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새니얼 브랜든 - 자존감의 여섯 기둥 (교양인) 中 군데군데 발췌.

 

 p.25-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란 것이 있다. 자존감의 중요성도 그 중 하나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는 스스로 내리는 자기 평가(self-evaluation)에 무관심할 수 없다. ...자존감은 인간의 근본 욕구다. 우리가 이해하거나 동의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자존감은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 내면에서 작동한다.

 

 p.63-

 (자존감이 우리의 기본 욕구인)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왜 이러한 욕구가 생겨나는지 모르고서는 자존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동안 이 문제가 철저히 무시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논의는 자존감이 본질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

 하등 동물들은 의식의 힘이나 자기 존재의 가치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

 우리가 지닌 자존감의 욕구는 인간 종(種)에 고유한 두 가지 기본적 사실에서 비롯한 결과이다. 첫째, 인간은 환경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생존하는 데 의식을 적절히 활용한다. 우리의 삶과 행복은 생각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둘째, 의식의 올바른 사용은 저절로 이루어지거나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의식 활동을 조절하는 것은 선택, 즉 개인의 책임감이라는 요소가 결정적이다.

 ...결국, 우리 삶은 사고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어쩌고저쩌고... 이 모든 것은 정신의 산물이다. ...문제 해결 과정에서 의식이 아니라 잠재의식을 활용하려 할 때나, 감정 또는 본능(잠재의식적 지각이나 통합)에 더 귀를 기울이려 할 때에도 역시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성공적인 삶에는 사유 능력이 필수 요소지만, 우리 인간은 자동적으로 생각하게끔 프로그램된 존재가 아니다. 이 점이 가장 큰 문제이자 기회이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정신은, 심장이 피를 내보내는 것처럼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 지식을 뿜어 내보내지 않는다. 가장 합리적이고 폭넓게 이해하고 있다거나, 심지어 분명히 이득이 된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정신은 저절로 나를 최선의 행동으로 이끌지 않는다. 인간은 단지 어떤 상황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본능적으로’ 생각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의식은 새롭고 낯선 것을 마주했을 때 ‘반사적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며, 이따금은 오히려 성능이 떨어지기도 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특별한 책임을 부여했다. 그것은 의식이라는 불빛의 밝기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다. 더 깊이 인식하려고 파고들거나, 아니면 굳이 인식하려고 애쓰지 않을 수도 있고, 적극적으로 의식을 피할 수도 있다. 우리에겐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을 선택권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책임의 뿌리이다.

 ...생각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선택’의 문제다. ...의식을 열어 문제에 집중할지, 아니면 의식을 닫아걸고 문제를 회피할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판단에 관여하는 것이 자유 의지다. 이때 내리는 ‘결정’은 우리 삶 전반에, 특히 자존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요점은, 자존감이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본성상 자존감은 여기에 틀림없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스스로에게 심각한 손상을 입히거나 무능하게 만들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막고 결국 자기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일을 습관적으로 반복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더 나은 선택을 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 줄곧 능력 있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다.

 ...우리가 행동하고 도전에 맞서고 도덕적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과 배후에 있는 정신 작용이 자기 평가에 영향을 끼친다. 행동과 결정이 분명히 필요한 경우에도 그것을 회피한다면, 이 또한 자기 감각에 영향을 준다.

 

 p.80-

 가치와 가치 평가라는 영역에서 달아날 수는 없다. ...우리는 가치와 가치 평가 영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점을 알아야 자존감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자기 행동의 도덕적 의미에 무관심하려고 애쓰거나 무관심한 척 가장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무관심할 수는 없다. ...명시적으로든 내밀하게든 자신을 판단하는 데 어떤 기준이 되는 가치는, 의식적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일 수도 있고, 합리적일 수도 있고 비합리적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인간은 특정한 기준에 따라 자신을 평가한다.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나타나는 현실과 이상의 차이는 자기 존중에 상처를 입힌다. ...

 

 p.116-

 자존감은 ‘결과물’이다. 내면에서 비롯한 실천의 결과물이므로, 우리는 자신의 자존감은 물론이고 타인의 자존감도 ‘직접’ 곧장 변화시킬 수는 없다.

 

 p.241-

 만일 지금 내가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특별한 상황에 있다면, 그것은 한편으로 자존감을 끌어내릴 수도 있는 특별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위선- 스스로가 판단하는 가치들과 충돌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에-) ‘나밖에 모를 거야.’라고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심각한 자기 기만이다. 내가 거짓말쟁이라는 건 나밖에 모를 거야, 내가 나를 믿는 사람들을 비윤리적으로 대한다는 건 나밖에 모를 거야, 애초에 약속을 지킬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는 건 나밖에 모를 거야. 이것은 곧 자신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판단만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자존감의 측면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이 더 두려운 것이다. 내 정신에 있는 내면의 법정에서는 나의 판단만이 중요하다. 나의 자아, 내 의식의 중심에 있는 ‘나’라는 재판관에게서 달아날 곳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나의 수치스러운 진실을 아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을 피할 수는 없다.

 

 p.247-

 자존감과 자아 통합의 관계는 상식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자신이 세운 가치에 부응해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만약 나의 가치가 비합리적이거나 잘못된 것이라면?

 우리는 본성과 욕구를 거스르는 가치 규범을 받아들이거나 거기에 몰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종교에서는 암암리에 혹은 노골적으로 섹스, 쾌락, 육체, 야망, 물질적 성공, (사실상 모든) 삶의 즐거움을 ‘나쁜’ (부질없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을 주입당한 아이에게 ‘자아 통합’을 실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어쩌면 ‘위선’만이 그들에게 계속 살아갈 힘을 주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가치를 따르는 삶이 자기 파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일단 알면, 단순히 자아 통합 없는 삶을 받아들이기보다 그 가치들에 의문을 품을 때가 된 것이다. 지금껏 선이라고 배워 온 것과 관련해 깊이 자리잡은 가정들에 도전하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

 (자아 통합을 실천하면서 혼란과 갈등을 빚는 예시들... 어쩌고저쩌고...)

 앞서 열거한 갈등 상황이나 그와 비슷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책무, 우선순위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모든 권위에 도전해야 한다.

 의식적인 삶과 자아 통합이 분명히 교차하는 영역에서는 우리가 배운 가치들과, 가족이나 자신이 속한 문화와 공유하는 가정들assumptions, 자신에게 부여되었을지 모르는 역할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지각한 것과 이해한 것에 들어맞는지, 또 우리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있으며 종종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라 불리는 것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지 의문을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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