서 -심리학적으로 말하면-무의식이 밀고 들어와 의식 세계를 붕괴시켰으므로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일어날 수가 있다.


p.39-

 ....사실적인 사건의 회상에 원형적인 공상이 보태지는 것인데, 대다수의 신화와 민담들의 시작에서처럼 절망적인 출발 상황이 발생하여 초자연적이고 신성numinos한 것이 나타나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민담에서 주인공은 숲속을 헤매거나 바다 한가운데서 길을 잃는 일이 많다. 의식의 인격이 해결책을 못 찾는 심리적 상황이 암시되는 것이다. 그것은 방향감각을 잃었다는, 삶에서 목표도 없고 앞길도 안 보인다는 느낌이다. 그런 순간들에는 차단된 에너지가 고이고, 그것이 삶으로 흘러들 수 없기 때문에 무의식 내용들을 배열시키고, 이 내용들이 초자연적 현상들로서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내적 차단이 아주 멀리 나아가면 환각들이 생겨날 수도 있지만, 최소한 꿈 생활이 강하게 활성화되며, 신성한 현상들이 여러 꿈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거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의 삶의 형태가 부서졌고 의식의 생활태도와 무의식 목표들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어야 할 때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


p.40-

 원래 그에게 비행은 소명이었지만, 점차 그가 맞닥뜨리지 못하는 새로운 것, 미지의 것에서 도망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삶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리비도가 어떤 다른 목표를 향하고 싶어서 오래 하던 활동으로부터 물러나면, 우리가 어찌할 바 몰라서 과거의 상태 속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는 퇴행을 의미하며, 이제 새로운 것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자신의 내적 감정으로부터 도피함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에너지 흐름과 같이 가지 않으면, 생텍쥐페리의 비행기 추락 같은 외적 사건이 생기거나 분명한 지시를 주는 내적 형상이 나온다.


p.44-

 ...무의식과의 모든 만남은 이와 더불어 시작한다. 즉 지금까지의 활동들이, 인생 목표가, 어떤 점에서는 삶의 에너지의 흐름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것이 막혀서, 우리는 정체하여 신경증적 상황에 갇혀버리고, 이 순간에 삶의 에너지가 고였다가 어느 한 원형적 상이 드러나면서 터져 나온다.


p.77-

 개성화 과정과, 벗어날 수 없는 내면 성장 과정... 여러분이 “아니”라고 말하며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여러분을 해치는 쪽으로 성장하며, 자신의 내적 성장이 여러분을 죽인다. 그러나 당사자가 더 큰 인격-즉 성장의 가능성-을 안에 지닌다면, 심리적 장애가 오게 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신경증이 어떤 점에서 긍정적 증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성장하려 하며 당사자가 현재 상태에서 괜찮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장을 수용하지 않으면, 그것은 여러분을 해치는 쪽으로 자라며, 그러면 부정적 개성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일이 일어난다. 개성화 과정, 즉 내적 성숙과 성장이 무의식에서 더 나아가며, 인격을 치유하기보다 파멸시키는 것이다. ...한 사람의 내적 성장 가능성이 위험한 것은, 그것에 죽임당하지 않으려면 그가 그것을 긍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선택은 없다.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다.


p.85-

 권태는 삶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주관적 감정일 따름이다.


p.143-

 한 인간이 신경증적 병고를 통해 상처입고 치유자 활동을 하도록 강요된 다음에 어떻게 자기 자신의 치유제를 발견해야 하는지... ...아무도 그를 낫게 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치유해야 했고. 스스로 샤먼 노릇을 해야 했고, 그러고 나서야 나았다. 그래서 치유하는 영웅은 창조적 출구를 찾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고 아무런 패턴도 따르지 않는 길을 찾는 사람이다. 정상적인 병자들은 통상적인 패턴을 따르지만, 샤먼은 통상적 치유 방법들을 통해 나을 수 없고, 특별한 길을, 그에게 맞는 단 하나의 길을 찾아야 한다.


p.145-

 고통- 이것은 자연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이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의식해서 느낀다. 그는 더 의식적이기 때문에 더 큰 고통능력을 갖는다. ...그는 더 많은 자아를 가져서 운명에 반항할 능력도 있으므로 느낌이 더 깊고 강렬하다. 여러분이 끔찍한 운명의 장난을 겪은 사람들과 일해 보았다면 그것이 어떤 반항을 의미할 수 있는지 보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할 수 없어! 왜 나에게 그 일이 일어난 거야? 그것은 돌이킬 수 없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 짐승은 이 강렬한 고통을 나타내지 않고, 계속 살려고 하다가 죽는다. ...빠르고 자비로운 종말이다. 인간은 현대 의학을 통해 그렇게 빨리 죽지 않으므로 우리 사정은 훨씬 나쁘다.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왜 나는 더 살아야 하지? 그런 경우들에서는 고통이 더 강렬하고 끔찍하며, 진정한 종교적 문제가 되어버린다. 그 때문에, 인간은 진정하고 강렬한 고통에 더 열려있으며, 그것은 우리 안에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과 상관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의 일부이고 피할 수 없다면, 나는 그것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의미를 알면 고통을 수용할 수 있지만, 아니면 수용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고통의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개성화 과정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모든 개체에게 그 이유가 다르고 독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독특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고통의 의미에 대해 질문할 때 또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의 더 큰 패턴을 찾고 있으며, 이는 왜 상처입은 치유자가 자기의 원형-그것의 가장 많이 퍼져있는 각인들의 하나-이며 모든 진정한 치유과정의 토대를 이루는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나는 고통이 수용되면 그것이 자기와 소통하는 매체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것은 고통이 올바른 방식으로 수용되느냐에 달려 있다. 체념을 갖고 수용하면 소용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수용하지만 거기에 체념의 흔적이 남는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 아무 소용이 없다. 긍정적 수용이어야 하고, 정말 수용해야만 의미를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끝없는 투쟁 뒤에 은혜의 순간이 오면 갑자기 그것을 수용할 수 있고 의미가 분명해진다. 무엇이 먼저 오는지조차 말할 수 없다. 때로는 의미가 먼저이고 긍정이 오지만, 수용하기로 결심하는 순간에 의미가 분명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이할 만큼 얽혀있다.


p.219-

 모성 콤플렉스가 그 증상을 갖고 그를 고문했지만, 증상은 동시에 질문이기도 했다. 그가 그렇게 이해할 수 있었다면, 증상이 자기한테 원하는 게 뭔지, 즉 무엇이 그 배후의 문제인지를 질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답을 찾았을 것이다. 고문은 절대적으로 이중적인 측면을 가진다. 그가 그것을 운명이 자기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이해한다면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만, 그저 달아나버린다면 그것은 모성 콤플렉스가 그에게 지우는 영원한 고통이다. 결정은 그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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