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게임) 발더스게이트에서 시작해서. 아이스윈드 데일. 네버윈터. 토먼트 등등 하면서... 포가튼렐름 세계관에 로망이 있던 터라...
몇 년 전에 헌책방에서 업어와 놓고는. 정작 읽을 엄두가 안 나서-_- 쭉 방치해왔던 책이다.
이번에 융 관련 책에서 영웅 신화..에 대한 글을 읽고 나서. 다시 그런 데 관심이 생긴 김에 읽어보다. 얼마만에 읽는 판타지 소설인지 모르겠다.
천쪽짜리 두꺼운 영어 페이퍼백이라... 지금 안 읽으면 아마 평생 안 읽을 것 같아서 (...) 맘먹고 며칠 잡아서 쭉 읽어버리다.


(나중에 보니.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있다. 그것도 한참 옛날에. 음...-_-) (독해 연습한 셈 쳐야겠다...)


영어속독은 뭔가.. 독특한 경험이다. 한국어에선 잘 못 느꼈는데. 뭔가.. 속독이 독해와는 미묘하게 이해의 메커니즘이 다르다는 느낌이다.
뭐랄까.. 문장을 짚어가며 읽는 사고가. 눈으로 훑으며 뇌리에 스쳐가는 의미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구체적인 생각으로서의 해석 말고. 시선과 동시에 뇌리에 느낌처럼 스쳐가는 의미를 캐치하는 데에. 영어라서 더더욱 집중력. 정신력이 소모되고...
뭔가. 속도는 속도대로 나오더라도... 읽는 분량에 비해서. 한국어에 비해서 금방 피곤해져서 오래 못 읽겠다는 느낌이다.
(한국어에서도 아마 비슷한 느낌일테니... 책 읽는 속도가 느린-속독을 못 하는- 사람들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게임에서도. (더 유명한) 발더스게이트보다. 아이스윈드 데일 특유의.. 그 북쪽의. 야성적인. 야생의 분위기를 훨씬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눈. 추위. 얼음 호수. 산맥. 툰드라. 혹한과 생존. ‘frozen desert’... hordes of monsters. barbarians and wild tribes...


케셀akar kessell.. 처음에는 뭔가 찌질하고 비열하고.. 무능한. 경멸스런... 하찮은. 같잖은.. (묘하게 감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오다가...
나중에는 뭔가 pitiful... 연민섞인. 측은한 감정이 겹치면서. 상처입은 아기..의 이미지가 살짝 겹쳐보였다.
기초적인 욕망에 휘둘리는 백치스런 낮은 의식수준에. 무시당하고. 상처입고. 도구로 이용당하고 하찮게 버려진. 박해와 핍박의 이미지에서...
우연히 얻은 아티팩트 크렌쉬니본chrenshinibon의 막강한 힘과 충동질을 등에 업고. 전능환상으로 뻥튀기된 자아와 함께...
그동안 쌓인 곪은 상처. 분노. ‘나쁨’. 공격성을. 비뚤어진 방향으로 분출하는 느낌이다.
tyrant가 되겠다는 건. 공격성. 그동안의 박해에 대한 상징적 보복 + 존중..enforced respect에 대한 환상의 이미지고. (대놓고 유아적이라 더 안쓰럽다...)
크렌쉬니본과 데몬의 (합당한) 조언을 쳐내고. 자기 의지를 어거지로 관철시키려 드는 건.. 유아의 자아 분리..자기주장이 연상된다.


케셀이 강대한 힘을 얻고도. 아이 같은.. 무책임한. 굴레 없는 방자함. 과대자아와 오만hybris의 죄로 인해 몰락하는 것과 달리...
어린 바바리안 울프가wulfgar가 드리즈트와 브루노의 교육. 억제. 수련discipline을 통해 성숙한 자아. 영웅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대비적인 느낌이 있다.


드리즈트drizzt do'urden. outcast drow elf. among surface dweller. ranger of mielikki...
사악한 드로우 사회에서 쭉 이질감을 느끼고. 영웅적인 탈출 끝에 지상을 떠도는 선한 드로우..의 이미지는 내게 역기능가정에서의 탈출을 연상시킨다.
(농밀한. 끈적한. 어둠으로 가득찬 지하세계와. 드로우의 꽉 짜인. strict한 모계사회...에서. 뭔가.. 떠오르는 연상이 있다.)
드리즈트가. 보통 (보수적인) ‘좋음’에 속할 만한 어지간한 가치는 다-_- 갖춘. 대놓고 멋있으라 만든 느낌이 폴폴 나는 캐릭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짝 과할 때가 있는.. 비효율적인.. 이상주의와. 감정에 서툰... 고지식한. 고리타분한 면모가 살짝 답답하게 다가올 때도 있다.
그런 이상주의 덕분에. 역기능적이지만 안전을 제공하는 드로우 사회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탈출할 용단을 낼 수 있었겠지만...
솔직히.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경멸받아 가면서도 그들을 지키려 드는 건.. 나로서는 (감정적인) 이해 너머에 있다.
뭔가.. 순수한 악의 종족인 드로우... 스스로 탈출한 그 악의 유산으로부터. 온전히 분리되려 드는.. 선함에 집착하는.. 그런 느낌이 있는 것 같다.
(그가 지하에 남겨두고 온. 스스로 버렸다 여기는. 그 유산을 연상시키는 모든 걸.. 불편해하는 듯한 묘사가. 잊을 만하면 나온다...)


드리즈트drizzt도. 브루노bruenor도. 울프가wulfgar도.. 주인공들이. 매번.. 고고한. 정신적인.. stoic.. discipline..을. 귀아프게-_- 읊조려대고...
명예니. 전통이니에 어지간히 집착하는. 좀 고지식한. 답답한 면모를 보이는데... (작가의 가치관 자체가 그런 것 같다.-_-)
그 가운데서. 캐티브리cattie-brie가.. *그나마* 그런 ‘남성적인’ 원리 바깥에 서서. *그나마* 좀 생기있고 감정이 살아있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비중이 작음에도. 홍일점으로써. 뭔가. strict한 남성원리들 가운데서. 감정과 생기를 불러일으키고. 어떤 통찰. 자기성찰을 일깨우는...


드래곤 잡는 게 끝판왕일 줄 알았는데. 중간보스 수준으로 너무 쉽게...-_- 처치되고. 데몬도 마찬가지고. 마법사도... 음...
천장의 거대 고드름을 떨어뜨려 드래곤을 잡고. 갓 얻은 특화무기빨로 혼자서 상급데몬을 때려잡고...
너무 진행이 쉽게쉽게 가는 거 아닌가.-_- 드리즈트가 분명 유능함에도 무슨 킹왕짱 먼치킨 캐릭터는 아닌데.. 운이 미칠듯이 좋고.-_- 일이 잘풀린다.
모든 고통은 stoic하게 참아내고(무시하고). 모든 상처는 *다행히* fatal하지 않고. 뭐 좋은 게 좋은 거지.-_-
‘...that a true warrior always seemed to find the proper route. the one open path that casual observers might consider LUCKY.’ (음...-_-)


최종보스일 줄 알았던 드래곤+데몬+마법사가 되게 싱겁게 퇴치되는 걸 보고. 뭐야...했는데.. 뒤로 갈수록 오히려 더 흥미진진해진다.
초반엔 약간 정신력으로 우걱우걱 읽어나갔는데... 뒤로 갈수록 다음 내용이 궁금해져서 막 읽게 된다...
1장이 울프가의 성장 스토리였다면... 2장부터는. 브루노와 드리즈트가 각각 (더 높은 단계의 성숙에 대한)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느낌이다.


브루노bruenor battlehammer. 어릴 때 함락당한. 도망쳐온. 기억조차 지워진. 잃어버린 고향.. 미스랄 홀mithral hall을 찾기 위한. 숙원의 여정...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과 유산. 넘쳐나는 부와 보물들. 추억. 가족. 고향... 뭔가. 아련한. 감상적인. 회귀...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but.. 지금의 나는. 이런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회귀적인 이미지를 거부하고 있다...) (애초에 드리즈트가 이 모험을 달갑잖아하던 게 이해가 된다...)
(지금의 나한테는. 오히려. 드리즈트처럼. 영웅적인 탈출과. 나아감. 과거와의 분리를 다루는... 이미지가 더 필요하다.)


미칠 듯이-_- 험난한 여정과. 이런저런 도움을 받아. 결국. 그토록. 몇백년간 바래 왔던. ‘잃어버린 고향’. 과거의 영광. 미스랄 홀에 발을 들여놓고.
시체에서. 왕-아버지. 할아버지-의 무기. 갑옷. 보석박힌 왕관...을 수거하고. reclaiming.. return of the king을 자랑스럽게 외치지만...
버려진 도시의 어둠 속을 배회하는 섀도우들. 용광로를 차지한 사악한 듀에르가들. 그 위에 군림하는 섀도우 드래곤. 일행의 뒤를 쫓는 암살자까지...
동료마저 잃고. 지친 채. 비참하게 어둠 속을 헤매며. 자기가 찾던 고향이. 노스탤지어적인. 자기가 갈망해오던 그런 게 아니었음을 절감하고...
상처입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남은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몸에 기름과 불을 붙이고 돌진해 드래곤과 동귀어진.. 추락하며 상징적인 죽음을 겪고...
요행으로 살아남아. 어둠과. 사악함에 잠식된. 고향. 지하세계의 가장 밑바닥으로부터.. 홀몸으로 영웅적인 탈출을 감행한다.


드리즈트가 네스메nesme에서 민병대를 돕고도 반격받고. 실버리문silverymoon에서 입장을 거절당하는 장면은.. 뭔가.. 가슴아프다.
tolerance로 유명한 도시로서. 드리즈트가. 그의 종족의 잔혹성 때문에 겪어온. 편견과 배척을. 받아들여줄 거라는. 오래된 환상이 산산히 부서진...
(지하에서 죽기살기로 탈출했지만. 지상에서 끊임없이 배척당해 오고. 와중에 잡고 있던 한 가닥 환상마저 깨져 버린...)
결국 못 들어가고 도시 성문 밖에 캠프 치고 야숙하면서.. 드리즈트가 느낄 비통함이... 뭔가 되게 안쓰럽고 축 쳐저 보인다.
거기에 여군주 알루스트리엘alustriel.. the lady of silverymoon..이 나타나서. 위로의 말을 건네는데. 뭔가... 내가 드리즈트면 울었을 것 같다.-_-
결국 유토피아는 없고... 깨질 환상은 깨져야 한다. 그의 heritage를 부정하고. 단순히 편견없이 받아들여지길 바라기보다... he should earn it by himself.


말콜 할펠malchor harpell..의 indication을 따라 mask of magical disguise..를 얻고. 그 가면을 쓴 채로.. 사람들 사이를 거닐고. 대도시에 입성한다.
그의 검은 피부와 흰 머리카락. drow elf의 외양을. 그가 원하는 대로. 보통 surface elf처럼 보이게 만들어주는 가면...
적어도 그가 가는 곳마다. 편견과 공포. 적대를 불러일으키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혐오의 시선을 끌지 않는. 익명의 편안함..이 있음에도...
뭔가.. 엄연히 그의 근본이자. 과거이자. 현재인.. 자기 자신의 일부를 거부하고픈.. 자기부정의 감각과 이어지는 것 같다.


아르테미스 엔트레리artemis entreri. 뭔가 원형적인 이미지다... 절제된. 냉혹한 암살자. 기계같은 효율성. 감정이 배제된. 공포와 죽음의 화신...
훈련된 전사인 캐티브리마저 무력하게 벌벌 떨게 만드는. 원형적인 두려움의 대상... (혐오감과 무력감이 동시에 올라오는 느낌이다.)
드리즈트가 가혹한 언더다크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것과 달리. 엔트레리는 효율을 위해 ‘인간성’을 죽이려 스스로를 단련한...
드리즈트의 거울 이미지... 그가 그토록 애써 버리고 떼어내려 해온 것들의 현신과도 같은. 그림자의 이미지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렬한 증오와 ‘연결’을 느끼고... 엔트레리에게 붙잡힌 동료 레지스regis와 onyx figurine을 쫓아 대륙을 횡단해 가는 대여정이 이어진다.
‘...killing entreri would mean killing the darker side of himself, drizzt believed... ...entreri looked upon drizzt with equal disdain.’


엔트레리가 (굳이. 주의깊게) 세팅한. 대륙 끝 칼림포트calimport에서의 조우-대결에 앞서.. 드리즈트를 뒤흔든 캐티브리의 일침...
“if ye be killing entreri to free regis, and to stop him from hurting anyone else, then me heart says it's a good thing.
 but if ye're meaning to kill him to prove yerself or to deny what he is, then me heart cries.”
“look at the mirror, drizzt do'urden. without the mask. killing entreri won't change the color of his skin-or the color of yer own.”


드리즈트와 엔트레리의 대결. 서로가 서로에게. 살벌한. 증오섞인. “your life is a wasted lie.” 를 외치듯 선언하며. 서로의 목숨을 노린다.
엔트레리.. “a mask? put it on, drow. pretend you are what you are not! you are the one who wears the mask, you are the one who must hide.”
드리즈트.. “you are no more than a loaded crossbow, an unfeeling weapon, that will never know life.”
자신의 정체성... 존재양식을 증명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에서... 양쪽이 크게 상처를 입고. 결국. 드리즈트가 (간신히) 승리를 거두고..
엔트레리는 죽지 않고 달아나고. 드리즈트에 대한 증오를 간직한 채.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끝나지 않은 싸움의 여지를 남겼지만...
최소한 이 모든 과정을 겪고 나서. 드리즈트는 마스크를 내려놓고. 자신의 heritage를 부정하고 분리하려던 시도를 덜어낸다.
(분열적인 태도에서 떠오른. 공포스런. 파괴적인 그림자의 엄습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그 메세지의 일부가 건설적으로 받아들여진 느낌으로 다가온다.)


‘...(they) shifted uneasily at the thought of dining with a drow elf. drizzt smiled away the weight of their discomfort; it was their problem, not his.’
“let the wide world judge me for what it will, you know who i am.”


이번에 읽으면서. 영웅 신화가 인격 발달 단계를 나타낸다는 게... 무슨 얘긴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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