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 융 심리학과 고양이 (한국심층심리연구소) 中 군데군데 발췌-


p.16-

 많은 환자들은 연상을 하는 대신 해석부터 내리려 드는 경우가 있다. “아, 그건 나를 또다시 사로잡고 있는 부정적인 어머니 콤플렉스에요.” 그 때 여러분은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걸 잘 보세요. 그것에 대해 연상되는 게 어떤 게 있는지요.” 라고 물어야 한다. 즉 꿈에 나온 것이 있으면, 그게 어떤 것이든지 말하도록 해야 한다.


p.21-22-

 실제로 여러분은 될 수 있는 한 물고기나 나무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자연주의자처럼 이런 이야기들을 대해야 한다.

 이런 것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꿈을 살펴볼 때 거기에는 항상 분석가가 자신의 견해를 투사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하지 않고 아직도 엄마와 살고 있는, 사내답지 못한 젊은 남자가 분석 받으러 왔다고 하자. 그러면 여러분은 금방 이런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아, 이 사람은 여자 같은 젊은이로군.” 물론 이런 결론이 때로는 정당할 때도 있다. 그러고 나서 그가 큰 뱀에게 삼켜지는 꿈을 꾸면 이렇게 생각한다. “이 사람은 어머니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군.” 그러나 그것은 해석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무의식적인 상 속으로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훌륭한 직관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과정이다. 왜냐하면 무의식, 곧 무의식의 치유 과정은 결코 직접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기 떄문이다. 그것은 항상 매우 놀랄 만한 우회로들을 만든다.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 여자의 품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러나 그때 어쩌면 그에게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증진시키기를 촉구하는 연속적인 꿈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로 충분히 기민해야 하고, 동시에 충분히 객관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좀 이상하군. 이것은 내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아. 하지만 무의식이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가 보자.”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견해를 투사하지 않을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때 결국 매우 현명한 무의식의 방향 전환이 생기게 되고, 여러분은 항상 그것이 젊은 남자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도록 인도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예기치 않은 우회로를 만나게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현명하지 못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객관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성급하게 결론에 도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p.90-91-

 이야기의 전체 맥락에서 볼 때 그것이 인간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의식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남자 영웅 혹은 여자 영웅이 이미 인간이라면, 그것은 그것이 이미 의식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꿈의 주제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림자가 표범으로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그것이 의식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의 그림자가 어떤 여성으로 나온다면 그때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 꽤 분명해질 것이다. 그림자나 아니무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나는 대개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만 한다”든가, 아니면 “그것이 여러분 안에 있다는 걸 모르는가?”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인간이 실제로 인식하고 있는 영역 안에 있다. 그것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한, 그것은 그것이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어떤 이론적인 연습을 필요로 한다는 것, 말하자면 그것에 도달하든지, 아니면 그것이 그 자체 안 어디에 있는지 발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p.109-110-

 숲은 특히 신체적인 무의식bodily unconscious과 관련이 있다. 융의 논문, 메르쿠리우스 정령The Spirit Mercurius을 보면, 숲은 정신의 정신신체적인 영역psychsomatic realm과 관련이 있다. 민담에서 누군가가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면, 그들의 집단적 무의식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보아야 한다. 하늘로 사라진다면... 강에 빠진다면...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보고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녀가 무의식의 어느 측면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p.120-

 사람들의 무의식적 환상은 그들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운명이라는 그물망은 실제로 우리 인간의 무의식적인 환상의 바탕이다.


p.148-

 침대는 정신수준의 저하의 장소이다. 침대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무의식, 본능, 그리고 몸과 관계를 맺는다. 침대 밑의 먼지, 악마, 도마뱀, 거미, 생쥐, 그 외의 것들... 그러한 것들은 항상 개인적 무의식과 관계가 있다.


p.149-150-

 우리가 어떤 주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항상 그런 식으로 무의식이 괴롭히는 그 사람의 의식적인 태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보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가 그런 실수를 (일부러) 하려고 한 것은 아닐지라도, 무의식은 다만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즉 그가 분열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그를 늘 괴롭힐 것이다.


p.163-

 숲 속에 있는 이 궁전은, 그것이 집단적 무의식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야기의 끝에 그들이 거기 머문다면, 그것은 실제로 집단적 무의식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젊은 영웅이 집에 돌아가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이유로, 그것은 집단적 무의식 속으로 사라지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알다시피, 집으로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민담에서 영웅은 집으로 간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 새로운 어려움을 엄청나게 많이 만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어떤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 중에는 다른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형제들이 질투를 하거나 영웅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있다. 즉, 그들은 그의 보물들을 옮겨와서 자기들이 찾은 것처럼 가장한다. 그런 일은 매우 흔하다. 아니면, 그가 그의 어머니에게 키스하고 그의 신부를 잊어버린다. 아니면, 여러 가지 파국이 도중에 발생한다.


 심층으로 내려간 후에 누구든 낡은 현실, 즉 의식적인 현실과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 속에서 일종의 무시간적인 꿈의 상태로 남게 된다. 누구든 새로운 자각이 날마다의 삶에서 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만약 여러분이 융의 전기를 읽어본다면, 알다시피 그는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무의식을 깊이 탐구했으며, 아주 오랫동안 적극적 명상을 하면서 붉은 책Red Book이라고 불리는 내용들을 써 내려간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융은 그것들을 출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붉은 책에 기록한 것처럼, 적나라하게 자신의 경험들에 대해 말한다면, 그는 정신없는 신비주의자, 미친 사람 등으로 불릴 게 틀림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집단에 전달해 주기 위해서는 어떤 형식을 발견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여러 해 동안 큰 고통 속에 살았다. 그의 적극적 명상이 만족스런 결말로 끝난 후에도, 그의 경험들을 어떻게 깊이 깨닫게 하고, 그의 경험들을 삶과 다시 연결시키는 방법을 몰랐기에 말이다. ...자신이 발견한 보물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세계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집단에 전달해 주기 위해서는 어떤 형식을 발견해야만 했다.

 어떤 것들을 되돌리는 데에는 늘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마음의 심층에 있는 보물을 발견하거나 자기Self를 경험할 때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왜 그것이 그런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샤먼의 이야기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즉, 샤먼이 북극성으로, 아니면 지하세계로 굉장한 여행을 하고 되돌아올 때면, 그는 샤먼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부족에게 무언가를 가져와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필연성은 우리의 이야기에도 나온다. 왜냐하면 왕자는 기존의 집단적 질서를 변화시키기 위해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상기해 보아야 한다. 여기서 그는 집으로 가야 하고, 아버지에게 아마사를 가져가야 한다는 것, 그를 낳은 집단의식의 세계와 다시 연결된 후에야 비로소 그녀 곁에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다는 것을 고양이가 주장하는 것이 흥미롭다.


p.181-

 자아의 목적을 위해 무의식을 사용하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 이득을 얻기 위해 무의식과 관계를 맺으려는 생각을 희생해야 한다. 그런 것은 상대적으로 분석에서는 늦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당연히 모든 피분석자는 우선 무의식으로부터 이득을 얻기 위해서, 또 신경증을 치료받기 위해서, 또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충고를 얻기 위해서, 그 외에 다른 목적을 위해 무의식과 관계맺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의식과 오래 접촉한 끝에는, 이런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온다. 즉 무의식을,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충고하는 어머니로 대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온다. 


p.183-

 “깨달은 후에 당신은 주막에 들어가서 술에 취하고 흥청거리며 돌아다니고, 그저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다시 깨달음에 대한 것은 모두 잊어버려라.” 그러나 물론 이렇게 잊어버리는 것은 퇴행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이전의 무의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리 없는 진보이다. ...또한 분석의 건강한 지적 측면은 무의식으로부터 항상 통찰을 얻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것을 대부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보다 더 높은 목표일 것이다.


p.185-186-

 이전에, 고양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숲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그녀는 이제 그를 받아들이고, 그를 황제로 그리고 자신의 주인으로 만든다. 그들이 함께 살지만 이제 고양이는 갑자기 만족할 수 없게 된다. 그들에겐 인간적인 감정이 발휘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적인 애정이 연계되고, 인간적인 관계가 맺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고양이에게 문제가 생기게 된다. 전에는 고양이가 그런 것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것 같다. 아니면, 고양이가 그런 것을 그리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그녀와 함께한 영웅과 사랑에 빠지자 고양이는 인간이 되기를 갈망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신성한 충동이 육화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남자의 아니마가 여전히 사슴이나 고양이 안에, 아니면 어떤 다른 동물 안에 있다면, 그것은 점점 강력해지고 마력적이 되지만, 인간적인 특성이 결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신성한 고양이 아니마를 가진 남자, 혹은 신성한 곰이나 신성한 사슴 아니마를 가진 남자는 환상을 가지고 사랑에 빠지거나 매혹되어 사랑에 빠진다. 이런 동물들은 매혹적이다. 무언가 신성한 것은 신령한numinous 것이며, 신성력numinosum은 항상 매혹적인 것이다. 그것은 남자가 여성적인 것에 압도당하고, 매혹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는 여성적인 것과 인간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는 보기에 따라서는 너무나 압도당하고 너무나 매혹되어서,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는 여성을 숭배하거나 아니면, 여성을 뒤쫓아 다닌다. 그는 사슴이나 먹이감이 되는 동물처럼 그녀를 사냥한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조금도 인간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아주 정당하게, 원형적인 모습이 덜 신성시되고, 좀 더 인간적이 되길 원하며, 또 인간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인간적인 형태로 육화하고 싶어한다.


p.193-

 여기서 우리는 신성한 고양이 아니마, 여신을 보고 있다. 이제 인간이 되기 위해 그녀의 꼬리가 잘려져야 한다. 혹자는 대체로 무언가가 인간이 되려면 그것을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꿈에서 무언가가 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그때 우리는 피분석자에게 그것을 통합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비인간적 형태로 나타나는 한, 그렇게 되리라 기대할 수 없다. 그가 아직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는 그것을 생각해보고 그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아직 통합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아니마를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녀는 먼저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만약 꼬리가 무의식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꼬리를 자른다는 것은 그것을 작은 부분으로 분리하기 위해 분석하고, 구별하고, 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것은 인간이 우선 자신의 감정, 즉 자신 안에 있는 동물적인 감정을 분리시켜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런 감정을 고립시키고 나서 자신에게 “저게 대체 뭐야?”라고 얘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p.195-196

 꼬리는 분명히 여신 측면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동물 측면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육체적이고,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모든 반응이라 할 수 있다. ...

 우리 안에 동물이 있다는 것은 신성하고 본능적인 측면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꼬리를 자름으로서, 인간은 본능적인 측면을 인식하게 된다.

 고양이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인간이 된다. 그녀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꼬리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인간이 된다. 그것은 인간이 만약 그의 고양이 아니마를 의식화하기를 바란다면, 꼬리부터, 즉 모든 동물적인 반응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것을 성sex에 한정시키지 않을 것이다. 즉, 그것은 어떤 동물적 반응을 내포한다. 섹스할 때 가지는 감각이나 기분은 물론, 공격성, 성적 환상, 분노, 매혹적인 것, 몸에서 기인한 모든 것과 같은 육체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니마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모든 환상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동물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인간이 아닌) 신성한 존재이다. 여기서 머리를 잘라야 진정한 인간이 된다...


p.204-205-
 예를 들어 초기 기독교인들도 같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매우 자주 어떤 이교 신비주의 종파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다. “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오르페우스와 디오니소스와 동일한 분이다.” 그들은 포도가 땅바닥에 모자이크 되어 있고, 어떤 비문에 ‘예수 디오니소스Jesus Dionysus’라고 새겨진, 신비스런 제의적인 동굴을 뚫기조차 했다. 거기에는 전체를 과거와 재통합하고, 새로운 것을 과거의 메시지로 재해석하고, 역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굉장한 추세가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새로운 메시지와 과거의 메시지는 매우 유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저런 식으로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교부들은 항상 이런 주장을 했다. “비록 그리스도가 디오니소스나 오르페우스 등과 비슷한 것이었을지라도, 그분은 다른 분이시다. 그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그저 이미 알려진 것의 변이가 아니다.”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삶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다만 낡은 것일 뿐이고, 결국 진부하고 활기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이 바로 늙은 황제가 항상 삶의 새로운 가능성과 함께 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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