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구스타프 융 - 인격과 전이 (전집 3-) 中 여기저기 발췌. (솔)


p.33-37

 파우스트- 메피스토펠레스- “언젠가는 네가 신을 닮았다는 사실이 두려워지리라.”

 신과 비슷함은 분명 선과 악을 인식하고 아는 것과 관계된다. 분석과 무의식적 내용의 의식화는 일종의 우월한 관용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일어나도록 한다. 이 관용의 중재로 무의식적 성격에서 나온 매우 소화하기 어려운 부분들까지도 받아들이게 된다. 이 관용은 매우 ‘우월하며’ 현명한 듯 보이지만 온갖 결과를 빚어내는 멋진 제스처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이전부터 불안하게 서로 분리되어 있던 두 영역의 합치이다. 이 두 가지의 대극쌍의 통합은 결코 적지 않은 저항을 극복한 후로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성공한다. 보다 완벽한 통찰, 그 이전에 분리되어 있던 것을 나란히 세우는 것, 이로 인해 표현된 도덕적 갈등의 외관상의 극복은 우월감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은 아마 ‘신과 비슷함’이라고 표현될 법한 것이다.

 ...피분석자가 얻게 된 통찰은 대개 지금까지 본인에게 무의식적이었던 많은 것을 그에게 보여준다. 물론 피분석자는 그와 같은 인식을 자기 주변에 적용하고 이를 통해 전에는 보이지 않던 많은 것을 보게 된다(아니면 본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피분석자는 자신의 인식이 유용한 것이었다면 그 인식은 다른 사람에게도 유용한 것이라고 가정하기 쉽다. 이로 인하여 피분석자는 약간 불손해진다. 아마 본인으로서는 최상의 의도라고 믿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난처한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자기가 모든 문을 여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

 ...실제 분석에서 얻게 되는 통찰은 종종 괴로운 것이다. ...새롭게 얻은 통찰을 마음에 깊이 두는 사람이 있는데... 훌륭한 분석가로서 대단히 훌륭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선뜻 발표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분석가들이 본 심적인 문제가 너무나 압도적으로 엄청난 것이어서 학문적으로 건드리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편의 오만함이나 다른 한편의 소심함이나 공통점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양자가 모두 한편은 이쪽, 다른 한편은 저쪽으로 치우쳐 인간적 균형을 넘어서고 있다. 그 때문에 둘은 어느 정도 ‘초인적’이다. 그러기에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신과 비슷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은유를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면, 정신적 팽창psychische inflation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제안하고 싶다. 이 개념은 문제가 되는 상태가 개인적 한계를 넘은 인격의 확대, 즉 한 마디로 부풀어오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이런 팽창 상태에서는 평상시에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채워지게 된다. 그런 일은 존재 그 자체로서 우리의 한계 밖에 있어야 할 내용이나 성질을 제 것으로 삼는 사람들만 할 수 있다. ...


p.44-45-

 분석을 통해 개인적 무의식을 의식화함으로써 개체는 보통 다른 사람에게서는 이미 의식한 것인데 그 자신에게만은 아직 의식되지 못했던 것들을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을 통하여 개체의 특이성이 줄어들고 보다 집단적으로 된다. ...“누구나 자기 안에 어느 정도 범죄자의 요소나 천재와 성자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리하여 결국 이 세상의 흑백판 위에서 움직이는 거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생동적인 상像을 나타내게 된다. 즉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 것을 포함하는 그런 심상인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은 차츰 많은 성격의 사람들이 매우 긍정적으로 지각하는 세상과의 유사성을 준비해 나간다. 이런 긍정적 유사성은 경우에 따라서는 신경증(노이로제) 치료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상태에서 생전 처음으로 사랑을 일깨우고 사랑을 느끼는 데 성공한 몇몇 사례들, 혹은 불확실성 속으로 감히 뛰어들어 결국 그들에게 합당한 숙명에 맺어지는 사례도 보았다. 나는 이런 상태를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여러 해를 일에 열중하면서 느끼는 일종의 상쾌감에 머물러 있는 사례도 적잖이 보아왔다. 물론 그와 같은 사례가 분석 치료의 성과라고 칭찬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나는 그러한 사례를 반은 치유되고 반은 치유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


p.47-

 가면을 씀으로써 출중한 개인은 집단정신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런 격리가 바로 마술적 위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p.49-

 인격의 발전을 위해서는 집단정신과의 엄격한 구별이 절대로 필요하다. 모든 분별력의 결핍은 곧바로 개별적인 것을 집단적인 것 속에 녹여버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의식의 분석에는 개인적인 정신이 집단정신에 용해될 위험이 따르며 그것은 앞에서 시사한 반갑지 않은 결과를 빚게 된다. ...집단정신과의 동일시는 보편타당성(‘신 비슷함’)의 감정을 수반하며 그것은 이웃 사람들이 지닌 종류가 다른, 개인적인 정신 같은 것은 아예 무시해버리기 때문이다. (보편타당성의 감정은 물론 집단정신의 보편성에서 유래한다.) ...


p.54-

 집단적 무의식...의 더 깊은 층을 의식에 첨가함으로써 인격의 확대가 이루어지고 팽창 상태에 이른다는 것... 분석을 계속함으로써 우리는 인류의 비개인적이며 보편적인 근본 특성을 개인적 의식에 편입시키며 이로써 이미 앞에서 말한 팽창이 일어나는 것이다.


p.54-55-

 그러한 현상은 인간이 지식이나 인식에 압도되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이다. ...새로운 인식은 언제나 그렇듯 몇몇 사람들의 머리를 붕 뜨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가도취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창세기에 인식의 나무 열매를 따 먹는 것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타락으로서 묘사될 정도로 매우 일반적인 반응이다. 물론 왜 의식성이 좀 많아졌다고 자가도취에 빠져 그렇게 위험한 것이 되어야 하는지를 바로 납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창세기는 의식화를 금기의 파괴로 묘사한다. 마치 인식으로 인해 넘지 못할 신성한 경계선을 넘어선 것처럼 말이다. 보다 큰 의식에 이르는 모든 발걸음이 일종의 프로메테우스적인 죄라고 한다면 나는 창세기가 옳다고 믿는다. 즉, 인식함으로써 신들의 세계에서 불을 약탈해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제까지 무의식의 소유물이었던 어떤 것이 이러한 자연 그대로의 관련에서 분리되어 의식의 뜻대로 통제되는 것이다. 새로운 인식을 찬탈한 인간은 의식의 변화나 확대를 감수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의식은 다른 인간의 의식과는 다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때까지 인간의 영역이었던 것을 넘어선다. (‘그대들은 신처럼 되리라.’) 그러나 그로써 또한 인간으로부터 멀어진다. 이러한 외로움의 고통은 신들의 복수인 것이다. 즉, 그는 이제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그는 신화가 말해주듯 코카서스의 외로운 바위 꼭대기에서 신들과 인간에게 버림받은 채 쇠사슬에 매여 있어야 했다.


p.55-

 집단정신으로부터 많은 노력을 들여 이루어낸 이러한 단면을 나는 페르조나라고 이름하였다.


p.62- 페르조나의 퇴행적 복원-

 집단정신으로부터 개성을 해방하기 위한 여러 시도- 의식의 태도가 무너진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모든 것이 시초의 혼돈으로 되돌아가는 작은 세계의 몰락이다. 사람들은 내던져지고 방향감각을 잃어 무의식적 요소들의 기분대로 내맡겨져 있다. 키를 잃은 배처럼 되며 최소한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집단적 무의식으로 돌아간 것이며 이제부터는 이것이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이다. ...만약 무의식의 모든 내용이 의식에 도달하여 의식을 거의 섬뜩할 정도의 설득력으로 채운다면 개체는 그 무의식의 내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상적인 사례인 비판적 이해는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개체는 이러한 무의식의 내용에 압도될 것인가? 이런 사례는 편집증이나 정신분열증을 의미한다. 아니면 개체가 무의식의 내용을 단순하게 믿을 것인가? 이런 사례는 예언자 같은 괴짜가 아니면 유아적인 사람이 되어 인간의 문화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만다. 또는 개체가 무의식의 내용을 거절할까? 이런 사례는 페르조나의 퇴행적 복원을 의미한다.


p.66-67-

 사람들은 이 두(프로이트 아들러-) (최근 같으면 인지치료 포함-) 이론을 가지고 환자에게 그의 요구가 얼마나 유치하고 불가능하며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도록 시도해볼 수 있다. 아마도 환자는 결국 자기의 이성을 되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여자 환자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녀 외에도 그렇게 되지 못한 환자들이 있었다. 확실히 의사는 그러한 신경증 이론으로 체면을 유지할 수 있으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다소 인간답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무의식의 자기 조절이 존재한다는 사실... 무의식은 ‘요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다시 거두어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격의 통합에 매우 중요한 인식은 문제가 단지 유아성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멈춰버린 사람에게는 끝까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이런 인식의 문턱에서 뒤돌아서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었다. 나는 정신적으로 병든 몽상가이며, 무의식이나 그것과 관계되는 모든 것을 차라리 묻어버리거나 내던져버린다.” 그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도 강하게 갈망하던 것의 의미를 유아적인 무의미로밖에는 통찰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기의 요구가 바보 같은 것이었다고 이해할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고 체념하는 법을 배운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갈등에서 되돌아가 가능한 한 퇴행적으로 몰락한 페르조나를 다시 만들게 될 것이다. 이전에 전이에서 꽃피웠던 모든 희망과 기대를 도외시한 채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전에 비해서 더 작아지고 편협해지며 그리고 합리주의적인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결과가 응당 모든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습적인 부적격성 때문에 자유로운 상태보다 합리주의적 체계 안에서 오히려 더 잘되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쪽이 더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잘 견디는 사람은 파우스트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을 것이다.


 “지상의 일은 모조리 알고 있지만,
 천상을 향한 전망은 끊어져버렸네.
 그쪽을 향해 눈을 껌벅거리며
 구름 위에도 자기와 같은 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진정 바보로다!
 그보다는 이 땅에 굳건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아야 하리라.
 유능한 자에게 이 세상은 침묵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영원 속으로 헤매며 들어갈 필요가 있겠는가!
 인식한 것은 붙잡을 수 있는 법.
 이렇게 지상의 날을 지내면 되리라.
 유령들이 나타난다 해도 자기의 길만 가라.”


p.70-

 그는 여기에 제기된 문제를 깨닫기에는 이해력이 부족한 까닭에 그런 문제를 보지 못한 채 지나쳐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가 파우스트적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에게는 간소한 생활로 이르는 출구가 이미 가로막혀 있다. 물론 시골의 방 두 칸짜리 집으로 이사하여 정원을 가꾸고 순무를 먹는 것을 방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심혼은 이와 같은 속임수를 비웃을 것이다. 오직 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치유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페르조나의 퇴행적 복원이 인생의 가능성이 되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인생의 결정적 실패가 자신의 거만 때문인 경우에 한한다. 그는 자기의 인격을 축소하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밖의 모든 사례에서는 체념과 자기 축소는 하나의 회피이다. 이 회피는 결국은 신경증적 쇠약에 의해서만 올바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당사자의 의식에서 본다면 그의 상태는 물론 회피라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처리하는 능력의 상실이다. ...


p.71-72- 집단정신과의 동일시-

 두번째의 가능성은 집단정신과의 동일시일 것이다. 이것은 심리적 팽창의 수용과 같은 의미일 수도 있겠으나 이제는 하나의 체계로 높여진 것이다. 즉,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발견하게 될 큰 진리, 구원을 의미하는 궁극적 인식의 행복한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유약한 정신의 소유자는 그만큼 과도한 공명심과 허영심,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순진함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은 유혹에 넘어갈 위험성이 적지 않다. 집단정신을 향한 통로를 여는 것은 개인에게 삶의 새로운 변화를 의미한다. 그 변화를 기분 좋게 느끼든 불쾌하게 느끼든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확고히 유지하고자 한다. 한 사람은 그것에 의해 자신의 생활 감정이 고조되기 때문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에 의해 그의 인식이 풍부하게 증진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번째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열쇠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집단정신 속에 감추어져 있는 큰 가치를 버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모두 새롭게 획득한 인생의 심연과의 연결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동일시는 그것을 향한 가장 가까운 길인 것 같다. 왜냐하면 집단정신 속에서의 페르조나의 해체는 그가 이러한 심연과 맺어지고 모두 잊어버린 채 그 속에 몰입하도록 확실하게 초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한떄 우리가 그곳에서 온 근원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본래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것과 같다.

 내가 이전에 자세히 제시했던 것처럼 프로이트가 ‘유아 고착’ 또는 ‘근친상간의 욕구’라고 파악했던 퇴행적 동경에는 특별한 가치와 특별한 필연성이 있다. 예컨대 신화에서는 퇴행적 동경에 빠져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의도적으로 어머니인 심연의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바로 그 민족의 가장 강하고 가장 우수한 자, 민족의 영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다만 그가 영웅인 이유는 그가 마지막에는 잡아먹히지 않고 괴물을 이긴다는 점인데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이기기 때문이다. 집단정신의 극복에서 비로소 참된 가치가 나온다. 재보, 무적의 무기, 마법의 방어 수단, 또는 언제나 신화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만한 재산이면 무엇이나 획득하게 된다. 그러기에 집단정신과 동일시하는 사람-신화적으로 표현해서 괴물에 잡아먹혀서 괴물 속에 동화되어버린 사람은 확실히 용이 지키는 보배가 있는 곳에 간다. 그러나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큰 손상을 무릅쓰고 간다.


p.115-116-

 흔들린 이상과 믿을 수 없게 된 가치라는 낮의 세계와 외관상으로는 의미 없는 공상이라는 밤의 세계 사이에 서 있다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사실 이런 관점이 지니고 있는 섬뜩함은 너무도 크다. 그래서 안전을 향하여 손을 뻗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이다. 심지어 그 안전이 ‘뒤로 가는 손잡이’, 즉 자기의 어린 시절을 밤의 공포로부터 보호했던 어머니로 향하는 후퇴일지라도...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의존성을 필요로 한다. 마치 약한 사람이 기댈 것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원시적 정신은 깊은 심리적 필요 때문에 종교의 가르침을 산출하였고, 마술사와 성직자로 구체화하였다.


p.141-

 초월적 기능의 길이란 하나의 개인적 숙명이다. 그 길은 대개 그런 개인들에게 부과된 특이한 세상의 과제를 현실에서도 착수할 때 비로소 가능하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이다. 환상이란 생명의 대치물이 아니라, 삶에 대해 자기의 몫을 지불하는 자에게 돌아가는 심혼의 열매이다. 겁쟁이는 자기의 병적인 불안 이외의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하며 아무런 의미도 잉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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