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세 권째 읽고 나니. 내가 이 작가한테 뭘 기대하고 있었나 싶다.
하루키가 상실과 회귀본능을 다뤄내는 묘사는 탁월할지라도. (레알로. 인정) but 그 극복과 그 너머를 (본격적으로는) 다뤄내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양을 쫓는 모험. 댄스댄스댄스. 다자키 쓰쿠루까지. 세 권째 읽는데 기본적인 그 상태에서 ‘큰’ 발전이 없다는 느낌이다.
(쭉쭉 성장하고 변화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 순간의 그 정서를 (매번 손톱만큼 나아지게) 반복해서 다루는 느낌...)
하루키는 (지금 시점에선) 더 안 읽어봐도 될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기회가 되면 한두 권쯤 더 읽어볼지도 모르지만 큰 기대는 안 할 것 같다.


쓰쿠루는 (그 특유의 건실함과는 별개로) 확실히 미숙한. 깝깝한. 애스런 느낌이 있다.
(전작들 주인공에서. 그 미숙함을 -나름-커버해주던 나사빠진 능청과 다 좆돼도 상관없다는 니힐니힐이 빠진. 살짝 재미없는-밋밋한- 느낌...)
(자기 감정 다루는 데 깜깜하고 뭔가를 억누르는 데 익숙한 느낌. 맛이 간 ‘화성인’에서. 억제된 소시민 쪽으로 더 기운 느낌...)


(쓰쿠루 입장에서의) 심리적인 의미(‘아니마’...)가 아니라. 현실적인 연인관계로서 말하자면. 사라는 쓰쿠루에게 과분하다.
유사-상담적 대화... 일방적으로 사라가 쓰쿠루를 담아주고 자극하고 끌어주고. 노력을 들여 일종의 심리적 ‘봉사’를 해 주고 있다는 걸 알아야 된다.
반면에 사라가 쓰쿠루한테 받을 수 있는 건 얼마나 될까. 쭉 쓰쿠루 뒤치닥거리 하다 말 게 아니라면...
“아마 넌 연상의 여자와 잘될지도 몰라.” 반대로 얘기하면. 뭔가 취약함을 ‘보듬어주고’ 끌어주는 역할에 익숙한 여자가 필요하다는 얘기일 수도 있고...


p.78-79.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예요. 「순례의 해」라는 소곡집의 제1년, 스위스에 들어 있죠.”
“Le Mal Du Pays. 프랑스어에요. 일반적으로는 향수나 멜랑콜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 정확히 번역하기가 어려운 말이에요.”


p.240. 아카의 “너는 이제 별로 나를 좋아하지 않겠지?”
이건 예상못한 돌직구였다...-_- 이전 대화에서 형성된 분위기를 찢고 갑자기 훅 들어오는 느낌. 나라도 말문이 턱 막혔을 것 같은...


포르말린에 담긴 여섯 번째 손가락의 은유...
그걸 안 버리고.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된 채로 갖고 있는 것까진 이해하겠지만. (나도 그런 거 갖고 있는 게 몇 개 있긴 하지만...)
그 의미가 본인에게 너무 큰 무게를 갖도록 놔두는 건. 얽매이는 건. 센티멘탈리즘. 미숙함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혹여나 본인 뜻과 상관없이 불타버린대도 속시원해할 수 있을 때에야. 자기 의지로. 의식적으로 떠나보낼 수도 있어야 성숙이라 생각한다.


(최근 읽은) 하루키의 소설들은. 좀 심하게 말하자면. 죽은 자식 부랄 만지듯 여섯번째 손가락 잘린 자리 붙들고 꼼지락대고 있는.-_- 그런 느낌이다.
(거기에 얽힌 정서적 과정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ㅠ 죽은 자식 불알이 얼마나 애틋하겠어.)


무슨 조화니 완벽하니 어쩌니. 잃어버렸단 걸. 변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어지간히 환상에선 벗어나지 못한 느낌...
그건 완벽하고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내 게 아니네. 어쩌고 상실감에 시달릴 게 아니라. 그 ‘완벽하고 아름다운’ 환상 자체를. 현재 시점에서 다뤄야 된다...
그 당시 수준 그 당시 시점에서 아름다웠던 걸. 그때 거기서 1도 안 변하고 지금까지 끌고올라 그러니. 여기저기서 불일치가 발생하는 거지.
그 때 잃어버린 것도 결국 자기가 얻었던 걸 텐데. 뭔가 새로운 걸 얻을 생각은 없고. 잃어버린 거에만 골골하고 성장을 거부하면 걍 그대로 가는 거고.
그 당시 졸라 예뻤던 유리구슬이. 지금 보면 걍 싸구려란 것도. 청승떨 게 아니라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되고.
자라면서 얻은 세부적인 통찰력이. 어릴 떄 멍청해서 단면밖에 못 봐서 졸라 행복한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 머리 맞고 술먹고 그 때로 퇴행하든지.
뭔가 내가 사로잡혀 있던. 지나온 그 지점을 자꾸만 재차 자극하려는 게 있으니. 뭔가 깝깝한. 짜증이 날락말락 하는 느낌이다.-_-
(...이건 뭔가. 소설 자체에 대한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융적으로 말하면. ‘뜯어내어진’ 과거-상징적인 ‘죽음’에 이어. 새로운 동일시-‘탄생’의 의식이 필요한데. 하루키 소설에선 다들 그게 결여되어 있다.


그래도 여러 면모에서 댄스댄스댄스보단 더 나은 반복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있다.
막연한 무언가를 붙잡을 때까지 발 가는 대로 춤을 출 뿐이었던 댄스댄스댄스와는 달리. 쓰쿠루는 좀더 능동적인 느낌. 무려 핀란드까지 찾아간다. (!!!)
(보통은 나고야에서. 개요를 파악한 수준에서 끝나겠지. 핀란드까지 간 건 진짜로 진지하게 작정한 거고.)


p.399. 꿈-
고작 그거 알았다고. 무슨 세상의 진리를 깨우친 것마냥.-_- 완벽한 음악을 연주하고 암호들에 올바른 형태를 주고 어쩌고-
“그러나 앞에 있는 청중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이 음악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문득 깨달았다. 악보를 넘기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의 손가락이 여섯 개라는 것을.”
아이고...


과정상에서는 약간 나을지언정. 결론도 그렇고. 댄스댄스댄스보다 심리적으로 확 발전한 느낌은 아니다. 이제 첫걸음 막 떼기 시작한 수준...
소설 다 끝나갈 때. 맨 마지막 장에 가서야. 겨우 생각이라고 할 만한 걸 하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이제 시작이라는 느낌.
에리가 말한 “지금 그 여자를 놓쳐 버리면 다시는 아무도 가질 수 없을지도 몰라.”
난 이게 통찰은커녕. 특히나 지금의 쓰쿠루 같은 사람한텐 함부로 해선 안 될. 섵부른. 저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_-
쓰쿠루는 지금 본인 토대나 잘 다지고. 갓 시작한 상실을 다루는 작업을 계속하고. 사라가 있든 없든 본인을 다잡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회귀본능을 다뤄내고 나면. 소망의 프레임 자체가. 바라보는 곳-원하는 것 자체가 바뀔 수밖에 없음을. 그 정도로 객관화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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