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가씨

Posted 2018. 5. 22. 19:08, Filed under: structured thinking/reviews

저번에 꾼 꿈에서... 문득.. ‘조선은 무르고 흐리고 둔하다-’ 어쩌고 하는 영화 대사가 연상되면서... 찾아보고 싶어졌다.
영화가 나온 지 좀 되기도 했고. 여기저기서 워낙 스포를 많이 봐서... 대충 큰 맥락 정도는 알고 보다. (그닥 스포에 연연하진 않는 것 같다.)


“우리 나리마님은 세상 부자 중에서 제일 서책을 사랑하는 분이셔. ...이런 댁에 왔으니, 니가 얼마나 싹싹한 하녀가 돼야겠니?”
저택에 들어가는 거 보면서... 살짝 비밀의 화원?도 연상되고... (요런 게 몇 개 더 있었는데...) (레베카-)
고딕스런 음침한 대저택- 고풍스런 가구들. 항상 어둡고. 고요하고. 빛이 들어오면 안 되고. 뭔가 석연찮은 비밀이 있고. 삭막하고 억눌린 분위기...
그 안에 거의 평생을 갇혀. 틀어박혀. 골아프게 책이나 낭독하는 게 일과인.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귀족 아가씨...
“저기 큰 벚나무 보이지? 우리 이모가 미쳐 가지고 거기 목을 맸거든. 가끔 달 없는 밤이면 이모 귀신이 저기서 대롱대롱...” (음;;)


전체적으로 소위 ‘귀족적인’. 고고한... 훈육 통제- ‘예술’. 교양. 몸가짐. 매너. 겉보기식 체면치레... 등 억압적인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분열. 강박. 억압... 거기서 오는 생명력없음. 경직... 본능과 생명력이 억눌된 데서 오는 광기... 뭐 이런 이미지들...
(빅토리아시대스런 억압적인. 보수적인 느낌에 일제강점기가 -의외로?-되게 잘 어울리는 거 같다..)
말투도 (숙희 빼고는) 자꾸 문어체가 튀어나오고.. 귀족스레. ‘품위있게’. 무슨 문학 표현마냥- 대사 읊듯 고상하게 에둘러 말하는 입에 발린 말들...
(언어 자체가. 일본어는 귀족스런 고급 언어처럼- 예의 차리고 고상하게 붕 떠 있다가- 진솔하게 들어갈수록 조선말이 나오는 느낌...)


“얼마나 보람찬 일인가. 가만 두면 굶어죽을 것들을 부잣집 도련님 아가씨로 만들어 주다니.”
“끝단이는 제 새끼 말고는 절대 젖을 안 준다. 나같으면 안 그래. 나도 젖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애기들을 다- 맥여 줄 텐데...”

...생각보단 그리 험하겐 안 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ㅋㅋ 범모성애에서 살짝 이상주의적인 느낌도 받을락말락-


“염병... 이쁘면 이쁘다고 미리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냐... 사람 당황스럽게시리...”
“저희 이모는 잠 깨서 우는 아기에게 사케 한 모금을 먹여요.” 까진 그러려니 했는데... 하녀로 들어온 첫날;부터 대뜸 토닥토닥 자장가- 얼씨구-
나는 어릴 때부터도 내 자주성을 주장하고 싶어했지 막 애기 취급받는 거 별로 안 좋아했던 거 같은데...
얘는 애정결핍이라... 처음 본 하녀가 우쭈쭈;;하는 거에 반감은커녕. 오히려 더 바라고. 유도하고. 적극적으로 그럴 상황으로 이끌어가는 느낌이다..
“다들 그러던데, 난 엄마만 못하다고...”
살짝 애 상태에 머물러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문득. 아직 모성에 찰싹 붙어있는 애가 무슨 남자를 만나겠나- 싶은 (편견어린) 생각도 스친다...


“아가씨는, 제 애기씨세요.” “이모가 애기 씻길 때, 사탕을 물리거든요? 목욕이 얼마나 달콤한지 가르쳐준다고.”
아가씨 하녀 관계가 다 그렇지 (그런가?;;) 싶으면서도. 애기 다루듯.. 사탕이니 씻겨주니에서... 어떤 모성애착적인 퇴행적인 뉘앙스...도 느껴지고..
분위기 묘하네.ㅋㅋ 목욕.. 물. 습기.. 구강.. 눈물어린 표정도 그렇고- 디테일로 들어가네. 감독이 왠지 야동 많이 봤을 것 같다.ㅋㅋㅋ
(숨겨왔던 나~의 나와야 될 것 같은 느낌도...)


“하... 가만있자... 사파이어가 아니라 스피넬인데요?” “근데, 괜찮아요. 이게 창피하실 일이 전혀 아니에요. 왠만한 장물아비도 헷갈리는 거니까.”
난 첨에는 이게.. ‘애기’ 앞에서- 어떤 암묵적인 ‘유능함’의 우월구도를 드러내는 (똑똑하지 못한;;) 느낌처럼 다가왔었는데...
나중에 뒤에까지 보니.. 둘이 서로를 속이는 상황에서. 뭔가.. 슬쩍슬쩍 빈틈을 드러내며.. 좀 알아봐줘- 같은. 밀당ㅋㅋ스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가씨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미숙함을 어필헤서 애기처럼 *돌봄*을 유발하고- 숙희는 질투하는 티를 폴폴 내서 아가씨를 자극하고-
”내가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그분이 아니라.. 딴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도, 넌... 내가... 천지간에 아무도 없는 애가, 꼭 그분하고 결혼하면 좋겠어?”
이쯤 되면 거의ㅋㅋㅋ 걍 나 대화 엿들었소, 하고 대놓고 말해주는 거 아닌가.ㅋㅋ 좀 알아차려 달라고-
한꺼풀 아웅 하고 가린 밑에서 감정의 격한 기류가 오가는 느낌이다. 둘 다 내심 될 대로 되라는... 걍 확 터지기를 바라는 느낌이다..


섹스 도중에도- “ah... 저도 젖이 나와서 아가씨한테 먹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애정에선 모성애적 톤이 빠지지가 않네. (유사 모녀관계마냥...) 히데코한테 진짜 필요한 건 걍 엄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안쓰럽다...)



“조선은 추하나 일본은 아름답기 때문이요.” “아름다움은 그저 잔인한 법인데, 조선은 무르고 흐리고 둔해서 글렀소.”
=> 내가 이 영화를 찾아보게 된 딱 그 정서적인 톤... 그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단 느낌이다... (분열의 이미지... 꿈의 연상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


아득바득 고상하려는 태도와 어린애 혐오는 한 맥락 위에 있다.. (조금 덜 극단적으로는 동물혐오랑 비슷한 맥락에 있을 수도 있고...)
(온갖 씨발 가학적인 체벌. ‘훈육’. 통제의 이미지들... 무슨 인형마냥. 도구마냥... 인간성을 박탈당한. ‘쓸데없는’ 감정이 죄다 도려내어진...)


“네가, 조금은 미쳤다는 걸 난 알지. 아무래도 모계혈통이 이 지경이니까...
그래서, 훈련시키려는 거야.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도록.
안 되면 일본의 ‘정신병원’이라는 데로 보내버려야겠지. 음... 합리적인 독일인들이 설립했기 때문에 광증 치료에 아주.. 효과를 본다는구나.
땅에 구덩이를 파서 환자를 하나씩 넣고 뚜껑을 닫아둔다지 뭐냐.
좀 나아지면 말뚝에 사슬로 묶어 개처럼 기어다닐 수 있게는 해준다지만...”

(옆에서 보던 이모가 숨 헥헥- 쉬는 게... 숨이 턱턱 막히는 게.. 뭔가.. 공황 직전처럼- 탈출할 수도 없는... 안쓰러 죽겠다... ㅠㅠㅠ)


야설 낭독회... 뭔가 변태 오타쿠스럽다.. 자기 딴엔 열라 세심하게 세팅해서.. 배우까지 따로 ‘키워내서’ 하는 건데... 내용이 죄다;; SM스런...
청중 ‘신사’들... 귀족들... 정장 빼입고 젠 체하며 엣헴엣헴- 보면서 허- 오호- 탄식 보는 게 무슨 블랙코미디마냥 웃프다...
변태스러운 건 둘째치고... 뭔가 끔찍한 혼종스런 불일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잘난 훈육 체벌 훈련 지랄해서 하는 게 고작 이건가-
요런 변태 낭독회가... (so-called) ‘귀족스러움’의 뒤틀림의 끝판왕인 것 같다... 성욕이면 성욕이지- 그것조차 졸래 ‘고상한’ 뭔가가 돼야 됐을 거라는...
나가면서 악수하면서 “참 훌륭한 낭독이었어.” 지랄 머리로 사는 것들- 씨발-


(...처음의 불쾌한 인상과는 별개로... 굶어죽을 애 모집해서 ‘따뜻하게’ 호의호식시켜주며 연기를 시켰으면 뭐가 달랐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네.-_-)
(뭔가 ‘고귀한’ 아가씨가 ‘추락해서’ ‘정서적 학대’를 받아가며 ‘천박한’ 일에 ‘강제로’ ‘착취’되는- 그런 이미지가 있지 않나...)
(...쓰고 나니, 애초에 그런 고귀한 아가씨스런 게 엣헴엣헴하는 그 취향 안에 포함돼 있는 거라... 아무나 데려올 수 없었을 거란 연상도 들고-)



“좆같은 쓰레기 더미에서, 어떻게든 내 인생을 구해내려고 얼마나 분투했는데. 니가 그걸 망치는 걸 내가 구경만 할 것 같어, 이 썅년아?”
백작... 나한테는 이 백작이 이 영화에서 젤 생각할 꺼리가 많은 캐릭터인 것 같다.
시궁창 인생에서 맨손으로 기어이 스스로를 끌어올린 ‘생존자’이자. 사기꾼. 전략가. 이 모든 판을 짜고 추진하고 ‘떠먹여준’ 장본인-
“그녀 눈에는 욕망이 없어요. 그건 이미 죽은 혼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니. 훈육도 어지간히 시키시지요. 시체와의 교접을 선호하시는 게 아니라면.”
정서적인 감도 좋고. 추진력 갑에. 코우즈키의 ‘귀족’ 지향 콤플렉스를 면전에서 슬슬 긁을 정도로 대담하고.ㅋㅋ 능청스레 영민한 느낌이다.
아가씨한테 접근해서 ‘거래’를 제안하는 장면에선. 툭 까놓고 말하는.. 어떤 나름의 진솔함도 본 것 같고...


요 캐릭터를 걍 단순한 악역으로 볼 수는 없음에도.. 지금의 나한테는 살짝 달갑잖게 다가오는 면모가 있다. 어떤 한계가 느껴진다..
탈출 후에 히데코랑 마주앉아 스테이크 썰면서 자기 얘기하는 장면에서.. 그 정서적인 톤이 좀더 드러나 보이는 거 같다...

코우즈키마냥 변태스레 뒤틀리진 않았지만. 뭔가 겹치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 어떤 분열된 이상. 고고한 로망을 추구하는 태도인데...
내가 요런 류의- 분열적인 태도들의 어떤 생명력없음에 신물을 느끼고-_- 저항하던 차라... 아주 그냥...
기껏 아가씨 데리고 나와서는- 고급지게. 우아하게 뭔 놈의 스테이크 썰고 있는 것부터가.. 뭔가.. 한참 핀트가 어긋나 있단 느낌을 받는다...
그런 ‘귀족적인’ 이상에 아가씨가 포함될 거라는... 처음부터 그걸 바라고 왔을 거란 느낌이다.
“아가씨를 약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내가 아가씨를 사랑하다가 무슨 비참한 꼴을 당한대도, 날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음...)


(-지금의-내가 저런 아가씨 캐릭터에 이끌리지 않는다는 거... 어떤 ‘억압된’, ‘고귀한’, damsel-in-distress스런 느낌에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얘 백작보단 아가씨가 음험함으론 한 수 위란 느낌이다.ㅋㅋ 애초에 하녀를 잡아넣자는 것도 아가씨 계책이었고-)
(당장 자살하니마니 의욕 제로에 누가 꺼내줘야 겨우 나올려 하던 애가.. ‘사랑하는’ 애가 생기자마자 삶의 목표가 생기고 생기가 돌고- 바로 뒤통수 빡-)


“죽지 마세요 어엉어유ㅠㅠ..” 보면서 뭔가 찡하다.. (둘 사이에 팽팽하던 감정- 어떤 밀당의 끝이라는 느낌이다...)
애처럼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터뜨리는 느낌이다... 다들 절제하듯 한 꺼풀 가린 분위기 속에서 혼자 독보적인 생기가 느껴진다.
(나도 내 안에서 저런 생기를 좀 일깨워야 되는데...)
서재- 책확찢- 감정적으로 비참하게 억눌려온 아가씨를 ‘대신해서’ 울어 주고. ‘대신해서’ 분노해 주고. 차마 못 해온 깽판을 ‘대신해서’ 거하게 쳐 주고..
강박적으로 아득바득. 집착하듯 쌓여온... 책들.. 억압들을 대신해서 확 쓸어버리는... 뭔가 짠하고.. 비장하고.. 속시원한 느낌이다.
(물보다는.. 좀더 감정적으로... 분노와 정화purification. 쓸어버림purge... (+비춤illumination)의 이미지로 불을 확 싸질러버렸어야 됐는데-)
“...유명한 여도둑의 딸. 저 자신도 도둑. 소매치기. 사기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뭔가.. 억압되고 억눌린 감정과 삶의 의미를 대신- 확인시켜주는... 어떤 이상화된. 강한 ‘엄마’스런.. 느낌을 받게 하는 것 같다.
억눌린 감정을 알아주고. 우쭈쭈 보듬어 되돌려주고. 삶을 위협하는 것들을 치워주고. 담을 넘어 바깥으로 나가기 두려워하는 손을 잡아 이끌어주는 등-
지금의 나는.. 이런 식의.. 외부에서의 (이상화된) 구원을 바라는 걸 살짝 경계하고 있는 것 같다..
외부에 이상적인 구원자상을 투사하고 무력하게 남기보다. 그런 생명력을 내 안에서 일깨우고.. 스스로 구원자가 되어야 한단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구구절절 말이 길어지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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