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

Posted 2024. 4. 12. 14:59,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사람에 비해 일이 많은 회사에 다니면서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을 거의 매일 하면서 생산성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이전에 집에 갔을 때 저녁 먹으면서 아빠한테 들었던 얘기가 있다

아빠는 은행 비스무리한 데서 평생 한직장에서 수십 년을 일하셨고 지금은 은퇴한 상태이시다

신입 때 아빠는 은행 입출납 전표?를 쓰느라 거의 매일 밤을 샜다고 한다

그 당시엔 전자계산기도 없어서 죄다 주판으로 계산을 했었고 컴퓨터는 당연히 없어서 모든 기록을 수기로 남겼었다고 한다

계산을 틀렸다면 뒤로 주주룩 틀리니깐 대재앙이고 (처음부터 죄다 다시 해야 하고...)

손으로 쓰다가 한군데 삐끗 실수라도 하면 찍 긋고 그 부분만 다시 쓰는 게 아니라 그 한 장을 처음부터 싹 새로 다시 써야 했다고 한다

지금 같으면 엑셀에서 찍 잡아 끌면 끝날 일을 가지고 그 당시에는 사람 한 명이 매일 꼴딱 날밤을 새야 했다는 얘기다

 

(그렇게 몇 년을 일하고서 어느 시점에 위에서 컴퓨터를 보급을 내려줬다고 한다) (도스 계산기 및 워드프로세서 문서작업 등등)

(이 경우엔 개인이 문제의식을 느낀 게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온 변혁의 느낌이다.)

 

끽해야 수십 년도 안 지난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내 상황이랑 엮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열심히 일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오히려 지금 내가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셨을 거다

근데 아무리 그시절에 열심히 일해봤자 지금 게으름뱅이가 컴퓨터로 찔끔 찔끔 문서작업 하는 게 오히려 수십 수백 배 향상된 생산성이 나올 거다

그 얘기는 결국 사실 생산성을 1차로 결정하는 게 열심이 아니라는 거다

 

딱 눈앞에 일하는 관점에서 글씨 좀더 빠르게 쓰고 주판 좀더 빠르게 굴리는 방법을 연마해 봤자 근본적인 답이 나올 리가 없다

정말 필요한 일은 그냥 컴퓨터를 도입하는 거였고 그건 돈으로 해결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는 늦었다 쳐도 아마 외국에서는 다들 컴퓨터로 하고 있었을 거다. 당시 어딘가에는 이미 생산성이 수십 배를 앞서가는 개념이 있었다는 거다

그 관점을 찾아서 가져와서 체득하고 성공적으로 적용시키는 게 생산성을 가장 쉽게 다음 단계로 올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가장 고민없이 추진할 수 있는 곳까지의 범위일 수도 있다. 거기서 생산성을 더 올리는 건 훨씬 더 깊은 영역이니까)

 

일을 정말 잘 하는 방법은 일을 잘 하는 게 아니라 (할 필요가 없도록) 그 일을 없애버리는 거다 라는 얘기를 어느 유튜브에서 들은 적이 있다

 

업무의 생산성을 올리는 방법은 복잡한 흐름을 빠싹 꿰고 있는 게 아니라 업무 프로세스를 '그래야 하는' 형태로 정리하고 조정하는 거다 (리팩토링-)

정리 안 된 방에서 물건을 쉽게 찾는 방법은 혼자만의 기억법을 연마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는 물건을 치우는 거고

바닥에 온갖 잡동사니가 널부러진 방구석을 지나다니는 방법은 현란한 보법을 수련하는 게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도록 방을 깨끗하게 치우는 거다

 

다같이 돌도끼질의 달인이 되어 생활의 달인으로 TV출연까지 꿈꾸는 대신 그냥 혼자라도 전기톱을 사서 쓰는 게 나을 거다

이클립스 대신 인텔리제이를 사야 되고 푸티 대신 모바엑스텀을 사야 되고 단순작업은 매크로를 짜야 되고 챗지피티랑은 대화를 정말 많이 해야 한다

 

...이래봤자 회사에서의 결론은 별로 좋지 않았다.

윗선들은 이제까지 해오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일절 없었고 (이해는 한다) 주변 동료나 실무 상사들에게도 내 생산성 관점을 관철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애초에 내 업무가 회사 메인스트림과 동떨어져 거진 혼자 하는 업무였다는 것도 한몫했을 거다)

분명히 나는 내 업무를 점점 효율화하는 데 성공했고. 나는 점점 다음 단계를 보려고 하는데 주변과는 점점 관점이 안 맞는 상황이 반복되고...

 

(뭔가 쌓인 건 많은데... 후... 뭔가 구구절절이 될 것 같아서 걍 안할란다)

 

('너가 하면 더 빠르니까 그냥 너가 해'라는 말을 들었었고...) (나는 성과로 보여줌으로써 관점을 공유하길 바란 거지 내가 독박쓰길 바란 게 아니었다)

 

(과정에서 자동화가 꼭 좋은 게 아니다, 라는 말을 들었지만 자동화의 사이드이펙트일지언정 자동화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저차원을 자동화에 위탁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더 고차원으로 나아가는 존재가 될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불수의기관도 딱 그런 거 아닌가)

 

결국에는 주변을 더 낫게 바꾸는 것보단 이미 더 나은 곳으로 떠나는 것이 훨씬 쉽다는 (외면해왔던) 사실을 새삼 다시 느꼈다.

이 회사는 나한테는 여기까지구나, 라는 감각을 느꼈고 그 너머를 보기 위해 떠난다는 확신이 있기에 그 부분에 대한 후회는 일절 없지만...

정말로는 나는 남고 싶었고, 회사를 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환경으로 바꿔나가고 싶었다. (실패했지만.)

내가 바로 휙 떠나버리는 대신에 남아 있으려고 (회사를 내가 남아있고 싶은 환경으로 만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마 회사 사람들은 모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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