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메모들

Posted 2015. 5. 30. 15:14,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1.
지난 몇 년간 긁어모은 (다른 블로그 글들을 포함한) 텍스트 더미를 날잡아서 싸그리 정리했다.
(모아둔 글들을 쭉 보니, 수집하던 당시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보여서...-_- 스스로가 답답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랬다)
어찌 보면 옛날 한 시절을 청산하는 느낌이다. 판단보류 상태로 대충 쌓아놓은 것들을 분리해서 폐기처분한다는 느낌이다
...최소한 더 이상 (나와 비슷한) 타인의 불행에서 위안을 구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는 단단해진 것 같아서 스스로가 기특하게 여겨진다.

한참 방황하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내면에 스스로 만족할 만한 일관적인 기준이 어느 정도 자리잡았다고 느낀다
굳이 외부에서 가치관이나 판단 기준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믿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방향만은 옳게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결국 가장 강력한 (믿을 만한) 기준은 내면의 욕구에서 나오는 것 같다. 외부의 기준이 제아무리 요동치더라도, 욕구 자체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욕구를 빼놓고 기준을 다루는 건 의미가 없다. 애초에 온갖 기준이라는 게 저마다 서로 상충되는 욕구를 조절하기 위한 수단이니까.
솔직하게 표현된 ‘본질적’ 욕구 자체가 강력한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스스로의 욕구를 합리화하려 애써 고군분투할 필요가 없음을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주위의 기준과 당위에 휘둘리느라 스스로를 얼마나 방치하고 있었는지 생각하면 불쌍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_-

(욕구를 확고한 기준으로 치환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당장 떠오르는 욕구를 더 기본적인 차원으로 인수분해하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내게 요구된 매사에 모순된 기준과 가치관 사이에서 늘 의구심에 시달려오던 내게는, 이런 확신의 느낌 자체가 그리 익숙치 않다 (...ㅠ)
어쩌면 지금의 나는 지금까지 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확신에 차 있을지도 모르겠다. but 이제 겨우 시작이다. 아직 갈 길이 만 리다...

2.
“... 억압에 대한 프로이트 이론이 변하지 않고 항상 유지해 온 핵심은 견디기 힘든 갈등을 의식 밖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것, 이렇게 억압된 것들은 꿈, 농담 그리고 신경증적 증상을 통하여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안나 프로이트는) 또한 억압에 필요한 에너지양이 많을 뿐만 아니라 억압은 생동감 있는 활동을 제한한다고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억압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참여하는 경험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설명하였다. 안나 프로이트는 예를 들어, 한 어린아이가 그 시점의 어린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성에 대한 호기심보다 훨씬 호기심을 적게 보인다면 이 아이는 내면에서 성에 대해 갈등을 느끼고 있으며, 이러한 갈등은 성인이 되어서도 성에 대해 억압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하였다. ...사람들은 연령에 맞는 특정 주제에 대해 관심과 호기심을 보이게 마련인데, 그것이 현저하게 결여된 것은 억압이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무기력에 대해 이런저런 전문적인 썰들이 많지만, 돌고 돌아 결국에는 가장 기본적인 (추상적인) 이론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 같다.
딱히 외부적인 요인이 없어 보이는 (만성적인) 무기력은 결국 내면의 억압의 산물이다.
(만성적으로 억압에 쓰여 오던 에너지를 해방하여 실생활에 돌리는 것이 무기력을 해소하는 본질적인 방법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스스로의 억압된 면모-그림자-를 의식화하는 과정과, 억눌려 온 해당 요소들을 ‘적절히’ 풀어주어 자아관에 통합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내 안에 소통할 꺼리가 없다는 식의 불안은, 내 안에 억압된 게 너무 많아서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얘기다. 억압된 걸 파헤쳐야 한다)

...인지행동치료 쪽 지식들이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정말 많은 도움을 주긴 했지만, 나아지는 데 direct한 도움이 되었냐면 글쎄다.-_-
핵심신념을 바꾸는 게 단순히 다르게 생각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 새로운 신념을 진심으로, 바닥에서부터 믿어야 소용이 있는 거다
사람은 애초에 논리와 이성으로만 돌아가는 동물이 아니다. 합리화나 인지부조화 같은 방어기제가 괜히 주요 방어기제로 작동하는 게 아니다
그걸 진심으로 믿기 위해서는, 논리 이상의, 결국 핵심신념과 관련된 무의식을 다루는 과정이 필요하다. 단순히 문장만 바꿔서 읊는 걸로는 소용없다.

(어느 순간, 이게 정말 내 상식을 ‘바닥부터’ 새로 쌓아올리는, 내 왜곡된 인지의 합리성을 벗어난 바깥쪽을 다루는 일이라는 걸 느낀 계기가 있었다.)
(핵심 신념이라는 게 말 그대로 핵심이니까 핵심 신념이라는 건데, 그 핵심을 기초로 쌓아올린 이성이 그 핵심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3.
‘강박적인 거짓말’... 딱히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딴에는) ‘상황을 매끄럽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사소한 거짓말-생략-얼버무림들.
작게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때 좀 더 극적인 양념을 치는 경우에서부터, 복잡한 얘기를 하기 귀찮아서 다 쳐내고 대충 얘기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불편한 만남을 피하기 위해서 없는 약속이나 일정을 만들어내고, 불편한 순간을 대충 넘기기 위해서 가짜 감정을 만들어 내보이는.
내가 이런 행동들을 자각하고, 이런 ‘강박적인 거짓말’을 꿈 속에서까지 타파하려 든다는 건 의미있는 일이다. 눈에 띄게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고 있다...

4.
“합리화 기제는 용납하기 어려운 개인 자신의 태도, 신념, 또는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으로써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실제로는 행동이 그런 정당한 동기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고 여러 동기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 용납될 수 있는 동기만을 선택하여 개인 자신의 행동이나 태도가 정당한 것인 양 나타내고자 한다. 이런 방식에 의해 개인의 행동 결정에 보다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기 중심적인 동기는 감추어지고, 합리적이고 정당화될 수 있는 동기만이 노출되고 의식화된다. ...이러한 개인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함으로써 상당한 정서적 안정감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행동의 변화는 어려울 것이다. ...매우 강한 합리화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개인은 심리적인 갈등을 거의 느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5.
여차저차해서, 최근의 내 삶의 테마는 (타인에게) 기대하지 않는 삶, 개의치 않는 삶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미련갖지 않는 삶까지.
타인에 대한 일방적인 기대는 항상, 언제나 궁극적으로 좌절당하기 마련이다. (내가 타인으로부터 일방적인 기대를 받을 때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기대를 버리고 나면, 내가 원하는 걸 솔직하게, 뚜렷하게 표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상대가 어련히 알아서 해줄 거라는 기대가 없으니까.
이런 삶의 태도에서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소통의 수고로움에서 도피하기 위한 동화적, 유아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기대를 버린다는 건 곧 깊게 판단하지 않겠다는 거다. 타인의 반응과 감정을 온전히 그 사람 몫으로 놓아두는 데 심적인 부담이 줄어든 게 느껴진다.
1) 상대가 한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2) 의미가 헷갈리거나 뭔가 찝찝하면 “아니면 아니라고 대답해줘요...” 솔직하게 물어보는 것.
3) 배려하는 마음에서 한 번 권했는데 상대가 거절하면 (불편해하지 않을까 맘졸이지 말고) 진짜 괜찮은가 보다, 하고 맘 편하게 띵가띵가하는 것.
(그쪽에서 배배 꼬아놓은 말을 내가 일차원적으로 받으면 손해보는 건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다... 지금의 내겐 스스로를 먼저 챙기는 마인드가 절실하다)

가장 대표적인 미련은 ‘내가 조금만 더 시도하면 상대방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미련인 것 같다. 그런 기대가 오히려 일을 꼬아놓기 쉽다.
사람은 스스로 준비되기 전에는 바뀌지 않는다. (스스로 준비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바꾸기 힘들다는 말이다)

6.
블로그 즐겨찾기된 어떤 사람이 쓴, 다분히 감정적인-_- 기독교 까는 글을 언뜻 읽었다
흔히 이런 글에서 자주 소재로 쓰이는 구약 내용으로, ‘기독교의 신은 질투하는 신이다’ 등등 뻔한 얘기 하면서 신을 비꼬는 내용이었는데
예시로 든 구약 사례와 신의 대화들-인간을 상대로 저토록 질투, 분노 등의 강렬한 감정들을 드러내는 모습들-을 쭉 보다가
문득 그놈의 (기독교의) 신이, (전지적이기보다) 지독하게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기독교에 대해 그리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진 않고, 예전에 구약 읽을 때는 나도 부정적인 느낌밖에 못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살짝 관점을 바꾼 것만으로 저렇게 취약하고 fragile하고 vulnerable한 나약한 인간상이 신에게서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일 줄은 생각을 못 했기에
지극히 인간에 가까운 기독교의 신에게 뭔가 짠한 연민이 이는 걸 느꼈다.-_- 등을 보듬어주고 싶은 느낌이다

“...상대가 두려움이나 불안 때문에 그런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 두려움을 달래주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7.
예전부터 내가 음악에 대해 밀고 있는 두 가지는, 1) 음악≒음식의 은유, 2) 음악은 음악 자체보다는 상징과 이미지를 중심으로 소비된다는 거다.
사실 음악 그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다. 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 음악은 더 큰 이미지를 구성하는 일부에 불과하다.
장르로서 별 차이가 없을 음악들을 굳이 인디와 메이저로 나누는 것도 그게 (소비자에게) 상징적으로 큰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고,
남자가 불렀는지 여자가 불렀는지, 제목이나 가사 내용이 어떤지, 뮤직비디오가 어떤지, 기타를 직접 연주하면서 부르는지 기타 등등도 마찬가지다.
인디-여성-싱어송라이터-어쿠스틱-포크-감성. 어반-알앤비-소울. 발라드. 마초-갱스터-랩-하드코어-메탈-그런지. 기타 등등.
마치 사람을 대할 때 내면의 그림자를 투사하듯, 음악감상 역시 음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내면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모 인디 뮤지션이, 내가 좀 더 예뻤다면 더 나아졌을까 운운 하는 글을 본 적 있는데... 충분히 그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ㅠ)

...비슷한 맥락에서. 누구든 어떤 음악을 좋아하든, 아이돌을 듣든 트로트를 듣든 간에, 스스로의 좋다는 느낌에 의구심을 갖지 말았으면 좋겠다
(특히 주위 또는 웹에서 음악 취향 가지고 꼰대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러기 쉬운데... 당당히 좆까라고 말해주기를.)
(예를 들어, ‘아이돌 음악’이라는 추상성을 혐오한다는 건 그것들이 상징하는 어떤 정서-상징을 그 사람이 억압하고 있다는 단서라고 받아들여진다.)

(음악감상의 폭이 비좁은 것과 음악 취향이 저질이라는 건 엄밀히 다른 문제다...) (음악이 뭐 대단한 거랍시고, 사실 감상폭이 좀 좁으면 어떤가?)

8.
예전에는 정신건강을 위해서 거슬리는 인터넷 뉴스나 게시판 글들을 의식적으로 멀리하고 있었다면,
최근에는 오히려 그런 글들이 보일 때마다 따로 캡쳐해 놓고 더 곱씹어 읽으며, 정확히 어떤 부분이 내 속을 왜 긁는가?를 구체화하려 노력 중이다.
단순히 ’기분이 나빠지니까’ 수준 말고. 내가 그런 것들을 정확히 왜 불편해하는지. 그것들이 내 안의 어떤 부분과 배치되는지.

최근 가끔 들르는 커뮤니티의 자유게시판 보다 보면, 어떤 이슈가 뜰 때마다 ‘좌파적 가치관’의 기치를 들고 게시판을 평정-_-하려 드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런 글들을 보다 보면, 종종 도덕적-그들 집단이 공유하는 ‘상식’에 의한- ‘단죄’에 대한 갈망이 병리적으로 보이는 시점이 있다.
생각해 보면 그리 낯선 광경도 아니다. ...한때 내가 비슷한 정서와 사고방식을 갖고 그치들 하는 짓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는 것만 빼면.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 소위 ‘좌파적-징벌적- 사고’는 극복되어야 했던 하나의 신경증적 증상이었다.
자세히 쓰려면 길어지는데... 과도하게 억압된 내면 요소-그림자-의 세상에 대한 투사, 라고 하면 대충 맞을 것 같다.
어떤 이슈에 대해 사람들이 쓴 좌파적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분노와 증오, 무력감에 빠져들어 있는 걸 자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런 강렬한 적대적 감정을 소모할 분출구를 찾는 게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당시에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자신과 화해한 자만이 세계에 대한 공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예전에 스노비즘을 두고 ‘심리적으로는 구리지만 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도움이 된다’ 식으로 써놓은 걸 본 적이 있는데,
자주 보이는 ‘좌파적 사고’에 대해서도 비슷한 느낌이다. 사회발전에 있어서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개인 차원에서는 뭔가 안쓰럽다.
(...뭐랄까, 편집적 사고도 실제로 적대적인 환경 안에서는 적응적일 수 있다 식의 얘기를 하는 기분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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