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 영원한 소년과 창조성 (한국융연구원) 中 발췌.


p.17-

 모성 콤플렉스를 가진 남성은 영원한 소년으로 머물고 싶은 성향과 언제나 싸워야 할 것이다. 무얼 가지고 그것을 치유할까? 자신에게 모성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그 남성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가 스스로 불러온 것이 아니라 그에게 발생한 그 무엇이다.


p.30-

 우리는 그가 어른들의 세계에 정말 들어간 적은 없다는 것을 본다. 그는 그들의 공허함, 백치스러움, 의미없음에 대해 말한다. 거기엔 브릿지 게임과 정치와 넥타이에 대한 대화들이 있고, 그것은 거부해 마땅한 종류의 성인 세계, 페르조나적 공허함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측면들도 같이 젖혀 놓는다. 이 1부의 감정 톤에서 우리는 그가 공상의 나라로서의 어린 시절을, 예술가로서의 삶을 생각한다는 것을 본다. 그는 이 아동기 생활이 참된 삶이고, 다른 모든 것은 돈을 좇아 달려가고 남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텅 빈 페르조나라고, 사람들이 참된 본성을 잃어버렸다고 믿는다.

 그가 성인 생활을 그렇게 보는 이유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구해서 어른 생활로 갖고 들어갈 수 있을 다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그 핵심에서 커다란 문제라고 본다. 즉, 어떻게 이 청춘의 이상주의적 공상 생활의 가치를 잃지 않으면서 그걸 벗어날 수 있는가? 온전한 전체이며 창조적이며 실제로 살아있다는, 청춘에 가졌던 느낌을 어떻게 어른이 되면서 잃지 않을 수 있는가? ‘양손에 떡’을 가질 수는 없고 무엇인가는 희생해야 한다고 코웃음치면서 말할 수 있지만, 내 경험상 그 말이 다 맞지는 않다. 아동기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건 정당하다. 다만 질문해야 할 것은 어떻게 그 세계를 잃지 않고서 어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비록 유치한 수준이지만 내면의 진짜 자기와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공상 속에 사는 이 아동기 낙원으로부터 사람들을 물론 쫓아낼 수 있지만, 그런 뒤에 그들은 완전히 환멸에 차고 냉소적이 된다. 전형적 영원한 소년이고, 작가가 되려 했지만 완전히 환상세계에서 살던 피분석자가 생각난다. 그는 한 친구와 같이 미국에서 건너왔는데, 그 친구는 프로이트식 분석을, 이 사람은 융식 분석을 받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1년 뒤에 만나서 관찰한 것들을 비교하기로 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나라들로 갔다가 약속대로 다시 만났는데, 프로이트식 분석을 받았던 젊은 남성은 문제들이 다 치유되었으니 집에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다 괜찮았고, 삶에 대한 자신의 유아적 태도를 통찰했으며, 모성 콤플렉스 및 다른 난센스를 포기했다는 것이었다. 내 피분석자는 그에게 이제 무엇을 할 건지 질문했고, 그는 모르겠지만 돈을 벌고 여자를 만나야 할 거라고 말했다. 내 피분석가는 자기는 전혀 치유되지 않았으며 앞일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작가가 되려 한다는 건 알고 시작도 했지만, 어디 살아야 할지 등등은 알지 못했다. 그러자 프로이트 분석을 받았던 사람이 말했다. “웃기지? 그들은 내게서 마귀를 내쫓았지만 더불어 내 천사도 내쫓았어!”

 그것이 문제다! 문제가 그저 유아적이며 모성 콤플렉스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하며 마귀와 함께 천사도 내쫓을 수 있고, 완전히 환원적인 분석을 통하여 모든 것을 아동기 감상으로 환원시키며 그걸 희생시켜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에 찬성할 이유가 있다. 이 남성은 어떤 점에서 내 피분석자보다 더 치유되었다. 다른 한편 그토록 지독한 각성은 더 살아갈 의미가 있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 같다. 남은 일생을 돈 벌며 소소한 시민적 만족들을 즐기는 게 보람 있을까? 내겐 그것이 별로 충족을 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 ‘치유된’ 남성이 자신의 마귀들에 대해, 그들과 함께 동시에 추방된 천사들에 대해 슬프게 말할 때 나는 그가 자신의 치유에 대해 별로 행복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냉소적인 각성의 어조는 내가 보기엔 치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p.32-

 그는 어떻게 성인 생활의 유일한 특징으로 보이는 냉철함에 빠지지 않고 이 어린이 세상에서 해방될지를 모른다.


p.52-

 아동기로부터 우리에게 붙어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까지 지고 다니는 착각들로 가득 찬 자루다. 미묘한 문제인즉, 이 착각들을 포기하면서도 냉소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어릴 때 환멸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 ...삶의 가혹함이 그들을 강제하는 것이지만, 그들의 상당히 신랄하고 성숙한 체하는 표현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 돌아갔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그들은 너무 일찍 아동기로부터 밀려나 현실로 내던져졌다.

 그런 사람들을 분석하면, 그들이 어린아이 같은 착각들의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 단지 잘라버렸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사랑에 대한 갈망과 이상들이 등에 진 돌 자루처럼 장애가 된다고 스스로 말해왔다. 그들은 그것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자아의 결정은 아무 소용없으며, 더 깊이 분석하면 그들이 아직도 어린 시절 착각들 속에 완전히 갇혀 있다는 것이 나타난다. 사랑으로 가득한 어머니나 행복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그리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만, 억제된 상태다. 문제를 그저 구석에 처박아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덜 어른이다. 삶이 거기 멈춰서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이 착각들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는 끔찍한 과제를 갖는다. 당사자를 그곳으로 밀쳐 보내야 하고, 그리고 나서 다시 제대로 끌어내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며 아무도 신뢰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이 어려움을 만난다. 이 처지에 박혀있는 사람에게 삶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 전이를 통해 그는 아마 다시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을 거라고 희망하기 시작하지만, 처음 나오는 사랑은 틀림없이 완전히 유치하다. 흔히 피분석자는 무슨 일이 생길지를, 그것이 다시 실망을 의미할 것임을 스스로 안다. 그건 맞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너무 유치한 그 무엇이 있어서 그것이 분석가나 아니면 삶 자체에 의해 거절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당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구제불능의 유아성을 갖고 무얼 해야 하는지 스스로 묻는다. 그들에게 도덕 설교는 고집부리는 어린아이에게만큼이나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방해하는’ 것이라고, 착각의 근원이라고, 화나는 일이라고 문제를 접어두면, 그는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고, 잘못된 방식으로 냉정하고 ‘어른’스럽다. 그러나 문제를 살아내면, 그는 상대할 수 없어지고 번번히 삶에 의해 야단맞는다. 그것이 문제다. 감정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요구들, 신뢰하는 능력을 밀어낸 사람들은 온전히 실재한다고, 온전히 자연스럽거나 정말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는 일이 없다. 신적인 아이를 밀어둔다는 것은 자신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역할을 연기한다! 적응하며 내내 살아갈 수 있지만,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연기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는 너무 유아적으로 행동해서 아무도 그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이것은 참 인격과 유아성 사이의 상태에서 신적인 어린이가 나타날 때의 문제라서 우리는 그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론적으로는 사태가 분명하다. 유치한 것을 잘라내고 참 인격을 그대로 둘 수 있어야 한다. 얽혀있는 두 가지를 어떤 식으로든 풀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분석이 잘 된다면 그 일을 점차 이루어내기도 한다. 정말 유치한 것을 끄집어내어 최종 처리하고, 창조성과 미래 삶을 구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보면 그것은 극도로 미묘한 것이라서 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p.93-

 ...이 괴로움의 목표는 그의 인격의 너무 유아적인 핵을 성숙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더 단순하게도 표현할 수 있는데, 유아적인 사람은 끔찍한 정서적 동요-올라가고 떨어짐-에 고통당하게 되고 끊임없이 상처받는다. 그것은 아주 옳은 일인데, 유치함의 치유제는 괴로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충분히 오래 괴로움 당했으면 발달하며, 다른 길은 없다. 유치한 인격 핵은 어쩔 수 없이 괴롭힘을 당한다.

 장미가 눈물을 감추는 대신에 울었더라면, 문제에 대해 말했다면, 슬픔을 말로 표현하고 잘못된 자존심 때문에 감추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들은 같이 성숙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숙하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말할 수가 없다. 유치한 지점이 건드려질 때마다 사람들이 울기 시작하는 건 거듭거듭 보게 된다. 몇 년 동안 그들은 분석에서 이 지점을 숨긴다. 정직하지 않거나 억압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결국에 튀어나오면 자신이 울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하며, 울어서 어차피 대화가 끊길 텐데 무엇 때문에 그 얘기를 하느냐는 것이다. 그걸 알기 떄문에 그들은 그 문제를 내내 옆으로 밀어두지만, 이는 그것이 더 이상 발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주 어려운 문제로서, 아픈 지점이 밖으로 나와야 하고 그는 괴롭힘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가 성숙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유치한 면이 아주 분리되면 더 위험한 일이 발생한다. 그런 사람들은 그 면을 내보이지 않지만, 그들과 같이 있을 때면 그들이 좀 가짜라는 느낌이 늘 든다. 여러분이 그들과 충분히 접촉을 해서 그들이 온전히 자기 자신인 적이 없으며 무엇인가 가짜라고 말할 수 있게 되면, 그들에게 눈물이 나온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울 때만 진짜인데, 당연히 울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유아성이 그 형태로 나타나거나, 유아적 그림자가 상대방에게 지나친 감정적 요구들을 하는 것이다. 억압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데, 억눌린 아이는 계속 울거나 화나서 구석에 앉아 있기 떄문이고, 그러니 잘라내야 한다. 그러나 아이와 가까운 접촉을 유지해야 하는데, 아니면 참 인격과의 접촉을 잃기 떄문이다. 그렇다고 아이를 단순히 내보낼 수도 없다. 내 경험상 아이는 괴롭힘당하고 거듭거듭 고통당해야 갑자기 어른이 된다. 어떤 남성에게 유아적 아니마가 있으면, 그는 감정 문제들과 실망감들을 엄청나게 많이 겪어내야 한다. 다 겪어냈으면 그는 여성들과 자기 자신을 잘 알기 시작하고, 그러면 정서적으로 정말 어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겉으로 이성적이고, 유치한 감정들을 억제하면, 전혀 발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처럼 처신하여 주변 환경에서 늘 괴롭힘당하는 것이 더 나은데, 그러면 고통당하고 원초적 물질prima materia이 천천히 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아적 그림자-신적인 어린이-가 인간에게 멍에처럼 지우는 커다란 문제다.


p.177-

 그의 냉소주의는 이제 자신의 내적 왕자를 공격하고, 그는 내적 이상이나 내적 진리를 찾으려는, 또는 한 때 삶의 목표와 의미라고 여기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할 위험에 처했다. 이것은 성공적으로 소년 신경증을 벗어나 발달했지만 중년이 되어 다른 어려움과 직면하는 영원한 소년의 전형적 상황이고, 위기 중의 위기다. 여러분이 문제 하나를 해결해서 그게 해결되었다고 느낄 때면, 언제나 그렇듯 다음 문제가 이미 기다리고 있다! 이 남성은 바로 2년 전에 소년 생활의 늪에서 자신을 꺼냈었지만, 무의식의 운전대가 다시 돌아갔다. 그는 전체를 다시 평가하고 그 전과 정반대를 해야만 했다.


p.127-

 어린이 같은 면은 생명의 흐름과 경신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신경증이 없는 한, 어린이는 새로운 것에 끊임없이 흥미를 느낀다. ...그는 생명으로 가득 차고, 그래서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이 순진한 활력을 그리워한다. 어린이는 경신의 내적 가능성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성인의 실제 생활에 어떻게 들어오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성인이 소녀나 소년 꿈을 꾸면, 그것은 순전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기능들의 수준에서 하는 새 모험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린아이 같고 아주 순진한 채로 남았고 경신의 매개가 되는 열등 기능과 관계있다. 주 기능이 낡아서 끝이 날 때, 열등 기능이 삶의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경험을 전달하고, 또한 우리가 어린 시절 이후 잃어버린 그 모든 순진한 기쁨들도 갖다준다. 그래서 우리는 새롭게 놀기를 배워야 하지만, 네 번째 열등 기능의 선에서 놀아야 한다. 가령 지성적인 사람이 어떤 종류든 지성적 놀이를 시작하면 소용이 없다. ...이 또한 다시 주 기능을 가지고 하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는 유혹은 커서, 논다는 생각을 수용하고 무엇인가 다른 것, 의무와 상관없는 것을 하려 하지만, 이를 다시 주 기능 안에서 하려는 것이다. ...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자 동시에 도피일 것이다. 정말 어려운 것은 열등 기능에 직접 주의를 기울여 그것과 노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아는 지휘권을 포기해야 한다. 자신의 열등 기능과 접촉하게 되면, 여러분이 아니라 그것이 놀이의 종류에 대해 결정하기 때문이다. 적절하지 않고 잘 안 될 거라고 여러분이 말해도 열등 기능은 반항적인 아이처럼 이 놀이나 저 놀이를 하겠다고 고집피울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열등 기능에게 강요를 할 수가 없다. ...여러분은 애써서 그것이 가능한 주변 환경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어려움이다.

 어린이를 마음대로 상자 속에 집어넣었다 꺼낼 수 없는 것처럼, 열등 기능도 정말 짜증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나름의 요구들을 가진 생명체이고, 그래서 자신의 길을 가려 하는 자아에게 그토록 짜증스럽다. 사람들 대다수는 열등 기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적이 귀찮게 굴지 않도록 무엇인가 주어버리려는 절반의 환대를 한다. ...때로 그것이 효과적이지만, 주 갈등에서는 효과가 없다. 작은 제물을 주는 걸로 이 요구들을 가라앉히지는 못한다. 그러나 인격의 열등하거나 유치한 면의 요구들에 자아를 굴복하도록 만드는 굴욕적 경험을 여러분이 수용한다면, 신적인 어린이가 생명샘이 되고, 그러면 삶이 새 얼굴을 갖는다. 여러분은 새로운 경험들을 하고, 모든 것이 달라진다.

 물론 어린이는 통일하는 상징이기도 하며 분리되었거나 분열된 인격 부분들을 함께 모은다. 이는 순진함의 특성과 관계있다. 내가 자신의 순진한 반응들을 믿으면, 나는 전체로 있게 되며 상황과 삶 속에서 온전히 있다. 그러나 사람들 대다수는 그것을 감행하지 않는데, 너무 남의 눈에 띌 것이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이해 못할 사람들에게 너무 눈에 띄지 않도록 교활해야 한다. 현명해야 하고, 유치하기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열등 기능과 놀기 시작하면, 모든 심리검사들의 밑에 깔려있는 자신의 ‘유일무이함’이 건드려진다.

 보통 사고형은 너무 사상가라서 자신의 감정들조차 적절하게 조직하며, 자신의 실제 감정들이 워낙 부적응이라 제대로 다루지를 못하므로 보통 자신의 감정에 가성적응pseudoanpassung을 한다. 열등 기능의 유희적 방식에 도달하기 위한 주된 방법은, 열등 기능을 덮는 가성적응을 긁어내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그것은 단지 가성적응이다. 다른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고 유치해서 내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그것에 다가가려 한다면, 자신의 사고의 순진성이나 자신의 실제 감정의 순진성을 파내서 자신의 가성적응의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여러분이 자신의 열등한 기능으로 내려가는데, 그것이 아주 원시적이고 느려서 이는 가장 시간을 잡아먹는 길일 것이다.

 열등 기능은 조직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매우 값비싸고 아주 많은 시간이 들며, 그 이유로 열등 기능은 우리가 삶에서 지는 십자가라서 어떻게 해보려 애써도 우리를 그토록 비효율적으로 만든다. 우리 인생의 일요일들과 오후들을 그것에 전부 갖다 바쳐도 어쩌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열등 기능이 살아날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흥미를 끄는 것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길이다. 열등한 유희적인 면이 쓸모있는 동기들을 앞에서 끌고 가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놀이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잘 처신해야 하는 상황에선... 그냥 무난히 처신하고... 그는 가성적응들을 해야 한다. 자신의 실제 감정들에 다가가려면 사고형은 그것들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상황을 찾아야 하고, 찾았을 때는 아주 달라진다. 우선 열등 기능을 적응필드에서 꺼내오고, 가성적응은 그것이 꼭 필요한 경우들을 위해 접어두어야 한다. 먼저 그가 놀 수 있는 하나의 테메노스Temenos, 즉 거룩한 작은 숲, 숨겨진 장소를 만들어내지 못했으면 아무도 열등 기능을 실제로 발달시킬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제일 먼저 로빈슨(무인도)-놀이터를 찾아야 하고, 관객이 다 없어지면 시작할 수 있다. 아이로서 한 장소와 시간이 필요하고 성인 관객이 간섭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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