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결심

Posted 2014. 1. 5. 00:18,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무언가를 읽거나 보고 나면, 단 한 줄이라도 뭔가 느낀 점을 끄적여놔야겠다. 그 감상이 뻔하든 진부하든 상관없다

아무리 구원은 셀프라지만, 결국 그 실마리는 언제나 바깥으로부터 온다.
그 누구도, 100% 스스로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헤쳐나갈 수는 없다. 인간은 만물을 내면에 품은 신이 아니기에, 내면의 창발에는 결국 한계가 있다.
결정을 내리는 건 결국 본인의 몫이지만, 그 이전의 대부분의 것들은 결국 외부에서 온 것들이다. 항상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국 종교에서 하는 말들이 다 비슷한 범주로 수렴되는 것 같다. 종교를 대하던 반감적인 태도를 조금 바꿔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중이다.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라는 범 단위로. 받을 것 안 받을 것을 선별하는 태도로 접근해봐도 좋을 것 같다.

새내기 때 내가 주워들었던 철학 교양과목. 내게 빅엿을 줬던.-_ 철학에 대한 지독하게 고리타분한 선입관을 심어주었던 그 수업.
결국 내가 철학에 대해 겉핥기로나마 흥미를 갖고 접근하는 걸. 근 반십년 가까이 늦춘 장애물이 되었던 그 수업.-_
아마 그 때. 그 얼치기 교수가 뜬구름잡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대신. 차라리 지루하게 철학 교과서 진도나 나갔더라면. 차라리 그게 나았을지도.
결국. 기억나는 건 무슨 과제라며 번역해오라고 하던 (아마 자기 번역 업무였을 듯..-_) 영어사전 같은 쪼가리밖에 남은 게 없다.-_

언젠가부터 도서구매 성공률이 거의 100%에 육박하기 시작했다. 구입한 책마다 만족스럽다. 서점에 가서 미리 훑어봤다는 걸 감안해도 그렇다.
(대신에 도서 구매율 자체는 형편없이 떨어진 건 안자랑.-_ )
내가 책 소식을 접하는 가장 안정적인 창구는 아무래도 구독한 블로그 포스팅에 어떤 식으로든 언급된 경우다. (판단이 용이하다)
지금까지 쭉 수집해온 블로그 구독 목록은, 결국 웹상에서 내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처가 되었다. 심지어 틀린 정보조차 간단히 걸러낼 수 있다.

예전에 꿈들을 기록하고 그걸 짤막한 글로 바꾸려는 시도를 한참 하던 시절에, 시詩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감을 잡을락말락 한적이 있다.
단어를 고르고, 어순을 바꾸고, 이리저리 퍼즐맞추듯. 최대한 (심상?) 표현하고자 하는 감각을 미적으로 묘사하는 것.
당시에 (최근까지도) 나는 단순히 꿈 기록을 하고 있다고만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쓰던 것들이 다 어설픈 시詩가 아니었나 싶다.
(꿈 맥락 기록 자체는 시가 아니지만, 분위기. 이미지. 감각을 최대한 생생하게 언어로 재현하려는 시도는 시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 같다)

한 때 가장 좋아하던 단편소설 중 하나인. 무라카미 하루키 - 잠. 그리고 기숙사 시절에 새벽 세시에. 한밤중에 혼자 옥상을 배회하던 기억들.
당시 내게 밤에 늦게 자는 걸 포기하라는 건.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는 건. ‘철든 영역’에 들어오라는 것처럼 들렸다.
미성숙함의 영역. 불가해한 충동의 영역. 모두가 잠들고 홀로 깨어 있는 ‘한밤중의 영역’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지금은 약간 다르다. 여전히 홀로 깬 깊은 밤은 매력적이지만, 규칙적인 생활을 위해서 한밤중의 영역을 포기하는 것에 별반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결국. 흔히 말하는. 쉽게들 받아들이는 진보와 보수는. 그저 아이덴티티의 문제일 뿐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지. 결국엔 정체성. 자기이미지다. 그 다음에는 그냥 따라오는 것뿐. 경제가 어떻든 간에 그건 나중 문제다.
요즘은 사회문제에 대해서 신기할 정도로 관심이 없어졌다. 직접 겪는, 나 자신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게 삶에서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올해에는.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다. 삶의 충만함을 느끼고 싶다.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반-삶적인 감각을, 암울함을 씻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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